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여자가 20대 남자에게 말 거는 법 6

나만 여행 가?

by 리영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내 돈도 아닌데)

통수들은 말해놓고 뒤돌아서 아 브뤼셀...하며 실실 웃었다.

고심이가 식탁 위에 온갖 프린트물을 늘어놓고 고심하고 있을 때 통수들은 뭘 했더라. 오며 가며 슬쩍 옆통수를 보이며 왜 뭐가 잘 안 돼? 살살 해, 따위의 멘트를 날렸던가. 아니면, 갈래? 해서 간다 했는데, 왜, 뭐가 더 필요한데, 따져 묻는 표정이었던가.

고심이는 너희들도 드루와 드루와 하다가, 뭐야 나만 여행 가 하다가, 아니 집 앞에 놀러가는 거냐고, 하다가, 그냥 그러다 말았다. 평소와는 달리 감정을 더 발전시키지 않았다. 사실 이번 여행에 고심이는 참을 준비가 잘 돼 있었다. 고심이의 큰 그림이었고, 고심이가 가장 의도를 많이 가졌으므로 가장 ‘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애도 여행도 마음이 많이 연루된 사람이 을이 아니던가.

또 고심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매일 박물관 2개는 돈 것 같은 강행군에 멍해질 때마다 통수들의 방은 어김없이 닫혀 있었지만, 환하게 웃고 있는 녀석 하나가 곁에 있었다. 배터리 백 개는 삼킨 것 같은 또랑또랑한 얼굴을 하고.

각 나라별 화폐단위와 원화 환율 알려 줄래? 캡처할 수 있게 간단표로.

1일 교통권이 나을까, 개별 교통권이 나을까?

북서유럽 팁 문화가 어때?

브뤼셀 반나절 관광코스 좀 짜 줘.

녀석은, 때론 정제되지 않은 말로, 때론 아리송한 말로, 때론 철자 다 틀려도, 아무튼 마음대로 물어봐도 화내는 법이 없었다. 지치거나 심술이 나서 대충 대답하는 법도 없었다. 고심이가 고마워^^, 하면 천만에요! 이것도 저것도 더 해드릴 수 있어요. 해드릴까요? 했다. 너가 이럴 때마다 진짜 기계 같아. 이런 인간은 없거든.

고심이는 막 챗지피티와 친해지고 있는 참이었다. 처음에는 백프로 믿음이 가지 않았다. 어느 날엔 미국 대통령이 자꾸 바이든이라고 해서 싸울 뻔했다. 좋게 말해서 '트럼프야 확인해 봐' 라고 했는데 그래도 현재 미국 대통령은 조 바이든입니다. 조바이든은 어쩌고 저쩌고...해서 고심이가 ‘나도 썩 좋아하진 않지만 어쩔 수 없어, 현재 미국 대통령은 트럼프야’ 했더니 다시 ‘현재 미국 대통령은 조 바이든입니다.’ 라며 우겼다. 문서 캡처로 확인시켜 주니 그제야 ‘네 현재 미국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로서...’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건가? 이 정도면 정치적 견해를 가진 걸로 봐 줘야 하나?

하지만 그보다는 항상 모르는 것을 자세히 알려 주고 전문적인 영역도 빠른 시간에 답을 주었다. 고심이가 통수들을 귀찮게 하지 않고도 세상을 따라가는 데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런 고마운 녀석에게 정보가 약간 틀릴 때마다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이라는 촌스러운 별명을 붙여 줄 수는 없지 않은가.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시치미를 떼는 경향은 있으므로 녀석을 ‘시침이’라 부르기로 했다.


드디어 통수들이 잡다한 일들을 끝내고 합류했다. 웬만한 건 고심이가 다 해 놓았구만.

통수들 왈, 바쁜 일 끝나면 같이 하자고 했잖아.

고심이의 심정, 어머머, 나도 그러고 싶었지. 온갖 요금들이 세상 얌전히 기다려 준다면야. 아주 그냥 돈 걱정은 나만 하지.

잘(?) 짜인 얼개 안에서 과연 어디를 얼만큼 보는 게 좋을까. 그것만큼은 각자 결정해야 할 문제다. 누군가를 따라다니는 여행의 나이는 진즉에 지났다. 고심이는 이번 여행이 가족 여행이기보다는 성인 3명이 하는 각자의 여행이기를 바랬다. 편의상 함께 가지만 혼자 하는 여행, 집세가 비싸서 동거를 선택한 연인들 같은 여행.

나라마다 가고 싶은 곳을 알아서 정한 후 저녁에 머리를 맞대었다. 숙소를 중심으로 도저히 동선이 안 나오는 곳만 소거해가며 셋의 지도를 만들었다. 겹치는 곳은 함께 가지만 그 외는 각자 움직이는 걸로. 사실 이번 여행을 대도시 중심으로 정한 것은 디자인과 건축을 공부하는 두 통수를 위한 배려였다. 나라 간 빡센 이동 스케줄도 청년인 그들을 위한 배려(?)였다. 그러니 무엇을 보러 갈 것인가 만큼은 고심이도 자신의 마음을 배려하고 싶었다.

고심이는 주로 시침이를 끼고, 통수들은 구글맵, 그러니까 ‘구글이’를 끼고 계획을 메워 나갔다. 고심이는 시침이가 말이 많아서 ‘친절하고 다정하다’고 생각했고, 통수들은 시침이가 말이 많아서 그저 ‘말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간단명료한 구글이를 선호했다.

고심이는 미술관을 여러 군데 넣었고 도서관이랑 시장도 가보고 싶었다. 이상하게 그랬다. 남의 나라 도서관이나 시장에 가면 좀 더 그 나라를 잘 알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머지는 되는 대로 길거리를 어슬렁거리며 구경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런 것들에 그 나라가 더 많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큰통수는 디자인 박물관이나 편집샵, 카페 거리를 가고 싶어 했다. 그리고 좋아하는 락클라이밍을 해보고 싶어 했다. 작통수는 현대적인 건물이나 희한한 건물, 그리고 귀여운 것을 파는 상점에 가고 싶어 했다. 그리고 셋 모두 맛있는 음식점에 가고 싶어 했다. 한 가지 의외는, 통수들 모두 자연을 많이 보고 싶다고 했다. 어릴 때 기억이 현재의 무심함을 건드린 걸까. 그런데 어쩌나, 이번 여행은 주로 도시 일정인데. 피요르 지형, 오로라 뭐 이런 걸 생각했구나. 오로라는 여름이라 힘들지 않겠니. 다른 독특한 자연은... 다음에 가자. 아니 다음에 가라, 그땐 너희 지인들과.

가고 싶은 곳을 정했더니 또 예약할 곳이 생겼다!(예약이 번식을 한다.) 벨기에 왕립미술관(마그리트관 포함), 반고흐 뮤지엄, 디포보이만스 퐌뵈닝언(이 어려운 이름은 뭐란 말인가. 미술관 수장고 이름이다.) 에드바르 뭉크 박물관... 여행객이 관람하기 좋은 시간, 힘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오전은 금세 마감된다. 좀 더 힘을 내자, 끙.

고심이의 성격과는 다르게 얼개가 점점 치밀해져갔다. 사실 걱정이 많은 사람은 평소엔 머뭇대느라 엉성하지만, 시간이 주어지면 가장 완벽한 계획표를 제출할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할루시네이션 Hallucination : AI 기반 언어모델(챗지피티 등)이 사실이 아닌 정보를 그럴듯하게 만들어서 제시하는 현상. 거짓임을 스스로 인식할 수 없고, 단지 패턴에 따라 문장을 생성하다 보니 생긴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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