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를 대하는 몇 가지 태도에 대하여
정치적 이상의 완성을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완성을 지향하는 마음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역사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무언가를 소망합니다. 그것이 정권 심판이든, 교체든, 탄핵이든 무엇이든 말이죠. 아무런 기대 없이, 그저 냉소적 태도만을 가진 사람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공동체적 대안을 찾기 위해 상식적 차원에서 대화하며 상대방의 가치 체계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이데올로기로 인한 민족사적 문제, 독재로 인한 인권의 탄압, 언론에 대한 탄압과 언론에 의한 호도, 상식의 부족 등으로 인해 정치적 주장에 대해 대화를 하기 어려웠습니다. 대화를 하다보면 서로간의 이해는 커가야 하는데, 그러기는 커녕 싸움만 되는 것이죠.
이러한 이유로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덕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물론 그런 상황이 있기야 합니다.) 하지만 자칫 강박으로 나타나는 '비정치적'이어야 한다는 환상은 오히려 정치의 발전을 막는 것 같습니다. 일상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표현하기가 익숙한 생활 정치가 우리나라에서도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중립은 적어도 달리는 기차 위에서 뛰어내리는 용기를 수반하는 적극적 행동이지, 기차 위에서 가만히 서있는 수동적인 비행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차 위의 중립은, 사실 움직이는 기차의 동력에 의해서 기차의 움직임에 대한 동의, 동조하는 것입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은 '중립이 범죄인 이유'라는 글을 통해서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옳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별해야 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대학 시절의 은사님은 비파괴적 진보와 합리적 보수가 이 땅에 공존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런 두 가치의 날개를 가진 새라야 하늘을 온전히 날 수 있다는 것이죠. 누군가는 적극적으로 가치를 주장하는 가진 날개여야 할테고, 어느 정도 둘을 연결/중재하며 이끌어갈 다리나 몸통의 역할 역시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리의 역할은 이것도 저것도 모두 옳다는 단순히 중립적으로 보이는 어중간한 태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필요 이상'의 파괴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들을 배제하려는 태도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격동하는 역사의 한 복판에 서있는 것 같습니다. 가치 판단과 전략, 새 시대를 향한 비전, 과거에 대한 명확한 청산...좀 더 바쁘고 명민하게 살아야 하는 오늘입니다. 조금은 더 정치 이야기를 해도 괜찮습니다. 타당한 정치적 소신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비파괴는 비폭력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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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잠언집' 中 - 중립이 범죄인 이유
해방 후 지금까지 독재적 군사통치가 판을 칠 때 많은 사람들이 비판을 외면했다. '나는 야당도 아니고, 여당도 아니다. 나는 정치와 관계없다' 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을 봐왔다. 그러면서 그것이 중립적이고 공정한 태도인 양 점잔을 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악을 악이라고 비판하지 않고, 선을 선이라고 격려하지 않겠다는 자들이다. 스스로는 황희 정승의 처세훈을 실천하고 있다고 자기합리화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얼핏보면 공평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은 공평한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은 비판을 함으로써 입게 될 손실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기회주의적인 태도다. 이것이 결국 악을 조장하고 지금껏 선을 좌절시켜왔다. 지금까지 군사독재 체제 하에서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이렇듯 비판을 회피하는 기회주의적인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좌절감을 느껴왔는지 모른다.
그들은 또한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악한 자들을 가장 크게 도와준 사람이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란 말이 바로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