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마음 남는 마음
예약과 계획이 다 끝났다. 긴 여행을 짧은 기간 안에 준비하려니 벅찼다. 밥을 챙겨 먹고 운동을 하고 여행 계획을 채워 넣는, 단순하지만 꽉 찬 날들이 계속됐다. 여행의 시간 안에 포함될 시간들이다. 그간의 일상과는 다른 감각으로 지나왔으니까.
일주일 전부터 거실이 짐으로 가득 찼다. 트렁크 세 개를 꺼내 놓고 그 앞에 줄 세우듯 각자의 물건들을 늘어놓았다. 고심이의 줄이 제일 길었다. 물건을 많이 갖고 가서라기보다는 웬만한 짐들이 미리 나와 있어서 그렇다. 통수들의 짐은 몇 개 안 나왔다. 심지어 고심이는 3일 전부터 간단한 세면용품도 그 줄에 놓고 썼다. 순발력에 기댈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 눈에 띄는 것만 덜렁 쌀 확률이 높다.
하루 전, 곧 떠날 물건과 남아서 집을 지킬 물건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거실에 놓여 있다. 남을 물건들의 시선엔 부러움이 가득했다. 그 중에서도 의사 표현이 확실한 식물들, 어쩐지 기운이 없다.
반려식물이라 해놓고... 이거 선택적 반려 아냐. 다른 나라 가서 더 멋진 식물들 보면 우리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할 걸. 이참에 삐뚤어지고 말 테다...
그제야 고심이는 아차, 2주 동안 쟤네들 물을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욕조를 이용하기로 했다. 일종의 저면관수. 물을 듬뿍 받아두면 2주는 견디겠지.
화분들을 옮기니 두 욕조가 가득 찼다. 물을 틀어놓고 한참 후 가보니 화분들이 둥둥 떠오르고 있었다. 물을 너무 많이 받았나. 그새 화분 2개가 발라당 엎어져서 흙을 다 쏟아버렸다. 삐뚤어질 거야 어쩌구 하더니 기어코...
고운 채를 가져와 쏟아진 흙들을 건지고 떠다니는 이물질을 건져냈다. 화분들을 다시 얌전히 다독이고... 떠나기도 전에 진이 다 빠질 기세다.
모든 준비를 하고 나니 문득 고심이는 자신이 이렇게나 J(계획형)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년 시절에는 분명 아니었다. P(즉흥적)였다. 대충 떠나고 대충 즐기다 오는 걸 좋아했다. 스케줄이 빡빡하면 오히려 짜증이 났고 즉흥적으로 생겨난 이벤트들을 즐겼다. 짐도 완전 어설프게 쌌는데...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이 불안해서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묶어놓고, 새 생명을 맞이하고... 점점 자신의 사람이 많아진다는 건 어떤 일의 결과가 자신 하나에만 미치지 않는다는 걸 배우는 과정이었다. 혼자라면 툭 털고 말 일이 그게 그렇지 않았다. 그러니 점점 빈틈을 없애고 불안정함을 안정됨으로 고정시키는 쪽으로 일 처리를 해왔다. 현재 근로 소득이 없는 고심이의 여행 비용도 남편의 파워제이 식 노동에서 왔다. 그도 한때는 누군가의 막막한 '뒤통수'였으리라. 불안을 딛고 어른이 되고 그렇게 나아왔으리라. 그러니 파워까지는 아니라도 세미 파워 정도는 흉내 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는지 모른다.
떠나는 날, 날이 무척 화창했다. 하늘은 파랬고 구름은 어찌나 예쁜지.
구름은 왜 늘 강아지를 닮았는지, 진짜 잘 다녀오라고 멍멍 배웅해 주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