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장례식장에 갔다. 아내 외삼촌이 주인공이었다. 외삼촌에게서 얼마 전 췌장암이 발견되었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하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요즘의 친인척 관계가 그렇듯, 아내의 외삼촌 혹은 그 자녀들과 큰 교류는 없었다. 이제 결혼한 지 사 년 남짓 되었으니, 없는 것이 당연하지 싶기도 하다. 외삼촌 자녀는 첫째가 아들, 둘째가 딸이었다. 가깝고도 먼 친척이었지만 마음이 쓰였다. 그래도 가족이니까.
마음이 쓰이는 이유 중 하나는 나도 같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19살 때 돌아가셨다. 갑자기 쓰러지셔서, 스스로가 죽음을 준비할 새도 없었다. 물론, 가족도. 죽음, 그리고 그에 대한 느낌은 상대적이니 내 경험이 너와 같으리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하나, 갑자기(갑자기라는 기간은 상대적이다. 나에게는 5일 남짓이었고, 이 상주에게는 몇 개월이었다.), 어린 나이에(어린 나이란, 부모님의 죽음을 두고 함부로 호상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의 나이이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떠나보낸 사람이 어떤 심정인지와, 마주해야 할 어려움이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다.
상주가 맞이해야 하는 어려움 중 하나가 권한과 책임 문제이다.(생각해보면, 세상 어느 곳에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상주는 그 자리를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다. 또한, 갑자기 아버지가 갖고 있던 가정사의 결정권을 행사해야 하는 의무가 생긴다. 어려운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결정권을 행사해야 하는 의무. 난 단지 누군가의 아들이었을 뿐인데, ‘아버지의 장례’라는 행사가 시작되자, 갑자기 그 행사에서 결정되어야 하는 중요 사안들이 내 책임으로 다가오게 된다. 부담될 수밖에 없다. 19살이었던 나에게는 부담스러웠다.
아버지를 잃고 나서 거쳐야 할 과정을 거친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 가운데에서, 상조 회사에서 파견된듯한 직원이 상주를 찾아왔다. 용건은 장지 결정이었다. 갑자기 요청받은 긴급한 만남이었다. 상주는 중요하다니까 급하게 자리로 왔다.
상조 회사 직원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인을 어떻게 잘 모실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모실 수 있는 좋은 곳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방에서 갑자기 브로셔를 꺼내더니 상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장사꾼의 향기가 났다.
직원분이 소개해 준 곳은 집과 거리가 너무 멀었으며, 무엇보다도 비쌌다. 우리 아버지는 시립 납골당에 모셨는데, 그와 비교하면 가격차이가 25배가 났다. 심지어 프리미엄 층은 값(?)이 더 비쌌다. 물론, 드라마에 나올법한 멋진 곳이고, 고인을 정성으로 모셔야 하는 것도 맞다. 돈이 있고, 여유가 있고, 그럴 의사가 있다면 그런 곳을 택한다고 하여 나쁠 것이 하등 없다. 하나, 당시 상황으로 선택지가 너무 극단적이고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한다는 뉘앙스로 주는 압박이 느껴졌다. 충동구매를 유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내 경험상 시설도 중요하지만 결국 내가 가기에 편해야 하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이 좋았다. 그리고 사립(?) 시설은 부채 등으로 분쟁이 생겨서 곤란해진 경우를 몇 군데 보았다. 여러 안정성에 있어서는 시립이 낫다는 개인적 판단이었다. 내 개인적 판단이 무조건 옳다고는 할 수 없으니, 논의에 의견을 더하여 모두가 좋은 방향으로 이 자리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재빨리 검색을 해서 지금 주거지와 차로 약 10여분 거리에 있는 시립 납골당을 발견했다. 가격과 조건 등을 확인한 후, 나름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질문을 했다. 혹시, ‘시립이나 다른 조건을 가진 장소는 없겠느냐’고 말이다. 거리가 너무 멀고, 가격이 너무 비싸다. 그랬더니 직원 분은 약간 비웃는 듯한 웃음을 머금고, ‘돌아가신 분이 주소지 등록이 이곳이 아니어서 안된다.’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는 조건을 확인한 터라, 저희 아버지도 다른 곳이지만 시립에 계시고 배우자 혹은 가족이 거주지 등록이 되어있다면 관외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나, 예의상 대놓고 우길 수는 없었기에 확인차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저기요. 제가 전문가입니다."
그 순간, 합리적인 대화는 이미 끝났음을 직감했다. 직원분은 직원에서 상담사로, 상담사에서 전문가로 변신했다. 나는 말을 아꼈다. 다른 인척의 장지를 정하는 자리였으며, 민감한 문제였다. 나도 더 나아가면 선을 넘게 되어 서로 곤란하겠다는 판단을 했다.
내가 기대한 전문가 혹은 상담가의 역할은 합리적인 정보를 주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더 기대한다면, 그 과정을 통해 감정적 안정과 심리적 만족을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전문가 분은 편향된 정보와 심리적 압박으로 비이성적 판단을 하는 방향으로 상담을 몰아갔다. 적어도 그 자리에서는 그렇게 느껴졌다. 나는 영업방해를 한 것이었을까. 그 의구심에 쐐기를 박은 단어는 바로 ‘전문가’였다. 사실관계와 그로 인한 효용을 따지는 대화에서 확인되지 않은 권위로 상대방을 누르려는 의도를 확인하니,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맞은편에 있던 우리 장모님과 눈이 마주쳤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약 14년 경력(?)을 가진 나였다. 많지 않은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지를 정하고 이제는 연장(?)까지 한 나이다. 십여 년을 보내며 다른 사람들의 케이스도 쌓여서 장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절차가 그려진다. 장모님은 웰다잉과 장례에 대해 공부하시고 모대학에서 장례 문화학 교수를 맡고 계셨다. 다른 나라까지 가셔서 장례문화를 공부해오시는 분이다. 많은 제자들이 장례 분야에 종사한다. 그 자리에 앉은 누가 전문가였을까.
요즘 들어 시대 흐름인지, 세계시민교육에 대한 강의 요청이 많아졌다. ‘세계시민교육’이라는 단어가 사실 일반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을 테지만,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이제는 공교육까지 이 교육이 확산되고 있다. 처음에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제는 공교육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 요청까지 들어오고 있다. 그런데, 그 확산 기세에 반해 우리나라에는 그럴만한 콘텐츠가 사실 많지 않다. 가르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
‘세계시민’에 대해 강의할 수 있는 자격은 누구에게 있을까. 키워드를 꼽자면 국제개발협력, SDGs(지속가능발전목표) 정도, 이와 관련이 있는 사람을 들 수 있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보통 사람들은 SDGs가 무엇인지, NGO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분들이 많다. NGO라는 단어를 단순히 정치적 색채를 띄거나, 시민운동과 연관 짓는 분도 많다. 세계시민이라는 단어도 일반에게는 익숙지 않다. 혹시나 아시냐고 질문을 하면 추상적 답이 나온다. 관념적으로 왜 뭐 그런 비슷한 거, 막 그런 거, 글로벌한 거, 이런 정도 답을 가지고 있고, 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이 분야가 아직 한국에서는 마이너이며, 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고, 이는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 자체가 적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적은 사람들 중에서도 세계시민이라는 단어에 대해 사고하고, 교육 콘텐츠를 생산하고 그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개중에서도 일부이다.(메가 NGO와 교육에 특화된 NGO는 논외로 하자. 일정한 방향을 가진 커리큘럼과 강사 양성 과정을 가지면서 교육을 해 나가는 단체들도 있다.)
나는 국제개발협력 분야에 종사한다. 교육을 전공하지도 않았다. 큰 단체에서 진행하는(하지만 공인되지 않은) 강사 양성 프로그램 같은 것도 받지 않았다. 허나, 요청이 있었고, 그로 인해 자연스레 문헌조사로 인한 자료수집, 콘텐츠 개발, 강의안과 나름의 커리큘럼을 기획하게 되었다. 나는 이 분야에 유명한 사람도 아니다. 상징적인 사람도 아니다. 허나, 이 판에 들어서면서 많이 고민하고, 정성을 쏟았다. 한번 강의를 진행한 학교에서 다시 연락이 오고, 입소문을 타 다른 학교에서도 연락이 온다. 대상으로 치면 학생에서 교사로까지 교육 요청이 확대되었다. 강의 재요청, 선택 받음, 즉 늘어나는 수요를 보며 단순히 시장 확대가 아니라 내가 만드는 콘텐츠가 어떠한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2019년 상반기 교육 수요자 수가 2018년 한 해를 통튼 수요자 수를 이미 넘어섰다. 최고라고는 할 수 없어도, (이 분야에 어디 우열이 있을까) 내가 만드는 콘텐츠가 다른 유사한 콘텐츠들에 비해 대체물이 많지 않은 콘텐츠라는 자신감은 있다. 허나, 항상 생각한다. 한때, 잠시, 반짝 부는 바람일 수 있다. 바람이 계속 불면 흐름이 되겠지만.
이야기하고 싶은 단어는 '전문가'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나는 ‘전문가’인가?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아직 그 소리를 듣기에 부족하다. 외부적으로 이 사람은 ‘전문가’라고 인정할만한 라이선스가 있지도 않다. 출장여비 혹은 강사료를 정할 때에 급수를 나누고, 그를 정할 때에 몇 급 이상 공무원, 경력 몇 년 이상, 학위, 교수, 연예인, 유명인사가 아니면 최하급으로 책정받는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내가 가진 커리어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가치를 바라보는 폭이 좁다.
전문가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다음과 같다.
어떤 특정한 부문을 오로지 연구하여 그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이 풍부한 사람. 또는, 그 일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
'오로지'라는 부분이 걸리지만, 아직 사전이 시대를 반영하지 못했음을 고려하면 그 뜻에는 동의가 된다. 이 글을 읽어주실 감사한 분들은 어떨까. 전문가이실지 모르겠다. 아주 단순하게 의사 면허(?)를 가지고 있다면 사람을 치료하는 전문가일 것이다. 교사 자격을 가지고 있다면 교육 전문가일까? 혹은, 교육학을 전공했지만 임용고시에 불합격했다면 전문가라고는 할 수 없을까. 물론, 임용고시에 불합격했어도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을 오랫동안 한다면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의사의 경우, 면허 없는 의료행위는 불법이니(내가 알기론 그렇다.) 의사 면허(?)를 취득하지 않은 상태에서 의료행위를 오래 했다면 그는 인정되지 않을 것이고 말이다.
결국, 사회에서 인정하는 일정 수준 이상의 라이선스 혹은 그를 대체할 수 있는 시간이 쌓이면 ‘전문가’라는 호칭을 달아 준다. 아니, 우리가 그렇다고 인정한다.
공공기관에 강의 요청을 받아 나가면 반드시 듣는 주의사항이 있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다.”라는 말은 절대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 하면 안 되는지는 이해가 간다. 자칫하면 강사와 그 강사를 섭외한 기관의 권위에 상처를 줄 수 있는 일이기에. 이 요청사항을 들을 때마다 묵상하게 된다. ‘나는 전문가인가?’ 어떠한 질문이든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은 답하기 참 어렵다. 가장 솔직하지 못한 대상은 나 자신이니.
막상 강의에 나가면 전문가라는 이야기도, 아니라는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시작은 항상 동일하게, 이야기로 시작한다. 먼저, 간단한 프로필을 이야기한다. 내가 누구인지 말이다. 우리가 만난 자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가 왜 이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 여러분은 왜 이 자리에 앉아 계신지 그 맥락을 공유한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이며, 여러분이 받아가실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이 시간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며, 여러분과 나에게 이 공간에서 보내는 이 시간이 이런 의미를 가졌으면 좋겠다. 이야기가 끝나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 그제야 강의가 시작된다. 인트로 혹은 오프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시간을 잘 보냈다면 그날 강의는 적어도 실패하지 않은 것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마치 전문가와 같은 권위와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다. 자격증이 없어도 말이다.
생각해보았다. 전문가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누군가를 어느 상황에서 전문가라고 생각하는가. 매우 추상적으로 생각해보면(지대넓얕을 읽은 후, 이해하기 쉽지만 날카롭지는 않은 이야기를 할 때에 추상적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세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세 가지는 실력과 책임감 그리고 동의이지 싶다.
먼저, 실력이 있어야 한다. 강의라면 적어도 그날 수업내용에 대해 앎을 넘어 가르칠 정도가 되어 있어야 하고, 기술자라면 일을 행할 숙련된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지식 혹은 기술을 요구하는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말이다.
둘째는 책임감. 근접한 단어로는 ‘프로 정신’이다.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를 넘어, 얼마나 나눌 수 있냐이다. 능력을 습득하는 과정을 거치고 난 다음, 그 능력을 발현하는 실전 과정까지도 에너지를 더해야 한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강의를 ‘준비’ 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가끔 노력이 전혀 상관없는 천재들도 있지만, 이는 예외로 두자.) 공사를 맡겼는데, 보이지 않는 부분은 엉망으로 해 놓았다면 의미가 없다. 작년 집 이사 올 때 맡겼던 타일 공사가 그렇다. 타일은 잘 붙이는데, 그 외에 마무리에는 정말 실망스러웠다. 컴플레인을 걸기 애매한 부분은 교묘히 남겨두었다. 그 교묘한 부분만큼은 확실한 전문가였다. 피켓 들고 따라다니며 불매 시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감정이 조금 섞인 판단이지만, 책임감이라는 선이 끊어지니 그 사람은 더 이상 전문가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보이지 않았다. 이를 감정 노동 혹은 서비스라고 여길지도 모르겠으나, 문제가 된다면 이를 명확히 밝히고 비용을 지불할지를 선택하게 하는 것도 전문가의 역할이다.
셋째는 동의이다. 동의는 실력과 책임감을 갖춘 후에야 구할 수 있다. 이 둘이 없이 동의를 구한다면, 동의를 받지 못하거나 사기꾼 소리를 듣거나 둘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실력과 책임감을 갖추었어도 동의의 과정이 없다면, 자칫 폭력이 될 수 있다. 앞에 장례식장에서 만난 '내가 전문가입니다.'라는 말씀을 하신 전문가 분을 생각해 보자. 실력은 일단 실체적이지 않으니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어느 회사에서 나왔다는 사실로 그 실력을 보증한다 하더라도, 사용하는 단어와 태도에서 책임감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 상황에서 스스로를 '전문가'라고 동의를 얻기도 어려웠다. 오히려 전문가라는 일방적 주장은 폭력적으로 다가오기까지 했다. 동의는 공급자와 수요자가 권위를 인정하는 대행자에 의해 라이선스를 획득하는 것으로 대체될 수도 있지만, 상대방과의 직접 소통으로도 가능하다. 물론, 라이선스만 믿고 일을 맡겼다가 실망하는 경우도 많다. 라이선스는 실력, 경험, 동의를 보증해야 하지만, 그 라이선스를 가진 사람이 라이선스를 보증한다고는 할 수 없으니.
이 글은 어쩌면 나를 위해 쓰는 글이다.(쓰고 나니 정말 그렇다.) 이렇게 써놓고 나니 더 부담이다. 많은 횟수는 아니지만, 전문가라는 이름을 달고 앞에 설 때에는 더욱 그렇다.
어릴 적에는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누구라도 인정하는 라이선스가 갖고 싶었다. 그게 맞다고 배웠다. 가수 김건모 씨가 부른 노래 'My son'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나 어릴 적 우리 엄마 매일 하신 말
이담에 커서 뭐 될라고 그러니
존경받는 의사 변호사가 되려면
그만 놀고 방에 들어가 공부 좀 해라
-김건모, My son 중...
노력을 더해 시험을 통과하고, 권위를 획득하면 그다음부터는 뿜 뿜 하며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전문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내 상상 속에서 ‘전문가’는 폼나고 멋진 사람이었다. 마치, 게임 캐릭터가 경험치를 쌓아 스탯만 찍으면 되듯.(아이템도 물론 중요하다.) 그런데, 이제 실제 그런 라이선스를 획득한 친구들이 주변에 생겨나는 나이가 되었다.(지났다.) 라이선스는 획득한 다음부터가 시작이었다. 변호사가 된 친구는 박봉(상대적인)에 잦은 이직을 경험해야 했고, 공무원이 된 친구는 안정 속에서 불안정을 겪고 있다. 만화 '나루토'에서 주인공 나루토의 진짜 도전은 닌자 시험을 통과한 다음이었다. 만화 '헌터 헌터'에서 곤이는 모험은 헌터 자격증을 획득한 다음에야 진짜 헌터가 될 시험을 치른다. '요리왕 비룡(중화 진미)'의 비룡(마오)의 이야기도 특급요리사가 되고 난 다음에야 진짜 시작된다. 이제 와서 느끼는 것이지만, 만화 주인공들만 보면 나보다는 십 년은 먼저 그 과정을 밟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역시 만화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수업을 나가 요즘 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크리에이터, 래퍼 등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 유명해지고 하는 삶을 동경한다. 물론, 단골 직업인 검사, 판사, 의사, 외교관 등등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장래희망을 듣고, 더 대화를 해보면 두 가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아이들이 많다. 첫째는, 되기까지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둘째는, 되고 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 어릴 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의사가 되고 싶다는 학생이 있었다. 무조건 의사만 되면 인생 목표가 달성된다고 했다. 실제로 그 학생은 스스로가 성적도 좋다고 했다. 정말 의사만 되면 끝이냐 라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물었다. 의사가 된 다음에 바로 죽어도 괜찮겠냐고. 생각해보니 그건 또 아니란다. 분명 있을 것이다. 아직은 숨어있지만, 의사라는 라이선스를 획득한 다음에야 이룰 수 있으며, 이루고 싶은 어떠한 가치가.
크리에이터 혹은 래퍼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이 유명세를 타기까지 얼마만큼의 노력이 있었는지, 노력이 만족할만한 결실을 맺지 못할 수도 있는지 학생들은 아직은 알지 못한다. 그 콘텐츠와 가사들이 가벼이 나오겠는가. 나는 X튜브는 잘 보지 않지만, 랩은 좋아하는 편이다. 모두는 아닐 수 있지만, 나는 많은 래퍼들을 시인이고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현대판이라는 말을 앞에 붙이는 것조차 진부하다. 스웨그와 플렉스 같은 단어는 결국 타인이 그들을 바라볼 때에 적용하는 가치 프레임 중 하나일 뿐이다.(물론, 세상에는 다양한 케이스가 있다. 실력 좋은 십 대 래퍼들도 많다. 어리다고 능력 없는 것도, 경력이 짧다고 실력 없는 것도 아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에게 능력은 타고나기도 하고, 순간의 경험으로 얻어지기도 하니까. 실제로 그 영역에 투자한 시간은 짧더라도, 결국 그 사람이 살아온 삶에서 치열하게 쌓아온 것들이 반영된다. 삶은 길이뿐 아니라 밀도 개념으로 바라볼 수도 있으니.)
보이는 무언가를 세우기 위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수없이 받치고 있음을 내가 아이일 적 알지 못했다. 지금 대부분 아이들도 그렇지 않을까. 아이들은 잘못이 없다. 앞으로 알아가는 과정이 커가는 과정이니까. 나 또한 그를 위해 아이들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다 알지 못하니 비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 또한 성장하는 과정이니. 나도 아직 작다. 아마도, 완성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늘에 오르기 바로 직전이 가장 큰 순간이겠지.
전문가라는 단어를 직업과 치환하여 사용할 수 있을까. 어쩌면 더 부풀려 꿈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어린 시절, 꿈은 지점 혹은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이루거나 이루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꿈이라는 예쁜 단어를 내 마음대로 박제해 놓고 있었다. 꿈을 박제한 여러 모양중 하나가 '전문가'일 수도 있겠다. 그 기준으로 한다면, 나는 실패했다. 꿈을 이루지 못했으니까. 허나, 기준은 바뀐다. 나도 변하고, 꿈도 변한다. 잃어버리기도 했지만, 그 와중에 생겨나기도 했다. 완성이 안되어 실망했지만, 나중에 보니 퍼즐의 부분이기도 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조금 더 강한 확신으로 그렇다고 더 이야기할 수 있는 때가 오지 않을까.
한 가지는 알겠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노력해야 한다는 것. 어느 수준으로 실력을 갖추도록, 어쩌다 받은 이름에 책임질 수 있도록, 그리고 끊임없이 그 기준에 합당한 지를 나와 타인에게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는 것. 비록 지금은 아닐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