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첫째 주 일요일은 튈르리 정원 안에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Musée de l’Orangerie)에 다녀왔다. 혹시 아이들이 미술관을 지겨워하면 아이들과 짝지는 바로 튈르리 정원 안에 있는 놀이터를 갈 계획으로 선택한 곳이다.
한국에 있었으면 설 연휴 분위기에 동요돼 한창 분주하고 들떠있을 시기인데 이곳에 있으니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일요일이다. 그래도 관광 중심의 도시에 살다 보니 이렇게 외출이라도 하게 되면 우리도 덩달아 여행하는 기분이 들어 묘한 설렘이 있다. 특히 비가 내린 뒤 갠 하늘은 유난히도 청명하고 파래 그 아래 유영하듯 떠다니는 뭉게구름과 그사이 반짝이는 햇살을 보고 있으면 딱딱한 마음이 어느새 부드러운 동심으로 무장 해제되는 듯 절로 신이 난다. 콩코드 역에서 나와 이집트에서 옮겨왔다는 오벨리스크와 에펠탑을 보며 튈르리 정원으로 들어왔다. 우측에 한글이 보여서 반가웠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삼성 광고였다. 파리 중심에 떡 하니 걸려있는 아름다운 한글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삼성 광고라 생각하니 돈이 좋긴 좋구나 비꼬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이 들었다.
거대 자본과 뛰어난 기술 그리고 브랜드 파워를 자랑하는 다국적 기업의 이면에 불법 경영승계, 비자금 조성, 탈세, 주가 조작, 횡령, 노동자와 노조 탄압 등 각종 불법과 비리로 범죄를 일삼으면서도 법과 국민을 조롱하며 돈으로 대한민국을 군림하는 재벌 총수 일가의 이미지가 겹쳐 보여서 그러할 테다. 무료 관람이라 그런지 미술관 입구에 줄이 꽤 길었다. 우리 가족도 일렬로 늘어선 긴 줄 끝에 합류해 지루한 기다림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보안 직원 한 분이 다가오더니 아이들이 있으니 먼저 입장하란다. 우리보다 한참 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을 한 몸에 받으니 야호 소리를 지르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보안 직원을 총총걸음으로 따라 재빨리 옆문으로 들어가 가방 검사도 바로 받고 코트도 맡기고 초스피드로 입장 절차를 마쳤다. 아이들도 자신들 덕분에 고속 입장 혜택을 누렸다는 걸 의식하고선 어깨를 으쓱거리며 뿌듯해하였다. 오랑주리라는 뜻은 ‘오렌지 나무 온실’이라고 한다. 오렌지 나무와 식물들을 보관했던 온실을 개조해 만든 미술관이라 그런지 확 트인 큰 창들을 통해 들어오는 빛 때문에 내부는 환하고 따뜻했다. 오랑주리 미술관은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0층에는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걸작인 수련les Nymphéas, Water Lilies 연작 총 8점이 전시되어 있다. 모네의 요청으로 자연광 아래 전시되어 있는 실제 연못과 비례한 크기의 그림들을 보니, 홀로 이 그림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모네가 의도한 대로 평안하고 평온한 모네의 정원Giverny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간 날은 붐비는 인파와 소음으로 그림을 통한 쉼과 마음의 평화를 전달받지는 못했지만, 자연광으로 가득 찬 순백의 전시관에 타원형으로 전시된 수련 연작을 보니 자기 작품을 매개로 모네가 전하고 싶었던 그 선하고 진실한 마음만큼은 전달되는 듯하였다.
1909년 <수련> 연작을 계획하면서 모네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지치고 고단한 사람들에게 연꽃이 흐드러진 고요한 연못을 바라보며 평온하게 명상에 잠길 수 있는 안식의 공간을 선사하고 싶다.” 이 연작은 모네가 평생을 바쳐 완성한 ‘불후의 역작’이자 진정한 유작이었습니다.
오랑주리 미술관 이용 안내문
‘빛의 화가’라 불릴 정도로 모네는 끊임없이 빛을 연구하였고, 다채로운 빛에 따라 변하는 자연물이나 풍경 또는 건축물의 연작을 그렸다. 아이들에게 이 그림은 하루 중 언제쯤 그린 거 같냐는 질문을 던져보기도 하고, 그림을 보는 위치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보이는지 이야기하며 모네의 그림을 함께 주시해서 보았다. 연신 감탄을 쏟아내는 나와 달리 그다지 감흥을 못 느끼는 아이들은 미술관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놀이터를 찾는다.
역시 미술품 감상이든, 공부든 억지로 시키는 건 뭐든지 좋지 않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깨닫고 우리 집 남자들을 밖으로 훨훨 보낸 뒤 나 홀로 미술관을 돌아다녔다.
지하 1층은 카페와 서점이었고, 지하 2층으로 내려오니 미술 중개상이며 예술가들의 후원자였던 폴 기욤Paul Guillaume이 수집한 미술품들과 건축가였던 장 월터Jean Walter가 수집한 후기 인상파 작가들의 여러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래는 폴 기욤의 집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놓은 작품이다. 파리의 유명한 화상이자 감각적인 후원자였던 폴 기욤은 그의 컬렉션으로 현대 미술관을 세우고 싶었던 야망을 실현하지 못한 채 죽었다. 하지만 그의 부인은 장 월터와 재혼 후 폴 기욤의 소장품과 장 월터의 소장품을 1959년에 국가에 양도함으로써 전남편의 꿈을 이루어 주었다. 세잔 그림이 전시된 방을 모르고 지나치는 바람에 아쉽게도 세잔 그림은 감상하지 못했다.
대부분이 20세기 전반기에 그려진 작품들이고 당대 유행하던 후기 인상주의, 입체파, 야수파 등의 기법과 세계관을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텐데도 화가마다 자신들만의 독특한 화풍이 존재했고 개성이 뚜렷하다는 점이 놀라웠다.
꽃과 여성을 그린 르누아르 그림들은 밝은 색채로 따뜻하고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계절로 표현하자면 따스한 햇살과 연한 바람으로 살랑이는 봄의 기운이 느껴졌다.
보다 단순해 보이는 마티스 그림은 멀리서 봐도 마티스 그림인지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그만의 독특한 화풍이 있다. 배경과 인물을 평면적으로 나열함으로써 작위성 없이 그 순간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포착한 듯하다. 연한 파스텔톤의 색감은 편안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인물의 눈을 외계인처럼 표현하고 얼굴과 목을 기형처럼 길게 늘여놓은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특이하다. 영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일부러 뭉개서 표현한 것은 사람의 눈이 담고 있는 내면세계의 깊이를 캔버스에 담지 못한 까닭이었을까.
피카소의 그림 중에는 임신한 여성과 남성의 애절한 포옹 그림이 매력적이었는데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지며 그 인물들이 담고 있는 안타까운 사연이 내 눈앞에 드라마처럼 펼쳐지는 듯하였다.
루소의 그림은 나로 하여금 멕시코의 전설적인 천재 화가 프리다 칼로의 그림들을 떠올리게 했다. 수틴의 그림은 소재 자체도 그러했지만 그 누구의 그림보다 강렬하고 격정적이었다.
하지만 난 그 어떤 그림보다 마리 로랑생의 그림들이 좋았다. 집 안 거실에 걸어두고 두고두고 보고 싶은 세련되고 우아한 그림이다. 로랑생에 대해 검색해 보니 시인인 기욤 아폴리네트와의 사랑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도 그녀가 그 시대에 피카소와 마티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기만이 표현할 수 있는 자신만의 그림 스타일을 구축해 온 화가였다는 사실이 더 멋져 보였다. 남자 화가들처럼 여자 모델들을 무작정 벗기지 않고 그들만이 갖고 있는 여성성을 이토록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기품있게 표현할 수 있는 건 그가 여자 화가였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오랑주리 미술관은 규모는 작지만 탄탄한 미술품으로 꽉 차 있어 알찬 감상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미술관 주변에 몇 점 전시된 로댕 조각품도 덤으로 감상할 수 있다. 게다가 정원 내 쉴 공간도 많고 산책도 즐길 수 있으니 최적의 데이트 코스이자 가족 나들이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지베르니(모네의 정원)를 다녀온 후에 모네의 수련 연작을 다시 보면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는 지인의 조언에 따라 지베르니를 다녀온 후 봄에 또 한 번 들러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