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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 Aug 07. 2023

자기기만

소우주

요즘 밀란 쿤데라 애도 기간을 갖고 있다.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톨스토이의 소설<안나 카레리나>의 캐릭터를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있다. 쿤데라는 <안나 카레리나>를 가장 위대한 소설 중 하나로 꼽을 정도였으니, 자신의 영웅에게 바치는 찬사였을 것이다. 나는 <안나 카레리나>를 2번 정도 도전하다 포기한 상태였는데, 최근 친구의 추천으로 다시 펼쳐들게 됐다.


사실 이건 친구를 위한 말이고, 최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라는 책을 구매했는데 그 가운데 <안나 카레리나>를 극찬했기 때문에 다시 읽어보기 시작했다. 나보코프는 비록 20살에 러시아에서 쫓겨났고 미국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소설은 러시아라는 거대한 줄기에서 나왔다. 소설 <롤리타>와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인간 정신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러시아스럽기 그지 없다.


그런데 알고 넘어가야할 점이 있다. 나보코프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들을 유치하다고 평가한다는 것이다. 거대한 자아, 너무나 거대해서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캐릭터, 그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에 관한 그 어떤 진실도 알 수 없다. 물론 도스토옙스키만큼 인간 정신(질환)을 세밀히 탐구한 소설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인간의 '자기기만'을 포착하는 데 있어서 탁월하다. 주인공 안나는 유부녀다. 사랑 없는 결혼을 했다. 상대는 20살 연상인 알렉세이 안드로비치다. 그는 유능한 고위 관료이며, 똑똑하고 단호하다. 이런 사람이라면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단호하게 이혼할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아내에게 바람 신호를 읽는다면 사설 탐정을 고용해 증거를 수집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상남자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는 전형적인 '하남자'다. 사교계는 안나의 불륜 사실을 눈치채고 수근거린다. 똑독한 알렉세이 안드로비치도 모를리 없다. 그러나 그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묘사한다. '알렉세이 안드로비치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그는 실제로 몰랐다.' 인간은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충분히 모를 수 있다. 이 얼마나 우리 스스로도 숨겨온 자기기만이란 말인가!


알렉세이 안드로비치만이 아니다. 안나와 내연남 브론스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상황을 명확히 인식하려고 하지 않으며, 절대로 객관적인 상황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다. 이야기는 자기기만하는 인물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끊임없이 이어진다. 현실에서 경계를 지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상황들은 실제로 경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가 경계 긋기를 두려워서 회피하기 때문일까?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회피주의자들!'이라며 자기기만하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그런데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황을 직면하기가 쉬운 일이던가? 보지 않으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보이더라도 보이지 않은 척 하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편리한 자기기만이 있는데 괜히 어렵고 힘든 길을 갈 이유가 없다. 그래수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자기기만이라는 소우주에 갇히길 자처하는 것이다. 그 소우주를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에 대한 수치심에서 비롯된 자기기만이 내 안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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