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과 신념 비우기
비건이 되고 나니 비건의 정당성과 유익성을 주변에 마구 알리고 싶은 욕구가 끓어올랐다. 건강하고 활력 있게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구를 지키는 데도 일조하는 일타쌍피 행위를 제발 같이 하자고 외치고 싶었다. 통곡물과 두부, 채소와 과일 식단으로 배를 채우니 2주도 안 돼 몸이 가벼워졌다. 이런 변화를 실제로 몸소 겪으니 열정이 더 타올랐다.
명상을 배우고 있는 스님에게 자꾸만 샘솟는 나의 열의를 털어놨다. 스님은 그거 또한 신념이 되어 집착할 수 있음을 꼬집어 주셨다. 자연과 동물을 위해 좋은 마음을 가졌다며 칭찬을 들을 줄 알았는데 내려놓으라니. 심지어 부처님은 비건이 아니셨단다. 그 옛날 수행에 전념하기 위해 탁발(집마다 돌아다니며 먹을 걸 구하는 행위)을 하셨는데 고기든 채소든 곡물이든 뭐가 되든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받아 드셨단다. 듣고 보니 부처님께서 “나는 채소만 먹으니 고기는 빼 주시오.”라고 까탈부리는 모습은 역시나 상상이 안 간다.
찬찬히 신념과 집착에 대해 곱씹어 보았다.
그동안 누군가에게 비건을 강요는 안 했지만(안 한 거 같지만;;) 일상에서 건강하고 윤리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시나브로 내 어깨를 올렸다. 나를 비우고 에고를 없애기 위해 명상을 한다지만, 여전히 내가 믿는 가치와 내가 판단한 옳음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여전히 ‘나’, ‘나’, ‘나’를 외치면서..
인간이기에 때론 무지해서 때론 어리석어서 여전히 갖가지 오류를 범하고 악업을 쌓으며 살아가면서..
한 대 세게 맞은 거 같았다. 농약과 제초제 없이 유기농법으로 토지를 경작하고 유기농 채소를 재배하는 아주 훌륭한 일을 한들 인간인 우리는 나도 모르게 얼마나 많은 작은 생명을 죽일 수밖에 없는가.
로컬푸드 마켓에서 제철 채소와 과일 위주로 구매해 먹는다지만 이따금 아보카도와 바나나 같은 수입 농작물도 즐겨 먹었다. 먼 나라에서 바다 건너 유통되는 만큼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환경오염을 차지하고서라도 다국적 기업들이 생산하는 바나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벌어지는 노동착취는 또 어떤가. ’ 초록의 금‘, ’ 수퍼푸드‘에서 이제는 '피의 아보카도‘란 별명으로 불리는 아보카도 마찬가지다. 숲을 파괴하고, 범죄 조직이 연루되어 노동자의 인권을 유린하는 비윤리적인 사례가 수없이 밝혀졌다. 그런데도 고기를 안 먹는다며 어깨가 올라갈 수 있을까.
고기와 회를 파는 남의 영업장 앞에서 “육식은 폭력이다”라는 피켓을 들고 영업방해를 하는 건 어떨까. 동물 해방을 위해 좋은 의도에서 진행한 시위라지만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식당 주인에게나 정당하고 편안한 한 끼의 식사를 위해 외식 중인 손님들에게는 이 또한 폭력일 테다. 꼭 그 자리에서 비건을 알려야 했을까. 비거니즘은 단순히 채식을 실천하고 동물권과 환경을 보호하자는 사상을 넘어 사회 곳곳에 깊게 뿌리내린 차별과 폭력에 반대하는 운동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비건이다’라고 한다면 대개는 종차별, 성차별, 인종차별 같은 폭력적 지배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입장과 견해를 갖고 있다. 그 말인즉슨 세상과 생명을 이분법으로 나누거나 여러 카테고리로 구별 지어 내가 속한 곳, 내게 이익이 되는 곳의 권력을 주장하지 않고 다름을 온전히 인정한다는 거다.
더 일상적인 부분도 있다.
때론 비건을 한다는 이유로 가족이나 동료, 지인들에게 부담을 지울 때가 있지 않은가. 나의 옮음과 당위로 타인의 마음에 죄책감이나 불편함을 은근히 심어주는 건 괜찮은 걸까. 비건니즘이 아무리 정의로워도 말이다.
명상을 통해 여전히 배운다. 명상을 하면 할수록 앎이 줄어든다. 목소리가 작아진다.
단지 나의 옮음이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자각을 가지고 내가 믿는 정의를 충실히 행할 뿐이다. 나도 모르게 폭력을 누군가에게 가하지 않기를 바라며. 비건을 하며 명상을 그만둘 수 없는 이유다.
(난 모태신앙으로 출발한 독실한 기독교 성도였다. 30대 중반부터 교회 밖으로 나와 마음으로 가는 여행을 하고 있다. 40대인 지금은 불교에 탐닉 중인 어설픈 초보 수행자다. 언젠가 한번 그 이야기를 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