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과 우울감이 함께 있는, 그리고 고 박지선님과 이웃사촌이 된
개그우먼 고 박지선님이 세상을 떠났다.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관련된 기사를 찾아보던 중, 박지선님이 아빠가 있는 납골당으로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갑자기, 아빠가 생각났다.
아빠가 돌아가신지 15년이 다 되어간다. 나의 10대 말, 그리고 20대 초반은 그 기억으로 박제되어 있다. 돌아가시고 몇년간은 납골당에 참 자주갔다. 납골당에 가는 때는 정해져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때, 우울할 때, 살기 힘들어서 더 이상 안살아도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래서 자주 갔다. 갈 수 있는 시간이 확보만 되면 시도 때도 없이 방문했다. 그곳에 가면 무언가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아빠의 영정 사진과 납골함이 있었지만 다른것도 있을 것만 같았다.
마치 의식과도 같았다. 납골당 앞 그 길을 걷고, 아빠의 납골함 앞에 서서 한바탕 울고, 마치 아빠가 있는듯 말도 걸어보고, 물티슈로 납골함 겉면을 구석구석 닦아내면, 무언가 있을것만 같았다. 소주 한병에 마른 오징어를 갖고 들어가 어찌할지 몰라 앞에 서있기도 했다. 납골함 앞에는 앉아있거나 무얼 올려놓을 공간이 없었다. 뭐라도 해야한다는 마음에 소주를 손가락에 찍어 납골함에 바르기도 하고, 순간 울컥해서 그 소주를 꼴딱꼴딱 마시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불킥 감이다. 누가 알려준 것은 아니지만, 왠지 그래야 할것만 같았다. 장례식장에서 일부러 곡소리를 내야하는 것처럼. 위안을 얻고 싶었다.
어쩌면 나는 막다른 길에 다다를 때마다 그곳으로 도망갔던것 같다. 그곳이 탈출구가 아니었다는 것은 나중에야 느끼게 되었다. 사실 여전히 앞에는 막다른 길이었다. 위안을 기대하고 그곳을 찾았지만, 사실 우울했다. 나중에서야 알게되었지만, 사실 납골당을 갔다오면 더 우울해졌다. 순간의 위안보다 더 큰 우울이 있었다. 돌아가시기 전 아빠의 모습, 그리고 그 이후에 겪었던 어려움들에 대한 답없는 질문을 던져내는 시간이었다. 물론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그곳에 계속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때마다 느끼는 우울이 안정감을 줬을 수 있다. 슬플 때는 슬픈 음악을 듣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말처럼.
이처럼 예전의 나는 우울했다. 지금 내 삶의 구원자인 아내는 나에 대한 첫인상이 어둠 그 자체였다고 했다. 지금도 물론 반짝반짝 하지는 않다. 납골당에 가는 행위가, 아빠가 있는 곳에 찾아가는 행위가 나에게 우울감을 준다는 것을 안 것은 결혼을 결심한 때 즈음이었다. 더이상 우울하게 살고싶지 않았다. 필요 이상으로 납골당을 찾아갔고, 세상에 없는 아빠를 의지했던 나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혼하고는 납골당을 지나치게 많이 가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우울감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조금은 무심하려고 노력했다.
아빠가 있는 납골당은 내게 우울감만 주는 곳은 아니다. 아빠를 생각하며 그 그리움을 달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사실, 아직도 아빠가 보고싶다. 결혼을 해서 남편이 되었고, 요벨이가 태어나서 나 또한 아빠가 되니 더 그렇다. 그리움은 극복한다거나 이겨낸다거나(같은 말인가?) 하는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느낀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그렇다. 무언가로 잠시 메울 수는 있어도 없어지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이 나쁜 것일은 아니니.
올해는 납골당에 가지 못했다. 바쁘기도 했지만, 내가 갈 수 있을 시기에 코로나로 납골당이 닫혀있기도 했다. 그래도 올해가 가기 전에 납골당에 한번은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빠 손녀 생겼다고 이야기 해주고 싶었다. 우리 장인어른이 그러시듯 너무 예뻐했을텐데, 아빠는 못봐서 아쉬울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정말 예쁘다고.
혹시나, 이번에도 코로나 때문에 닫혀있을까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추모글이 가득하다. 모아서 책을 내면 어떨까 싶을 정도로 가슴을 울리는 글들이 많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누나, 동생... 가장 가까웠지만 닿을수 없는 대상을 향해, 세상에 없는 추모의 대상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을 얹어놓는다.
올해가 지나기 전에 꼭 가봐야겠다. 그곳에서 마주하는 것은 더이상 우울감만은 아닐 것이다. 왠지 그럴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