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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창섭 Feb 08. 2022

혼자 하는 화해 4

소동   (안희연_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왔다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고

 

어제는 우산을 가방에 숨긴 채 비를 맞았지

빗속에서도 뭉개지거나 녹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퉁퉁 부은 발이 장화 밖으로 흘러넘쳐도

내게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다 


비밀을 들키기 위해 버스에 노트를 두고 내린 날

초인종이 고장 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자정 넘어 벽에 못을 박던 날에도 


시소는 기울어져 있다

혼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지워진 사람

누군가 썩은 씨앗을 심은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 


기침할 때마다 흰 가루가 풀풀 날린다

이것 봐요 내 영혼의 색깔과 감촉

만질 수 있어요 여기 있어요 


긴 정적만이 다정하다

다 그만둬버릴까? 중얼거리자

젖은 개가 눈앞에서 몸을 턴다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물방울들 


저 개는 살아 있다고 말하기 위해

제 발로 흙탕물 속으로 걸어들어가길 즐긴다






나는 몇 달 전, 슬프다? 힘들다? 괴롭다? 어떤 수식어와 어떤 형용사로 명확히 형언할 수 있을지, 아직도 잘 알 수 없는 개인사가 있었고, 그 당시에는 실제 내가 슬프고 힘들고 괴로운 것에 비해 더 크게 슬프다! 힘들다! 괴롭다! 소리쳐야만 할 것 같은 시기였었고, 지금은 실제 내가 슬프고 힘들고 괴로운 것에 비해 그 어떤 슬프다 힘들다 괴롭다는 소리를 내선 안 될 것만 같은 시기가 된 것만 같고... 


그럼에도 이 여름, 매주 출근을 위해 고등학교의 높은 언덕을 오르고 있고 그건 어쩌면 살아 있다고 말하기 위해 흙탕물로 걸어들어가는 것만 같다. 매일 그 높은 언덕을 오르면서 생각한다. 오늘도 그냥 확 대충 살아버릴까? 오늘도 그냥 다 조져 버릴까? 하지만 절대, 이 오른 언덕을 다시 내려가 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진 않는다. 다행일까? 다행이다. 매일 소동이 일어나지만 매일 울지는 않는다. 매일 언덕을 올라가지만 난 내려가야 할 때만 그 언덕을 내려간다. 매일 그 언덕에서 배운다.



20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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