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산문선, 정소영 엮고 옮김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37)
집에서 책을 읽다가 공책과 볼펜을 호주머니에 넣고 동네 책방으로 갔다. 소한이 지났지만 통영은 많이 춥지 않다. 하늘이 푸르다. 구름이 드물다. 저 멀리 북포루가 보인다.
-안녕하세요.
산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체온 측정과 손 소독을 하고 작가의 방으로 갔다. 새로 들어온 신간을 한 권 뽑아서 의자에 앉았다. 잠시 후에 어떤 외국인 여자가 들어왔다.
-헬로.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어디서 오셨어요?
-영국에서 왔어요.
-어디서 오셨어요? 여자도 물었다.
-집에서 책을 읽다가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책방에 왔어요. 책을 좋아하는데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모를 때가 많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실례지만 영국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여자는 빙그레 웃으며 작가라고 답했다.
작가라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알고 있지 않을까. 영국에서 통영까지 온 작가를 다른 곳도 아닌 동네 책방에서 만났으니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울프 선생님,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울프는 작가의 방을 한 번 훑어보고는 내 앞에 앉았다.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나는 늑대의 먹잇감이 된 느낌이 들었다.
-나도 글을 쓰는 것만큼 독서를 좋아해요. 울프는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늘 생각하지요. “사실 독서에 관해서 다른 사람에게 조언할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어요. 조언을 구하지 말고 각자 자신의 본능에 따르라, 각자의 이성을 사용하여 자신의 결론에 이르라는 것이죠”(39).
본능과 이성이라. 과연 늑대인간다운 말이야.
-좀 막연한 것 같은데 선생님은 어떻게 하시는지 듣고 싶어요.
-내 말에 “합의가 된다면 내가 가진 얼마간의 생각과 제안을 자유롭게” 말해줄게요(39). 책에는 여러 종류가 있어요. 소설 전기 자서전 시 등이 있지 않나요. 어떤 책에 관심이 많으세요? 울프가 물었다.
-요즘은 소설을 많이 읽으니까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알고 싶어요.
-소설을 좋아한다니 아주 반갑군요. 역시 잘생긴 사람은 달라요. 울프가 말했다. “소설가의 작업이 어떤 요소로 구성되는지를 가장 빨리 이해하려면 읽지 말고 직접 써봐야 할 겁니다”(42).
-직접 써봐야 소설을 잘 읽을 수 있다고요?
-뭐 항상 그러라는 건 아니에요. “우선 뚜렷한 인상을 남겼던 어떤 사건을 떠올려보세요.” 그걸 쓰는 거예요. “이제 모호하고 정신없는 당신의 글에서 눈을 돌려 대니얼 디포나 제인 오스틴이나 토머스 하디 같은 위대한 소설가의 작품을 보세요. 그들의 대단한 솜씨를 더 제대로 인정할 수 있을 겁니다”(42).
참나, 그걸 말이라고 하시나. 내가 쓴 글은 형편없을 테니 그건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
-어떤 사건을 “말로 재구성하려 하면 그것이 수천 가지 상충되는 인상으로 나뉘죠. 어떤 건 억누르고 어떤 건 강조해야 해요”(42). 내 말은 소설가들이 무얼 억누르고 무얼 강조했는지 보라는 것이죠.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은 일 같았다.
-“소설을 읽는 일이 그래서 어렵고도 복잡한 기술입니다. 위대한 소설가, 그 위대한 예술가가 제공하는 것을 전부 활용하려면 대단히 섬세한 직관력을 지녀야 할뿐더러 아주 담대한 상상력도 필요해요”(43).
글을 많이 읽어도 글을 잘 못 쓰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내 문제를 소설가들이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봐야 하는데 그걸 보려면 직접 써야 하고, 쓰지 않으면 내 문제가 뭔지 모르니까.
-그래요. 소설은 쓰면서 읽는 거예요. 내 생각을 읽은 듯 울프가 말했다. 그러나 그건 겨우 “독서의 반쪽일 뿐이에요”(54).
독서의 반쪽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책에서 온전한 즐거움을 얻으려면 다른 반쪽도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무수히 많은 인상에 대해 판단을 내려야 하는 거지요”(54).
울프는 소설뿐 아니라 전기와 자서전, 시를 읽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한 후 책을 읽었으면 시간을 두고 책들을 비교하라고 말했다. “각각의 책을 그 부류에서 가장 훌륭한 저작과 비교하는 거예요”(55). 울프는 그게 간단한 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책을 눈 앞에 두지 않은 채로 독서를 지속하는 일, 이 그림자 형태와 저 그림자 형태를 나란히 놓는 일, 그렇게 어떤 점을 밝혀주는 생생한 비교를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이해력을 지니고 폭넓게 독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요”(56).
울프는 그렇게 책을 판단하는 게 독자의 의무라고 말했다. “이 책은 이런 부류의 책이고 또한 이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부분은 잘 안 되었고 이 부분은 성공적이다. 이 점은 형편없고 이 점은 훌륭하다”까지 말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러려면 상상력과 통찰력, 학식이 필요하지요. 한 사람이 다 하기는 어려운 일이에요(56).
-북클럽을 하면 돼요. 나는 무릎을 치면서 말했다. 책을 같이 읽으면 정말 유익해요. 나는 책방에서 열리는 북클럽에 대해 자랑했다.
-언제 한번 오세요.
-초대해주면 언제든 갈게요.
-선생님 말을 듣고 나니 독서란 어려운 일이군요. 도달하기 힘든 목적지 같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리 바람직한 목적지인들 누가 책을 읽으면서 최종 목적지를 생각할까요? 그냥 그 자체로 좋아서 계속 추구하는 것이 있지 않나요? 즐거움만이 최종적인 목적인 경우 말이에요”(60).
나는 울프의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그렇다면 안심하고 책을 읽을 수 있겠어요.
-나는 “꿈이 있어요. 심판의 날이 와서 위대한 정복자와 법률가와 정치가 들이 왕관이나 월계관을 쓰고 불멸의 대리석 위에 선명하게 그 이름을 새겨지는 보상을 받을 때, 옆구리에 책을 끼고 다가오는 우리를 보고 신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꿈이죠. ‘보게나, 저들에게는 달리 보상이 필요 없어. 우리가 여기서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네. 책 읽기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 아닌가’”(60).
나는 울프의 말에 기쁨을 느꼈다. 천국을 설명하는 어떤 설교자의 말보다 은혜로운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