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기억의 공간들 #03 센강과 퐁네프
센강의 첫인상은 소박함과 경쾌함이었다. 한강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작은 강의 크기는 시시하다기보다는 친근했고, 걸어서 금방 건널 수 있는 센강의 작은 다리들은 파리가 걷는 자들을 위한 도시임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했다.
처음 유럽 배낭여행을 하면서 놀랐던 사실 중 하나가 전 세계의 그 유명하다는 강들이 모두 한강에 비하면 매우 작다는 것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널 때 무심하게 창밖으로 바라봤던 풍경이 다른 도시들에서는 흔한 풍경이 아니라는 것을, 여행을 떠나고서야 알게 된 것이다. 나에게는 그저 지독하게 익숙한 일상이 다른 누군가에는 낯선 풍경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여행을 떠나본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된 작은 기쁨들 중 하나였다.
2003년 7월
처음으로 혼자 여행하다.
내가 센강에서 가장 좋아하는 풍경은 퐁네프Pont Neuf에서 바라본 퐁 데 자르Pont des Arts의 풍경이다. 유명세로만 보면 단연 퐁네프가 우위지만, 사실 퐁네프보다 퐁 데 자르가 더 아름답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름도 '예술의 다리' 아닌가.
그래서 파리에 도착해 제일 먼저 노트르담에 발도장을 찍었다면, 다음 코스는 항상 퐁네프다. 더 정확히는 퐁네프 다리 위에 서서 퐁 데 자르와 센강을 바라봐야 한다.
나에게 퐁네프에서 바라본 센강의 풍경은 '최초로 혼자 한 여행의 풍경'이기도 하다.
첫 해외 여행이었던 유럽 배낭여행, 여행사 사이트에서 급하게 처음 만난 일행들과 함께 여행을 한다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여행 내내 묘하게 스트레스를 받다가 마지막 도시였던 파리에서 처음으로 일행과 떨어져 혼자 다니겠다고 선언한 날, 제일 먼저 찾았던 곳이 퐁네프였다. 베르사유에 간다는 일행들과 헤어져 퐁네프 위에 서서 아침햇살에 반짝거리는 센강을 바라보던 그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읽을 수도 없는 Le Monde지를 한 부 사들고는 퐁네프 난간에 기대 서서 아침에 개똥을 치우는 청소차를 쳐다보고 있는데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여행의 막바지에서, 마치 다시 처음 여행을 시작하는 것처럼 한없이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궁전'을 보러 떠난 일행들과, '개똥 치우는 청소차'를 바라보고 있는 나. 그 선택의 차이가 어떤 여행을 하고 싶은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파리의 화려한 과거가 아니라 평범한 현재의 일상이었음을. 파리지앵들처럼 하릴없이 센강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기도 하고, 맛있는 커피 한잔에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을 느끼고, 센강변을 걸으며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을 스쳐지나가기도 하는, 그런 여행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진작 혼자 여행할 걸' 하는 후회와 '지금이라도 이렇게 혼자 여행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하는 안도가 뒤섞여 한껏 마음이 부풀었다. 그날의 기억이, 퐁네프 위에 서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처음 그 유명한 퐁네프 다리 위에 서서 센강을 바라봤을 때의 기분을 떠올려본다. 확실히 설렘이나 벅참, 감동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건물들 위로 삐죽이 솟아오른 철탑을 보며 ‘설마 저게 에펠탑은 아니겠지?’하며 웃었지만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고, 줄리엣 비노쉬도 드니 라방도 없는 퐁네프 위에는 연인들의 웃음소리 대신 공사장 소음만 난무했다.
같이 간 일행들은 에펠탑이 무슨 목욕탕 굴뚝 같다며 툴툴거렸지만, 나는 이상하게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어쨌거나 지금 나는 머나먼 별나라처럼 느껴지던 파리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다.
그것은 레오 까락스가 연출한 영화가 아닌, 내 스스로 만들어가는 여행의 한 장면이었다. 거기에는 불꽃놀이를 배경으로 자유롭게 춤을 추던 퐁네프의 연인들 대신, 수많은 철근들로 둘러싸인 퐁네프 위에 서서 한강의 반의 반도 안 되어 보이는 센강과 목욕탕 굴뚝같은 에펠탑을 바라보며 비실비실 웃고 있는 내가 있었다. 블랙코미디 같긴 했지만, 나는 그 순간이 마음에 들었다. 영화에서처럼 아름답고 낭만적인 파리가 아니었다. 낯설지만 익숙하고, 정겹지만 리얼한 파리의 민낯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처음 파리를 여행했던 2003년 7월 퐁네프 다리는 보수공사 중이었다. 당시에는 '하필 지금 공사중이라니' 하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 또한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퐁네프Pont Neuf는 센강에 가장 처음 놓여진 다리로, '새로 지은 다리'라는 뜻을 갖고 있지만 실은 가장 오래된 다리다. 그래서 보수공사가 진행되었고, 현재는 공사가 완료되어 깨끗한 모습을 하고 있다. 다리의 이름에는 지금의 새하얀 외관이 더 어울릴지는 몰라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진짜 퐁네프의 모습은 이제 지워지고 없다. 그래서 한창 공사 중이던 2003년, 퐁네프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 시기에 파리에 있었던 이들이 아니고서는 결코 누릴 수 없었던 어떤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파리.
언제나 그 곳에
10년이 흘러도 15년이 흘러도, 센강의 풍경은 별로 변한 것이 없다. 퐁네프 위에 서서 시떼 섬을 내려다보면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풍경에 선유도 공원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곤 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나는 센강이 아닌 한강에 서 있었다.
차들이 씽씽 달리는 넓고 긴 한강의 대교들과 달리 센강의 다리들은 걸어서도 금방 건널 수 있다. 그만큼 강의 너비 자체가 크게 차이난다. 잔잔한 강물 위로 지나가는 한강의 유람선에서는 낭만적인 피아노 연주가 흐르지만, 센강의 유람선은 시끌벅적 활기차고 유쾌하다. 밤이면 강의 좌안에서 우안을 향해, 혹은 지나가는 유람선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손을 흔들어대는 사람들의 경쾌한 웃음소리로 센강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렇게 한강과는 전혀 다른 센강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상하게도 서울에 두고 온 일상을 떠올리곤 했다. 센강 가운데 떠있는 시떼섬을 보면서 한강에 있는 선유도를 떠올리고, 네멋대로 해라의 대사들을 생각하고,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렸다.
파리까지 와서 왜 나는 굳이 서울을 떠올리고 있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 속에서 만나는 모든 풍경은 결국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처음 떠난 긴 배낭여행의 끝자락에서 한국이 그리웠던 나는 센강에 서서 한강을 보았고, 누군가를 잃었던 어느 봄에는 센강을 보면서 줄곧 그 사람을 기억했다. 파리는, 센강은, 퐁네프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는데, 그때그때의 내 마음 상태에 따라 내가 보는 파리도 달라졌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들은 한 장의 사진처럼 가슴속에 남아, 서울의 일상으로 돌아온 후에도 문득문득 생각이 나곤 했다. 이제는 한강을 보면서 센강을 떠올릴 때가 있다. 여행지에서는 두고 온 일상을 떠올리고, 일상으로 돌아온 후에는 곳곳에서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여행의 추억들과 마주한다.
그렇게 나에게 여행은 또 하나의 일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