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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랑 Oct 16. 2023

프랑스 치유 일기-퐁피두센터

12월 첫째 일요일에 갔던 로댕 미술관에 이어 1월 첫째 일요일에는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과 더불어 파리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퐁피두 센터를 찾았다. 18세 미만은 무료이니 이번에도 우리 부부의 입장료 28유로가 절약된 셈이다. 

퐁피두 센터는 건물의 외관부터 뭔가 범접할 수 없는 독특하고 난해한 디자인을 자랑하고 있다. 이 건축물을 본 아이들은 미술관에 간다며 왜 공장에 가냐고 물을 정도였다. 기존의 전형적인 건물과는 다르게 건물 내부에 감춰져 있어야 할 엘리베이터며, 배관이며, 철근 구조물이 모두 보란 듯이 외부로 드러나 있어 차갑고 딱딱하고 기계적인 인상을 주었다. 사진으로는 못 담았지만 뒷면에는 공기 순환을 위한 파랑, 배수를 위한 초록, 전기를 위한 노랑, 통로를 위한 빨간색의 파이프들이 강렬하게 노출되어 있다. 한껏 힘을 빼고 기능과 목적에 충실한 이 건물과 기능과 목적이 없어도 눈의 즐거움을 위해 한껏 치장되어 아름답다고 인식되는 파리의 건물들이 극적으로 대비를 이루었다. 이 상반된 종류의 건물들이 자연스럽게 비교되며 아름답다고 인식되고 믿는 그 아름다움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불현듯 의심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퐁피두 센터 건물을 저 멀리서 한눈에 바라보니 나름 매력적이고 감각적으로 느껴졌다. 


기나긴 줄을 서서 가방 검사를 마친 뒤 내부로 들어오면 이런 세련되고 도시적인 인테리어의 공간이 나온다. 가방을 맡기고 전망부터 보기 위해 밖이 훤히 보이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퐁피두 센터는 파리 전망을 보는 뷰 포인트로도 유명하여, 전망만 보기 위해 5유로짜리 티켓을 구매하는 경우도 있다. 퐁피두 센터 건물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은 단연 최고였다. 날이 상당히 흐리고 을씨년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한눈에 들어오는 파리 전경은 마음속까지 후련하게 해주었다. 20세기 초부터 최근까지의 작품을 보유하고 있는 퐁피두 미술관은 유럽에서 제일 규모가 큰 현대미술관이다. 시각 예술, 설치 미술, 순수 미술, 사진, 뉴 미디어, 실험 영화, 공예, 가구, 건축, 그래픽 디자인 그리고 미래 산업 디자인과 같은 다양한 범주의 예술 작품이 100,000점 넘게 전시되어 있다. 


전망을 감상하고 같은 층인 5층에 전시된 20세기 근대 작품을 둘러보았다. 그림보다 조각이 좋다는 첫째 아이는 초반 10분 정도 그림을 보더니 그다음부터는 힘들고 배고프다며 나가자고 재촉했다. 그나마 지도를 좋아하는 둘째 아이는 안내 지도를 들고 작가별로 숫자가 있는 전시관을 찾아다니는 재미로 여러 그림을 구경하며 미술관을 즐겼다. 첫째 아이 또래의 프랑스 여자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기 부모와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작은 드로잉 수첩과 연필을 가지고 마음에 드는 그림 앞에 철퍼덕 앉아 모사하는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다.


마티스, 세잔, 몬드리안 말레비치, 피카소, 브라크, 모딜리아니, 루소, 달리, 미로, 파울 끌레, 앙드레 마송, 장 뒤뷔페, 브랑쿠지, 레제 등의 명화들을 감상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고 복잡하여 저 작가들의 작품을 일일이 찾을 수가 없었다. 저 중 마티스와 피카소만 겨우 찾아 그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마티스가 그린 초상화는 단순한 선들과 강렬한 색채의 조화로 인해 외려 인물의 감정이 더 도드라지게 부각되는 특징을 갖는다. 옷이나 배경에 표현한 반복된 패턴이 20세기 초에 그린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인 일러스트 느낌을 준다. 나는 특히 바이올린 켜는 남성의 뒷모습을 그린 그림이 좋았다. 노을이 지는 구름 덮인 붉은 하늘을 바라보며 감성에 젖어 연주하는 외로운 노인의 구슬픈 바이올린 선율이 들리는 듯한 그림이다.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 같은. 


큐비즘의 심오함과 의미를 이해하기에 나의 감식안은 너무나도 부족하다. 이론적으로 미술 사조에서 어떻게 큐비즘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읽어봤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대상의 재현을 넘어 그 이면의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 사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해체하고 입체적으로 공간을 나누고 화면을 파편화는 창조적인 시도가 획기적이긴 하지만 나에겐 너무 어렵다. 하지만 이런 화가들과 이런 시도들이 있었기에 당연하다고 믿는 구태의연한 기존의 가치들에 그나마 나 같은 대중은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는 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피카소가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 그림을 사진으로 처음 접했을 때 충격과 감동이 있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이국땅에서 벌어진 전쟁을 소재로 너무나 생생한 장면을 연출한 그의 그림을 보며 참 감정적으로 뜨겁고 예민한 화가구나 느꼈었다. 그 유명한 [아비뇽의 처녀들]보다 한국전쟁에 대한 그림을 계기로 피카소가 궁금했었고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곳에 전시된 그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다음에는 퐁피두 센터 근처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을 꼭 들러 [한국에서의 학살] 작품을 직접 봐야겠단 생각을 했다. 둔탁한 손과 발 그리고 커다란 코,  마치 조각을 하듯 그린 초상화다. 손가락 하나를 이마에 올려 골똘히 생각하며 어떤 글을 읽고 있는 부자연스러운 포즈. 천재 화가 피카소는 이 손짓에 어떤 의도를 담았을 거 같은데 보면 볼수록 알쏭달쏭한 그림이다. 4층에는 근현대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실험 영화나 설치 미술이 많았다. 이러한 작품들이 무엇을 구현하는 건지,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건지 내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작품들이 꽤 많았다. 나중에 여유가 될 때 작품의 설명을 읽고 천천히 감상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에서 이미 짝지와 아이들은 정문 앞 광장에서 뛰어놀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때라 마음이 급했다. 앤디 워홀의 작품도 있었다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름 모를 작가의 몇몇 작품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보에티는 이탈리아 화가다. 그는 1971년에 아프가니스탄의 오래된 전통적인 직물 공예 기술을 발견하였다. 그 후, 보에티는 구소련의 침공으로 파키스탄에서 망명한 아프가니스탄 여성 난민들이 만드는 자수품을 기획하였다. 이 태피스트리는 동일한 양의 84개 색의 실을 활용하여 수를 놓았다. 보에티는 신문이나 잡지를 기반으로 수천 개의 추상적이고 조형적인 디자인을 직접 그렸다. 형태들을 무작위로 나열함으로써 무엇인지 정확히 구별할 수 없는 모양들이 혼돈을 자아낸다. 우주를 영감으로 삼은 이 작품은 단일성과 다양성, 결합과 분산 그리고 조화와 부조화를 테마로 표현했다. 이러한 정보를 알기 전에 다양한 색감과 모양의 랜덤한 나열이 알 수 없는 감동을 주어 작품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다 궁금해져 설명을 읽었고 그제야 이 작품을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한 땀, 한 땀 자신들의 전통 기술을 같은 상황에 처해있는 동포 여성들과 함께 작업하며 어떠한 애절함과 고통을 품었을까. 하지만 이 작업을 하며 슬픔이 희망으로 변하는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그들이 직접 고른 이 강렬하고 아름다운 색채의 작품에서 무한한 긍정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거 같았다. 나탈리아 엘엘은 신아방가르드와 페미니스트 예술의 선구자로 알려진 폴란드 예술가다. 사진, 비디오 아트, 행위 예술과 설치 미술을 작업하였다. 이 컬렉션은 그녀가 몸을 이용하여 폴란드 피에니니 국립공원 잔디 위에서 18개의 별자리 모양을 재현했던 퍼포먼스의 결과물이다. 이것은 1970년대 예술을 특징짓는 육체적 관능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시도였다. 그녀는 예술가가 창조자로서만 머무는 것을 넘어 예술의 대상과 객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발가벗은 여성이 전신을 역동적으로 이용하여 별자리 모양을 표현했다는 거 자체에 끌렸다. 드넓은 초원의 한복판에서 다양한 동작의 몸짓이 우주 탄생의 기원을 재현한 거 같기도 하였고, 아리송한 이 물질세계의 신비를 보여준 거 같기도 하였다. 사실 작품 설명에도 이 퍼포먼스에 대한 자세한 해설이 나온 게 아니라 아직도 정확한 의미는 모르겠다. 하지만 여성의 몸이 남성 관객의 눈요기로서나 성적 어필을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의미를 담고 예술을 완성하는 도구 자체로 사용됐다는 시도가 참신했다.수많은 인파로 인하여 욕심만큼 여러 작품 앞에 설 기회는 적었지만 잠시나마 그림과 함께 사색하고 어슬렁거릴 수 있었던 시간이었고 전혀 예상치 못한 감동을 주는 작품을 만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미술관 나들이는 언제나 수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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