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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로 Feb 14. 2018

너에게 큰 사람이고 싶었다

언제부터인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누군가와 사랑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어떠한 구속력도 없는 서로의 암묵적 약속에 의한 불완전한 관계이기에

관계의 끈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은 그에게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붙잡는 유일한 길은
그에게 내가 가치 있다 느끼게 하는 것이라 믿었다.


상대에 대한 미안함, 상처받을 이에 대한 애처로움 같은 연민의 감정들로

연인에 대한 도덕적 책임, 연애에 대한 사회적 통념 같은 단어들로

누군가의 마음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렇게 붙잡은 마음이 그리 행복한 결말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에


누군가와의 인연 지키고 싶다면, 누군가의 마음을 붙잡고 싶다면

그에게 내가 가치 있다 느끼게 해야 한다고, 그에게 끊임없이 설렘을 제공해야 한다고

그것이 그를 내 곁에 계속 머물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다.


그에게 큰사람이고 싶었다. 다시없을 이상형이고 싶었다.
그래야 그가 떠나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게 큰 사람이고 싶었다.

무엇이든 잘 해내고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기만 한 그런 사람

넓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품어주고 따뜻한 말로 위로를 건네주는 그런 사람

그래서 나보다 더 큰 사람은 없을 거라는 착각 속에 살게 하고 싶었다.


그에게 다시는 만나지 못할 이상형이 되고 싶었다.

그가 원하는 외모와 차림새를 한 보기만 해도 떨리는 그런 사람

그가 바라던 조건들을 모두 갖춘 흠잡을 것 하나 없는 완벽한 그런 사람

그래서 그가 꿈꾸던 이상형을 만났다는 환상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에게 설렘이고 싶었다. 그에게 멈추지 않는 떨림이고 싶었다.

지나가다 스치는 바람에도 나를 느끼고, 산모퉁이 피다만 꽃 한 송이에도 나를 그리는

그런 설렘이, 다시 찾아올지 않을 떨림이, 

잊은 줄 알았던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운명이 되어주고 싶었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기 때문이듯
그도 나라는 존재 그 이유만으로 내 옆에 머물고 싶지 않을까



그에게 난 그런 사람, 그런 사랑, 그런 설렘, 그런 떨림이고 싶었다.

그래야 그가 내 옆에 있는 것이 행복할 거라 믿었다. 

그래야 그가 내 옆에 머무는 것을 고민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그래야 그가 내 곁을 떠나지 않을 확실한 이유가 생길 거라 믿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의 옆에 머무는 이유가 그가 큰사람이기 때문이 아닌 그저 그이기 때문이듯

그가 내 옆에 머무는 이유가 나라는 존재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리 큰사람이 아니더라도, 꿈꾸던 이상형에 가깝지 않더라도 

나라는 이유만으로 함께하고 싶은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 가장 나 다운 모습 그대로

그의 곁에 한결같이 머무르는 것, 그의 옆을 오래도록 지켜주는 것

어쩌면 그것이 사랑이란 단어에 가장 걸맞은 모습의 관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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