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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아일기 쓰는 아빠 Oct 23. 2020

아버지父 와 나孝

인공지능 때문에 육아에 목숨 걸게 된 아빠의 사연 - part V

子曰, 父在觀其志 父沒觀其行
자왈, 부재관기지 부몰관기행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는 그 뜻을 살펴보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그 행동을 살펴보라

—공자, 논어, 학이편



선율이를 데이케어에 내려두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소풍' 떠나기 전날 밤에 설레임이 느껴졌다. 아주 잠시 동안, 하품하는 정도의 시간 동안만큼이었다—실제로 하품이 나오기도 했다—아들을 돌보는 게 피곤한 일이라는 증거였다. 양육이라는 게 스스로 자동으로 되는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 문득 내 아버지와 나, 그리고 나와 내 아들에 관한 절묘한 구도가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떤 생각에 깊이 잠겼었다. 


:효도孝道에 관한 생각이다. 


아들을 뒤로하고 되돌아오던 길목에서 한참 동안 서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소풍 가기 전날 밤처럼 설레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굳이 생각해 보기로 했다. 


교실의 틀을 떠나서 친구들 간의 우정을 확인하는 것이 소풍이다. 하지만 소풍의 진정한 기쁨은 떠나기 전날 밤에 있다. 이 설레임에 관해 조금 더 길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소풍을 떠나기 전날 저녁, 내 아버지는 별다른 말 없이 내 손에 몇천 원을 쥐어주셨다. 그걸 들고 집 앞 구멍가게에 달려갔다. 내가 좋아하는 과자와 음료수를 큰 봉지에 잔뜩 담아서 돌아오곤 했었다. 아버지가 함께 동행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나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아버지는 명랑한 성품이셨지만 대부분 무뚝뚝하고 다정스레 표현하는 법이 없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다. 소풍을 준비하는 어린 마음에는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늘 감사했다. 내 소풍 가방에도 친구들만큼 간식거리가 가득 채워졌으니까, 그것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막상 소풍 당일이 되면 피곤함과 노곤함이 연속되었다. 대중교통이나 대형버스를 타고 이동해서 내리고 걷고 또 기다려야 했다. 전날 저녁에 준비한 과자와 음료수의 비율이 불균형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극한 갈증을 느끼며, 바로 어젯밤 까지만 하더라도 쫄깃하게 느껴지던 설레임이 싸구려 장난감처럼 여겨지더니, 급기야 설레임이라는 싸구려 장난감 뒷면에 붙은 품질보증서가 목에 걸린 것처럼 갑갑해지곤 했었다. 게다가 점심만 먹이고 우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선생님들의 품에서는 야릇한 술기운이 돌고 있었다. 어린 그 시절에도 선생님들에게 속고 있다는 의문이 들곤 했었다. 


소풍은 미지의 환상과 같은 것이다. 전날 밤부터 잠을 설치게 되는데, 딱 거기까지가 소풍의 클라이맥스이며, 피날레다. 환상을 현실로 마주하게 되는 순간부터 화학 작용하던 감성 운동은 에너지를 잃고 만다. 소풍 전날 밤과 소풍 당일은 마치 포토샵 처리된 사진과 원본을 동시에 비교해서 보는 것과 같은 차이가 있다. 소풍 당일이 되어야, 비로소 설레임의 끝을 볼 수 있게 된다. 


선율이를 데이케어에 맡기고 뒤돌아선 이후 약 10초간, 찰나에 가까운 시간만에 아들의 서운한 표정은 마음속에서 불명의 기대감으로 바뀌곤 한다. 그리고 난 다음엔? 설레임이 비로소 시작된다. 하지만 예전에 느꼈던 소풍의 원리가 조금 다르게 적용된다. 소풍을 떠나는 학생의 입장이 아니라, 선생님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설레임이 조금 더 길게 유지된다. 그러한 유사점 때문에 소풍의 전날 밤과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 이후의 시간대에서는—소풍 당일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인간적인 욕구와 욕망이 목덜미쯤에서부터 기어 나오기 시작한다. 허무하고 무상한 시간이 긴 터널을 형성하고 내 눈앞으로 나선다. 이쯤에서 나는 과연 내 아들에게 어떤 아버지로 성장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할 필요성을 격하게 깨달아야만 했다. 



子曰, 父在觀其志, 父沒觀其行.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자왈, 부재관기지, 부몰관기행. 삼년무개어부지도, 가위효의.

—공자, 논어, 학이편


마침, 공자 선생님의 아버지를 공경孝道하는 것에 관한 중요한 말씀을 읽었다. 삼년무개어부지도, 가위효의 라고 했다. 대다수의 논어 해설자들에 의하면 3년 동안 아버지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효자라고 부를 만하다는 뜻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이다. 하지만 내 아버지와 나, 그리고 나와 내 아들의 관점에서 읽고 또 읽어보니 오늘의 내가 보기에 공자 선생님의 깊은 뜻을 충분히 이해한 해설 같지 않았다. 문자를 오롯이 해석하면 위의 뜻이 맞지만, 그 깊은 속 뜻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 나름의 해석을 덧붙여 보았다:


아버지가 살아생전에는 아버지의 생각에 대해 관찰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엔 아버지의 생각을 행동에 옮긴다.
아버지는 아들이, 3년 동안 고찰하고 그것을 지킬만큼의 위대한 생각을 물려줘야 한다. 
이것을 효孝 라고 부를만한 것이다.


효도孝道 는 억지로 받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는 이다.  


다시 내 아버지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입대하면서부터 아버지의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팔씨름에도 아버지를 이길 만큼 더 건장한 팔뚝과 어깨를 만지작 거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아버지의 가족 정책과 생각에 대한 무한했던 신뢰를 그 반대의 방향으로 거둔 것 같다. 아버지의 가장 따뜻한 표현이었던 '침묵'은 마치 수챗구멍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미역 조각처럼 단 한 줌의 동정으로 말라붙은 채 별 의미 없이 내 가슴에 남겨져 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내 아버지를 존경한다. 지금도 못난 이 아들을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신뢰하신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 아버지의 생각에 대해 많은 시간 동안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쉽게도 내 아버지 세대의 대부분이 그러하시듯, 그 사랑만큼은 3년간 숙고하게 될 것 같다. 그것은 시대적 안타까움이다.  


앞으로 십수 년간, 내 아들의 양육과 교육이 종결되는 그 시점까지 오늘 내가 생각했던 아버지의 존재에 관한 나의 마음이 진심으로 孝 에 이를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믿어본다. 그리고 내 아들이 孝 를 진심으로 다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늘 공부와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으려 한다. 


인공지능 시대,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 본연의 가치인 공감능력은  가 없이는 올바른 성장을 이루기 힘들 것이다. 孝 를 통해 타인을 이해하는 아들들과 딸들이 더 많아 지기를 바란다. 

 

데이케어에 내려두었더니 서운한 표정으로 서있던 선율이를 뒤로하고 되돌아오던 길목에서, 한참 동안 소풍 가기 전날 밤처럼 설레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굳이 길게 생각해 보았다. 



선율이와 산책: 아이의 체력 신장을 돕는것은 물론이고, 많은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최고의 양육 방법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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