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기억의 공간들 #01 노트르담 대성당
돌이켜보면 파리는 내 모든 여행의 시작이었다.
엄마 손에 이끌려 따라간 여행이 아닌, 처음으로 스스로 결정하고 혼자 힘으로 떠난 유럽 배낭여행에서 파리를 처음 만났다. 23일간의 여행 중 파리는 마지막 도시였지만, 나는 여행의 끄트머리, 파리에서야 비로소 진짜 여행의 기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여행이 끝나는 것이 아쉽지 않았다. 여행의 여운이 다시 돌아갈 일상과 그 이후의 삶을 지탱해줄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비로소, 여행이 시작되는 곳
사람들이 여행을 시작할 때 제일 먼저 향하는 장소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숙소에서 가까워서, 혹은 동선상 편해서 큰 의미 없이 발걸음을 옮겼을 수도 있다. 사실 여행지에 대한 첫인상보다는 여행이 끝날 때쯤에야 형체가 잡히는 '전체적인 인상'이 더 오래 가슴에 남게 마련이다. 하지만 여행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처음 가본 곳만큼이나 '좋아서 또 가는 곳'이 늘어나면서, 내게 여행지에서의 첫 행선지는 단순히 첫인상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예전에 와본 적이 있어 이미 익숙한 여행지에서, 제일 먼저 어디에 갈 것인가.
중요한 것은 이 곳이 내게 더 이상 새롭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여기에 '다시' 왔다는 사실이다. 그 곳에 왔음을 가장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장소. 그래서 때로는 그 도시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이기도 하고, 때로는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이기도 한 그 곳에서 '내가 여기에 다시 왔구나' 실감하는 순간, 비로소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파리에서는 그 곳이 바로 노트르담 대성당이었다.
지금까지 5번 파리를 여행했다. 열흘 넘게 파리에만 머물기도 했고 환승을 위해 반나절 정도만 머물다 떠나기도 했다.
두 번째로 파리에 갔을 때 숙소가 Bercy 지역에 있었다. Bercy에서 파리 중심부로 나오려면 파리의 관광버스라 불리는 24번 버스를 타야 한다. 버스는 Bercy에서 Lyon 역을 지나 센강변을 달린다. 첫번째 파리여행이 서유럽 일주 배낭여행으로 스치듯 머물다 간 것이었다면, 두번째 파리 여행은 '언젠가 파리에서만 오래 머물러보고 싶다'는 오랜 로망을 실천에 옮긴 여행이었다. 달리는 24번 버스의 창밖으로 보이던 센강 풍경 속으로 어느 순간 노트르담 대성당이 불쑥 나타났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여기에 다시 왔구나. 비로소 파리에 온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노트르담에서 센강을 따라 걷다 보면 퐁네프, 퐁 데 자르를 거쳐 루브르, 튈르리 정원, 콩코드 광장, 샹젤리제와 개선문까지 갈 수 있다. 노트르담에서 생 제르맹 데 프레 지역으로 내려가면 뤽상부르 공원과 몽파르나스 묘지로 갈 수 있고, 마레 지구 쪽으로 올라가면 퐁피두 센터와 피카소 미술관으로 갈 수 있다. 노트르담에서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그래서 길게 머물든 짧게 머물든 파리에 가면 제일 먼저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달려가곤 했다. 24번 버스를 타고 센강변을 달리다 노트르담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부터 나의 파리여행은 시작되었다.
포엥제로 Point Zero
프랑스 거리 측정 기준이 되는 포앵제로Point Zero.
사실 노트르담 앞에 포앵제로가 있다는 걸 모르고 두 번이나 그냥 스쳐갔는데, 세 번째 파리에 갔을 때에서야 처음으로 포앵제로를 밟을 수 있었다. 포앵제로를 밟으면 다시 파리에 돌아온다는 전설이 있다. 다행히 포앵제로를 밟지 않고도 두 번이나 파리에 돌아왔고, 세 번째에는 잊지 않고 꾹꾹 밟아주었다.
네 번째 파리. 베니스로 가기 위해 반나절밖에 머물 수 없었지만 어김없이 포앵제로부터 밟으러 갔다.
(자세히 보니 이 날은 포앵제로 위에 동전이 쌓여 있었구나.)
포앵제로를 밟아준 덕분인지 바로 다음해에 나는 또 파리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포앵제로를 밟지 않았을 때에 비해 파리에 다시 가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 포앵제로의 전설은 정말 효력이 있는 걸지도.
성당 내부
노트르담 내부에는 플래시 금지 문구가 여기저기 적혀 있는데도 끊임없이 플래시가 터진다. 하지만 이를 제재하는 이는 없다. 처음엔 조금 놀랐지만 그 찰나의 빛의 터뜨림이 이 성당 안의 고요를 깨트릴 정도의 것은 아니기에, 이내 그러려니 한다.
아직은 바람이 쌀쌀했던 어느 해 봄의 초입, 거짓말처럼 인생의 어느 시간들을 잃었다. 파리를 혼자 여행하고 있었을 때였다. 노트르담에서, 버스 안에서, 호텔에서, 나는 조금 울었다. 흐르는 센강을 쳐다보면서, 그 많은 다리들을 건너면서, 달리는 기차에서 창 밖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 노트르담에서 기도를 했다. 그로 인해 나의 노트르담은 다른 이들의 노트르담과는 다른, 어떤 기억의 공간이 되었다.
익숙함의 뒷면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면에서 사진을 찍고 운이 좋으면 포앵제로를 발견하여 한번씩 밟아주고, 줄을 서서 성당 내부에 들어가거나 노트르담 전망대에 오른 후 다음 행선지로 떠난다. 하지만 진짜 파리를 보려면 노트르담 대성당의 뒷편에 있는 공원에 가야 한다.
파리는 걷는 자들을 위한 도시이다. 산책하는 이들을 위한 도시인 만큼 산책하다 쉴 수 있는 공원과 벤치는 이 도시의 필수 요소다. 공원과 벤치가 없는 파리는 상상할 수 없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뒷편으로 가면 넓은 공원이 나온다. 사각형 모양으로 잘 다듬어진 나무가 일렬로 서 있고, 그 나무 아래 벤치에는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거나 함께 온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는 파리지앵들이 있다. '공원과 벤치, 그리고 사람들'의 풍경이야말로 파리를 대표하는 이미지다.
가이드북이나 기념 엽서에 자주 등장하는 익숙한 앞모습과 달리 노트르담의 뒷모습은 매우 낯설다. 요한 23세 광장(Square Jean XXIII)은 노트르담 대성당의 베스트 포토 포인트이기도 하다. 온화하고 우직해보이는 앞모습과 달리, 노트르담의 뒷모습은 날카롭고 경쾌해 보인다. 너무 많이 봐서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 장소를 조금만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이렇게 새로운 것이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뒷모습을 아름답게 담아낼 수 있는 또 다른 베스트 포토 포인트로 아르슈베셰교(Pont de l'Archevêché)를 꼽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생루이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인 투르넬 다리(Ponte de la Tournelle)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더 좋아한다. 좀 더 멀리서 노트르담과 시떼 섬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조금 멀리서 바라보는 여유가 필요하다.
노트르담의 밤
환승을 위해 파리에서 반나절 정도 머물렀던 날,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을 때 노트르담으로 달려갔다. 그 날은 시간이 얼마 없었기 때문에 파리를 여러번 여행하는 동안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만 잠깐 들릴 생각이었는데, 막상 파리에 와서 노트르담을 보지 않고 숙소로 돌아가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늘 노트르담에서 여행을 시작했기 때문에 노트르담의 아침만 봤지 노트르담의 밤은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하루종일 걷느라 지친 다리를 이끌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흘끗 스치듯 본 것이 다였던 것이다. 아마도 그때마다 '노트르담은 아침에 봤으니까'라는 생각으로 무심코 스쳐 지나갔으리라.
하늘은 이미 꽤 어두워졌지만 다행히 아직 노트르담은 라이트업 전이다. 성당 오픈시간이 지나서 확연히 한산해진 노트르담 광장에 서서 불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이 조금 더 어두워지고 노트르담에 불이 들어왔다. 이미 불이 켜져 있는 모습은 많이 봤지만 라이트업 순간을 내 눈으로 지켜본 것은 처음이다. 언제나 나의 파리여행의 시작이 되어주었던 노트르담이, 그날은 여행의 마무리가 되어준 것이다.
어디를 여행하든 진짜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지금 여행 중이구나' 느끼는 모든 순간들이 여행을 하는 이유이지만, 그 순간들이 너무 늦게 찾아온다면 섣부른 실망이 엄습할지도 모른다.
비로소 나의 여행이 시작되는 곳은 나만이 찾을 수 있다. 꼭 특정 장소일 필요는 없다. 여행지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일 수도 있고, 뺨을 스치는 바람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나의 진짜 여행이 시작되는 그 순간, 그 장소, 그 공기를 기억하는 것. 좋은 여행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