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로 Nov 15. 2020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물음에 대답은 질문의 모호함 만큼이나

대답 또한 그리 명쾌하게 말하기 어려운 주제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살 것인가, 주제의 모호함 만큼이나 
답변 또한 그리 명쾌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철학적 주장에 빗대어 대답할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는 가장 하는 훌륭하다 여겨지는 인물의 삶을 빗대어 대답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마음 가는 대로 살라 대답할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는 남은 이들에게 오래 기억되는 삶을 살라 대답할지도 모른다.


막연해 보이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가 쉽게 모른 척 지나치기 어려운 이유는

어쩌면 우리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에

모두 동의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대답은 모두 다를지 모르나

우리 모두의 삶에는 끝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며
어떠한 대답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하는 질문임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기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답 없는 질문을
우리는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어쩌면 에녹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 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에녹은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하늘나라로 같다고 성경에 기록된 인물이다.

그런 놀라운 은혜를 입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에녹에 대한 그리 많은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그에 대한 기록은 아담의 족보를 설명하는 가운데 잠시 등장하며

그의 365년이라는 긴 인생이 단 네줄로 간단하게 설명되어 있을 뿐이다.


(창세기 5:21~24)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어떠한 일을 했는지, 어떤 성취를 이뤘는지,

어떤 선행을 베풀었는지, 얼마의 부를 누렸는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으며, 그저 기록된 단 네줄을 통해

그가 어떻게 죽음을 피해 간 놀라운 사람이 되었는지 추론해볼 수밖에 없다.


에녹은 죽음을 피해 간 놀라운 인물임에도
그에 대한 설명은 단 네줄로 기록되어 있다.


에녹은 365세를 살았는데 하나님과는 300년 동안 동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에녹은 인생 전체를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 아니라 65세에 어떤 결정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한 삶을 살게 된 것임이 분명하다.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결정적 사건은 65세에 아들을 낳은 것이었다.

그의 아들 므두셀라의 이름은 '이 사람이 죽으면 심판이 임할 것이다'라는 뜻이었다.

에녹은 65세 아들 므두셀라를 낳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너의 아들이 죽는 그날 세상에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를 받은 것이다.

(실제로 무드셀라가 죽는 그해에 비가 오기 시작하여 노아의 방주 사건으로 불리는 심판의 날이 시작되었다.)


사실 무드셀라는 성경에 기록된 가장 장수한 사람이지만

아들인 므두셀라의 삶의 끝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전혀 알 수 없었던 에녹의 입장에서는

하루하루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에녹은 매일을 삶의 마지막 날의 모습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일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을 마주한 나의 태도가 어떠했을까를 생각해보면

에녹의 마음과 행동이 쉽게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

에녹은 그렇게 하루하루를 심판의 날을 앞둔 자의 심정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를 기쁘게 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300년의 삶을 오로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살았던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칭함 받고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곁에 머물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저 철학적이고, 막연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쩌면 오늘이 나의 삶의 마지막이라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과 동일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쩌면
마지막 날 어떤 하루를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과 동일할지도 모른다.


그리 무리한 해석도 아닐 것이
우리의 삶 또한 오늘이 또는 내일이 마지막 날일지 누구도 알지 못하기에

마지막날에 어떻게 살 것인가는 나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와 동일한 질문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어떻게 보낼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대로 내가 오늘을 살고 있지 않다면
어쩌면 나의 삶이 아직 넉넉히 남았을 것이라 믿는

혹은 죽음은 나에게 아직 다가오지 않은 막연한 미래라 치부하는 

오만함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살 것인가' 수많은 고민과 삶의 무게 속에서
스스로에게 묻는 단 하나의 질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나의 마지막 날은 어떤 모습 이어야 하는가
그게 오늘이라면 난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가
수많은 번민으로 가득한 오늘 밤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고 싶은 질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선택의 갈림길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