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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잔잔 Apr 01. 2024

여덟 번째 인터뷰 : 파비안(1)

파비안과 나의 이야기

그녀의 가장자리만을 거닐어 본 사람은 순진한 연두색 해변가를 기억하겠지. 하지만 그 속에 다이빙해 본 사람은 알거야. 이 바다는 붉은 색 용암을 품은 깊고 진한 심해라는 것을.


Q1.

이곳에서 불리고 싶은 이름과 그 이유를 말해주세요.

(본명도 물론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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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안(Pavian).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님의 데뷔작인 <세월의 돌>의 주인공 이름입니다. (영어 표기는 다릅니다) 그의 삶의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든가, 그를 닮고 싶다거나 하는 무게감 있는 마음까지는 아니고... 그냥 ‘파비안’이라고 발음할 때 음성이 부드럽게 막히지 않고 굴러나가는 느낌이라 좋고, 한글로 적든 영어로 적든 글자의 모양새가 예뻐서 좋아합니다. 읽으시는 분들께도 이 이름이 편안하게 가 닿았으면 좋겠네요. (더불어 제 답변도요.ㅎㅎ)

참, 시작하기 전에, 제가 작성하는 답변들은 어디까지나 질문지를 마주하고 앉아 있는 오늘 이 시간만의 제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라는 게 원체 항상 변하는 존재잖아요? 그리고 개중에서도 저는 즉흥적인 면모가 비교적 강한 사람이라서, 독자분들이나 작가님께서 나중에 저를 만나셔서 “그때 그랬잖아?” 라고 말하시면 “헐 내가?” 라며 놀라워할 수도 있습니다. 미리 양해를 구하며, 지금부터 차근차근 답변해 보겠습니다.          


Q2.

현재 인터뷰를 응하고 계신 장소와 시간이 궁금합니다.

(장소 자체를 묘사해주셔도 좋고 혹은 이 장소에서 인터뷰를 하게 된 연유나장소가 지니는 의미가 있다면 덧붙여주셔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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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6일 오후 11시 41분에 인터뷰지를 처음으로 열어 보았습니다. 제 자취방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2024년 3월 17일 오후 7시 55분에, 이어서 쓰고 있지요. 역시 제 자취방입니다. 어제 이후로 안 나갔거든요. 약속이나 해야 할 일도 (거의) 없는 완벽한 휴일입니다. 

사실 그래서, 이전부터 벼르던 옷정리를 오늘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tmi:사실 저는 타칭 패션 테러리스트^^..입니다. 저도 이 사실을 최근 들어 인정하긴 했는데, 어떤 이상한 똥고집이 ‘자칭’이라는 단어를 타이핑하려는 것은 아직까지는 막고 있네요. 그래서 괄호 속에 궁색한 부연이라도 해 봅니다.) 4시간이 지난 지금도 절반도 정리가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약간 패닉 상태입니다. 4시간 동안 정리만 한 것은 아니고, 옷 접는 법 / 정리하는 법 / 옷걸이 추천 등등의 유튜브를 보기도 하고, 밥도 챙겨먹긴 했습니다만 이런 속도는 좀 너무한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월요일이 1시간도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는(질문들을 오가며 답변하는 사이에 오후 11시가 되었거든요), 아직도 침대에 몸 누일 자리 하나 마련하기 어려운 진척도라는 사실이 더더욱 유감이 되고 있습니다. 처음의 목표처럼 오늘 안에 정리를 끝내는 것은 고사하고, 이 글이 잔잔님의 브런치에 올라갔을 때에라도 제가 옷 정리를 다 끝냈길 바랍니다….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은 3월 19일 오후 3시 51분이 되었는데요, 끝이 보입니다! 이너와 티셔츠들만 남았습니다. 3시간 정도 걸릴 것 같네요.ㅎㅎ)

하여튼 그래서 지금 제 10평 남짓의 방에는 온 바닥에 모든 계절의 다종다양한 옷이 놓여 있습니다. 일단 제 옆 의자에는 살 빼면 입겠다며 그동안 쌓아둔 2개의 미니스커트, 2개의 슬랙스, 3개의 바지가 걸려(얹혀?) 있고, 그 옆으로는 앉은뱅이 책상이 있는데, 그것이 거의 옷에 파묻혀 있습니다. 간혹 목도리나 요가복, 트레이닝복도 보이고요. 전부 뒤집어엎다 보니, 오랜만에 마주하는 녀석들도 나와서 다가오는 주에는 얘네를 입어 봐야지~ 하다가도, 일단 있을 자리부터 마련해주자 하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아야 이 한바탕 정리가 끝나겠다는 생각도 퍼뜩 드는군요. 아마 그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어떤 놈들을 선택하고 떠나보내느냐의 문제까지 다루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녹록하지 않은 밤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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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한번 더 뛰어넘어 지금은 3월 23일 토요일 밤입니다. 일주일 내내 짬이 날 때 옷 정리를 30분, 1시간씩 하다 보니 오늘 마지막으로 투자한 4시간을 끝으로 제 생애 첫 옷 정리가 끝나게 되었습니다. 큰 자루 2개 분량의 헌옷과, 옷과 함께 정리된 안 쓰는 생활용품 다수가 나왔습니다. 이것들을 당근마켓에 올려 보고, 수요가 없다면 그때 처분하려고 합니다. 개운하고 산뜻한 기분입니다. 다시 할 수 있겠냐? 라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아니요, 라는 대답이 나오는 것을 보니, 한결 더 후련합니다.          


Q3.

고개를 돌려 잠시 하늘을 봐볼까요오늘의 날씨는 어떤지 자세히 묘사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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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7일) 오늘은 제가 사는 지역에서는 올해 들어 처음으로 기온이 20℃까지 올라간 날이었습니다. 햇살은 쨍쨍했고, 바람도 머리카락은 날리지만 옷 속을 침범하지는 않을 만큼 기분 좋게 불며,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떠다니는 날이었습니다. 자정에 가까운 이 시간까지도 10℃ 이하로 내려가지 않고 있어요. 날씨가 너무 좋아 괜히 달뜨는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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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3일 토요일에는 바람도 적게 불고, 기온은 22℃까지 올라갔습니다. 오늘 역시도 날씨가 너무 좋아 괜히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공연한 애교를 떨고, 궁금하던 과자를 새로 사 먹어 보았습니다. 실패하였지만... 그래도 팔랑대는 하루를 보냈습니다.           


Q4.

요즘의 기분을 날씨에 빗대 표현해본다면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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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기분을 먼저 생각해 보자면, (저는 이제 막 개강을 맞이한 대학생인데,) 개강 이후로 방학 때는 유리되어 있었던 수많은 인간관계들을 다시(학과 특성상 동기들과 입학부터 졸업까지 쭉 같이 갑니다.) 마주하면서 매일 크고작은 감정적 부침을 겪고 있습니다. 사소하거나 거대하게 절망하거나 체념하는 일도, 행복해하는 일들도 요전 몇 달간보다는 많아졌어요.

그러니 저는 요즘의 기분을 ‘바람 많이 부는 날’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바람에 따라 구름이나 파도의 모양이 천 가지 만 가지로 변하듯 제 기분도 시시각각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제 통제범위를 벗어난 슬픔이나 기쁨도 느끼는데요, 이것은 유독 사나운 바람에 빗댈 수 있겠습니다.           


Q5.

오늘 했던 생각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생각을 찾아 이곳에 풀어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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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마침 오늘 오랜만에 일기를 썼는데, 그중 일부를 발췌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온하고 평화롭다. 이상적이라고 느낀다. (...) 내가 오늘 하려고 생각했던 것 & 생각 이면에 부려두었던 계획들을 전부 다 완료해서 행복감을 느끼는 것 같다. 본격적으로 행복감을 느끼는 이유를 적어 보자- (...) 머리에서 좋은 향기가 나는 채 하루를 보내는 것이 생각보다 산뜻한 기분이라는 것을 버스 창가에 앉아 스쳐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쳐다보는 중에, 영화를 보는 중에, 손으로 머리를 빗질하는 중에 느꼈다. (...) 맘에 드는 이미지를 수집하고, 일상을 잘 굴리기 위한 도구들을 계획하고 마련하고, 티가 나지 않아도 조금씩이라도 정돈하는 것이 기분 좋았다. (...) 혼자 있어도 저번 주 금토일처럼 뭔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 또한 뿌듯함의 이유가 되었다.’     

과외와 주문 외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하루지만, 그랬다는 사실이 뒤늦게 생각날 만큼 충만한 하루였습니다. 뭘 했는지 궁금해하실까봐 말씀드리자면, 별건 없고 그냥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 영화를 보고 - 궁금하던 디저트가게가 눈에 보여서 들어가고 - 가격이 괜찮은 오렌지를 발견해서 사들고 귀가한 것이 다였습니다. 단순하고 간단한 일들이죠? 이렇게 부담 없는 일들을, 날씨 좋은 날에 바지런히 쏘다니면서 하나씩 처리(?) 하는 과정이 새삼 행복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가벼운 옷차림으로 가벼운 일상을 사는 것이 산뜻했습니다.               


Q6.

세상에는 셀 수 없을 만큼 저마다 다른 사랑()의 모습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가족형제친구연인처럼 대상도 제각각이고 애증정렬헌신 등 담고 있는 감정도 달라요인생에서 당신이 꼭 경험해보고 싶은 사랑의 모습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잠시 생각해 보고 그 이유와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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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형제, 친구 간의 사랑은 충분히 주고받고 있고,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에 대한 단단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사랑을 표현했을 때 가슴이 따스해지거나 가끔은 눈물도 삐져나오는 것 같은 감정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는 많이 느껴 보았습니다. 그러나 연인 간의 사랑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동안 연인이 몇 있기는 했으나 깊은 감정까지 나누는 연애는 한 번도 해 보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제가 꼭 경험해보고 싶은 것은 ‘연인 간의 사랑’입니다.      

이제 제가 상상하는 ‘연인 간의 사랑’이라는 것을 몇 가지 구체적으로 그려 보겠습니다. 

#1. 초가을 혹은 초겨울. 할 일이 하나도 없는 날의 늦은 오후. 무거운 주황빛 햇살이 거실 깊숙이 포근히 침투하는 와중에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거나, 창밖을 보며 멍하니 있거나, 이따금 대화를 나누며 진심에서 우러나온 웃음을 짓는 우리 두 사람.

#2. 함께 잠들어서, 먼저 스르륵 깨어나 아직 자고 있는 연인의 모습을 보는 나. 편안함을 느낀다.

이 정도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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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구체적인 연애의 한 순간을 상상하고 묘사하는 지금도, 저에게는 아주 뿌리깊은 불신이 있습니다. 아주 완고하고 공고한 불신입니다. 다시 한번 제 다른 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언젠가의 독서록에는 이렇게 적은 바 있습니다...     

‘(...) 누구도 쉽사리 믿을 수 없다. 가뜩이나 서로에게 호감이 있는 상태에서 시작한 관계라면 그에 눈이 가려 금세 서로에게 빠져들고, 초반에는 서로의 결핍 따위는 눈에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점점 사이가 벌어지는 시점이 올 것이고... 지혜롭게 해결하지 못한다면 곧 종말이겠지. 둘만이 향유했던 언어도 사랑도 휘발되고, 최악의 경우에는 서로의 비밀을 잔뜩 쥔 적으로 남을지도. 그 지난한 과정을 겪느니 그냥 가족 이외의 단 한 사람에게 이해받고자 하는 욕망을 포기하고 이렇게 연애 없이 살아도 괜찮을지도?’     

이러한 불신은 1)제가 아직은 완벽히 기억해내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어렸을 적의 어떤 결핍 유발적인 경험들과 2)중학교 이후로 딱히 인기있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속으로는 인기와 관심을 갈망해왔던 제가 그 괴리에 슬퍼하지 않으려고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방어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사실 이라는 두 가지 이유로 수년간 적층되어 온 것 같습니다. (이조차 연쇄적인 질문을 통해 스스로의 속을 파고들어가며 짐작한 몇 가지일 뿐이고정확한 이유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불건강한 마음임을 알지만, 아직 저에게는 너무 설득력이 강한 관념이기 때문에 굳이 깨트릴 필요성도 못 느낍니다. 더군다나 만에 하나 불행한 연인 관계를 형성한 뒤 이별하게 되면 오히려 강화될 것이기 때문에 뭔가를 시도해보기를 더 망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위 구절에 나와 있는, ‘가족 이외의 단 한 사람에게 이해받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켜줄, 그래서 저 불신을 깨어줄 사랑을 한번 경험해 보고 싶기도 합니다.           


+P.S. ‘사랑’이라는 것을 제 나름대로 정의해 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때에도 평소처럼 한글 파일을 켠 뒤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았었지요. (일단 쓰기에 착수하고 나면, 이런저런 것들이 생각의 샘 위로 부상하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니까요.) 그런데 놀랄 만큼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보통은 생각의 속도를 타자 치는 속도가 겨우 따라가는데, 그때만은 달랐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쓰기라는 행위가 발생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밖에는 쓸모가 없는 문장 몇 개를 뿌려두고는, 다음에 이어서 써야지 하고 놓아두었습니다. 짐작하셨듯 그 뒤로 지금까지 그 파일은 다시 열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게 아마 2018 혹은 2019년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본 인터뷰는 분량 상 두 편으로 나누어 구성했습니다. 다음 편에서 나머지 질문에 대한 답이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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