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다섯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재 Jan 01. 2023

2022년을 돌아보는 다섯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게 거기에 있다. 

1. 쉴 틈 없는 한 해였다. 1월에는 시리즈 B 투자를 받았고, 약간 늦은 21년 연말 행사와 짧은 방학을 거쳐 2.0을 오픈했다. 많은 것이 가능해졌지만, 사용성은 처참했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최선을 다해 고쳐나갔다. 3월에는 Value Tribe, Hub Tribe의 Design Chapter Lead가 되었고, 매니징과 실무를 겸하게 되었다. 6월까지 사회보험 신고, 퇴직금 정산을 디자인하는 동시에 인사이트 v2 설계, 웹사이트 리뉴얼, 인정하기 캠페인 사이트 등도 만들었다. 


7월에는 회사가 서현 단독 오피스로 이전했고, Jump Tribe의 Design Chapter Lead가 되었다. Payroll에 더해 Core, Enterprise도 같이 보게 되었다. 매니징 하는 사람은 줄었지만 비중은 조금 더 늘어났고, 그 외에도 여기저기 난 불을 끄러 다녔다. 구성원이 가파르게 증가하면서 회사의 체계를 잡는 일에 참여하는 일도 늘어났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는 리더십 워크숍 겸 싱크가 있었고, Tribe 리드 싱크도 생겼다. 실무에 참여하는 시간이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그 사이 구성원 목록 v2, 급여전표, 급여 계약 연동을 만들고, 급여정산 v3 디자인 등을 했다. 


긴 고민 끝에 11월 말에 회사를 떠났다.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 다짐한 수많은 커피챗, 함께했던 이야기를 담은 롤링페이퍼, 아쉬움을 담은 꽃과 메시지, 그리고 아쉬움 가득한 송별회를 했다. 12월 새로운 회사에 출근했다. 제품을 보면서 할 일이 많아 보였기에 정신없이 쏟아냈다. 전반적인 디자인 정비를 위해 폰트를 교체했고, 고객사를 위한 다양한 기능을 추가하기 위한 디자인을 하면서 방향성 수립을 위한 간단한 비전 제품을 디자인했다. 


개인적으로는 시간도 많지 않고, 회사에서 개인의 외부 활동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멘토링이나 특강 같은 가벼운 일에 참여했다. 1월에는 EO에서 촬영한 워키토키 시리즈 3편이 차례대로 공개되었다. 3월에는 홍대에서 아두이노 특강을 진행했고, 7월에는 CCI에서 진행한 멘토링에 참여했으며, 9월에는 아주대 학생들에게 멘토링을 진행했다. 3월부터 준비하던 FEConf는 8월에 웹사이트를 오픈하고, 10월에 롯데타워에서 개최되었다. 



2. 퇴사 사유는 크게는 세 가지다. 우선 한참 실무를 통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하고, 다양하게 고민하면서 실력을 키워야 하는 시점에 매니징이 업무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조금 이르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디자이너로서 삶을 최대한 가지고 가고 싶은 나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또, 조직이 급속하게 커지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조직 문화, 일하는 방식, 제품 방향성 등의 빈 부분을 채우는 데 들어가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는 게 부담스러웠다. 물론 개인으로서 최선을 다하지도 않았고, 회사와 논의하지 않고, 멋대로 생각하는 게 불편하다고 반문한다면 변명의 여지는 없다. 내 역량의 부족, 나의 낙관주의 혹은 믿음이 부족해진 탓이다.


디자이너로서 누군가 만든 유산 위에 새로운 무언가를 얹는 경험에서 오는 답답함과 또 불편함이 있었다. 물론 시스템에 기여할 방법은 있었지만, 개방적인 형태는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역할은 창조자보다는 조율자에 가까웠다. 수평적인 동시에 수직적이었다. 디자인을 마무리한 후에는 늘 스스로 물었다. 이것을 내가 디자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누군가 닦아놓은 길 위에서 최선을 다해서 뛰는 것에 집중했지만, 길이 없어도 내가 잘 뛸 수 있었을까? 나는 그 길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 어느 것도 자신 있게 답하지 못했다. 답을 찾는 방법은 언제나 그러했듯 직접 겪어보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공격적이고, 냉소적으로 변해가는 나를 제 자리로 돌려놓고 싶었다. 또 불안과 초조함으로 반년 이상 불면에 시달리는 것에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하루하루가 위태로운 스타트업에서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회사가 이루고자 하는 대의를 위해 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 꽤 스트레스였던 것 같다. 스타트업이 처음이라 멋모르고 100%, 120% 달리다가 페이스 조절에 실패했을 수도, 부족한 나의 역량으로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받은 스트레스 탓일 수도, 내 성향과 안 맞는 무언가를 억지로 견디는 과정에서 생긴 스트레스일 수도 있다. 조금 오만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내 시간과 희생의 대가가 강남 아파트 하나보다는 더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족으로 이런 고민을 회사의 누군가와 미리 이야기하고, 답을 함께 찾았더라면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 가능성까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퇴사 커피챗 중 나의 퍼포먼스가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구성원들에게 나의 일을 잘 위임하고, 잘 버텨냈다면 잘 해결했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해주신 분도 있었고. 그러나 그 정도로 솔직하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글쎄.


+ 오늘은 불평만 잔뜩 늘어놨는데, 언젠가의 글에서는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를 적어보고 싶다. 1년 9개월 동안 느낀 점을 노트에 잔뜩 적어뒀으니 천천히 하나씩 꺼내서 올려봐야지. 



3. 다음 회사를 찾는 기준은 생각나는 대로 적어봤다. 

내 장기를 발휘해서 프로덕트에 기여할 부분이 명확한가? 

내 위에 아무도 없는가? 혹은 아주 많은가?

역량과 기여도에 대해서 충분히, 어떤 방식으로 보상하는가?

대표의 성향과 조직의 문화가 내가 억지로 맞추려고 하지 않아도 잘 맞는가?

어느 정도의 가치로 어디에서 얼마나 투자받았는가? 꿈과 현실의 차이를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가?

해외에 유사한 비즈니스 모델로 이미 성공한 사례가 있는가? 어느 정도 가치였는가?

다양성을 존중할 수 있는 젊고 유연한 조직인가?

프로덕트가 해당 업계의 인프라 혹은 표준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있는가?

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이 프로덕트 외에도 존재하는가? 혹은 존재할 수 있는 형태인가?

스타트업으로서 속도, 퀄리티, 스탠더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어떤 방식으로 일하고 있으며 토스가 일하는 문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개인의 커리어를 존중하는 곳인가? 외부활동 정책이 어떻게 되는가?

비즈니스가 로컬과 글로벌 함께 타깃하고 있는가?

대표가 메이커에 대한 이해도가 어느 정도인가?

도메인이 충분히 어렵고 복잡해서 경쟁자들이 들어오기 어려운가?

퇴사 선언 후 1주일 정도 여러 회사를 만나보고, 면접도 보면서 고민을 했다. 물론, 모든 것을 만족하는 회사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것을 잘 달성하는지 살펴보았다. 그중 QuotaBook이 그 기준에 가장 부합했다. 도메인만 다를 뿐 이미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기에 큰 어려움 없이 즉시 프로덕트에 기여할 수 있겠다고도 생각했다. 



4. 올해를 더 좋은 디자이너로 도약하는 한 해로 만들고 싶다. 어디에 집중해서 무엇을 하면 되는지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하기 때문에, 게으름 피우지 말고 그냥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 회사에서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우선 QuotaBook을 그냥저냥 한 프로덕트 말고 Slack, Notion, Linear 같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퀄리티 있는 프로덕트로 만들고 싶다. 나만 잘해봐야 소용이 없다. 팀도 같은 목표를 갖고 퀄리티에 대한 기대치를 맞출 있게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또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구조를 설정하고, 그것을 위해서 필요한 디자인 시스템, 피그마 플러그인 같은 툴링을 잘 세팅해야 할 것이다. UX 패턴을 정의하고, 디자인 원칙을 세우는 것도 매우 중요하고. 


개인적으로는 스스로 정한 한계를 깨기 위해서 노력하려고 한다. 그래픽, 비주얼, UI는 내 영역이 아니라고 꽤 오래전에 선을 그어 왔었는데, 더 좋은 디자이너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역량이라는 것을 이전 회사에서의 경험과 여기저기서 찾은 롤모델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시간 효율이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더욱더 기회가 없을 것이기에 언제나처럼 잘하는 척을 하고, 잘할 때까지 시간을 부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프로덕트 디자인 강의를 준비하고 있다. 해보면서 배우는 learning by doing 방법론에 따라 B2B SaaS 프로덕트를 0부터 1까지, 또 1부터 10까지 만드는 과정을 따라 해 보는 과정을 통해 실무를 체험해볼 수 있게 하려고 한다. 아직은 커리큘럼을 짜는 단계라 바뀔 수도 있지만, 그동안 일하면서 고민했던 모든 것을 담아보려고 한다. 부지런히 준비해서 빠르면 초여름에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5. 퇴사하는 날, 대표님이 퇴사를 후회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대학원을 포기하고 광고 회사에 갔을 때도, 1년만 더 다니고 가라는 상무님의 제안을 뿌리치고 스웨덴으로 유학을 결정을 했을 때도, 스웨덴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도, 현대자동차에서 좋은 프로젝트를 두고 플렉스를 선택했을 때도 내 선택을 후회한 적 없다. 이미 지나온 것을 탐해봐야 얻을 수 있는 게 없다. 나는 현재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서 더 좋은 선택으로 만들 뿐이다. 


12월 30일, 을왕리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