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경고하자면 오늘 일기는 재미가 없을 것이다.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었고 그래서 뭘 많이 쓸 기분이 못되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강하게 쏟아지는 햇빛이 시계를 대신 하는 내 방. 수아와 나는 또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일을 시작했다. 한두시간 뒤에 있을 화상 미팅을 시작하기 전까지 수아는 침대에서 막 기어나온 잠옷 바람으로 빠르게 뉴스들을 훑어내려갔다. 우리는 커피와 시리얼을 먹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먹었다. 나는 곧 서울에서 열리는 전시 준비로 주중까지 서울에 있는 친구들에게 편집된 영상을 보내주기로 되어있었는데 어쩐지 아무리 시간을 보태도 일에 진척이 없다.
오후에는 세미나가 잡혀있었는데, 그전에 아샤를 만나 또 다른 학과 친구 야물Yagmur의 팝업 전시를 보러 갔다. 야물은 터키에서 온 친구로 이전에는 도시계획을 공부했다. 도시를 관찰하는 블로그 Urban Backlog 를 운영하는 한편 시각디자이너인 남자친구와 함께 디자인 스튜디오 Paleworks로 활동하고 있다. 어느 자리에서 PT를 하건, 도시에 대한 인사이트를 담아 완성도있는 발표를 자랑하는 그를 보며 나는 마치 마음 한켠에 이루지 못한 꿈을 보는 듯 동경의 마음을 가지곤 했었다. 어쨌거나, 야물은 최근 수개월 고생하더니 동네에 있는 작은 갤러리 공간에서 학교 펀딩으로 브랜드 팝업 스토어를 열었다. 야물, 아샤, 나의 이론 분야 어드바이저가 같은 분이어서 간만에 논문 얘기도 하고 그랬다.
세미나는 바우하우스 100주년을 맞이해 새로 개관한 신-바우하우스-뮤지엄의 강의 공간에서 있었다. 지난 번에 늦어서 출입을 못했기에 뮤지엄 내부로는 오늘 처음 들어가보았다. 대형 뮤지엄들이 그러하듯 우직한 가드 아저씨들이 양복을 입고 입구를 지키고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수업이 있다는 우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길을 막고 한참을 "Nein, Nein"으로 응수하셨다.). 입장료는 얼추 10유로를 웃도는데, 들어보니 바우하우스 대학교 학생들이라고 해도 상설 전시 공간에 대해서는 아무 혜택이 없어 실망했다. 내 돈 주고 나는 과연 바우하우스를 탐구하러 이 뮤지엄에 발걸음을 할 것인가. 수아가 떠나기 전에 한 번은 오려나.
세미나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글머리에 썼던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아샤와 7월에 있을 논문 발표일 날짜 정하는 것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크게 다투고 말았던 것이다. 다투었다기에는 내가 조금 미안한 일을 만들었는데 아샤 쪽에서 쏘아 붙였다고 해야겠다. 야물, 아샤, 내가 같은 이론 어드바이저를 공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분 일정이 워낙 바빠서 각자 자기를 도와주는 나머지 2명의 어드바이저의 일정까지 조율해서 모두에게 맞는 날을 정해야했다. 내 이메일 소통이 조금 더디기도 했고, 내 쪽 어드바이저 한명의 스케줄에 변동이 생겨 어느정도 정해져가는 일정에 새로운 날짜를 다시 제안해야했다. 나는 아샤에게 너의 다른 어드바이저들에게 이 날짜가 괜찮을지 메일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아샤는 날짜를 번복함으로써 어드바이저들을 귀찮게 하는게 싫다며 '네가 평소에 꾸물대니까 일이 이렇게 어려워졌잖아'라고 화를 냈다.
화를 내는 아샤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모든 게 내 잘못인것도, 그렇게 큰 일이 생긴것도 아니었는데. 그치만 적어도 내가 일처리가 느린 건 사실이다. 최근의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에게서 그라서 알 수 있는 내 모습을 근거로 비난 당하는 건 무척 아팠다. 너무해. 나는 네가 바보같은 일을 저지를때마다 그런 식으로는 말 안했다고. 몇 시간이 지나자, 자기가 최근에 받은 스트레스를 괜히 나에게 더 얹어서 말한 것 같다며 그 부분은 미안하단 메시지가 왔다. 그치만 이미 길바닥에서 들은 그의 말들은 종일 나를 쫓아다녔다.
'퇴근' 후 가려던 케익집이 영업을 마친 다음에야 집 밖에 나온 수아도 마음이 꿀꿀했던 건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대신 Wielandplatz에 있는 가게에 들어가 생맥주 두 잔과 감자튀김 작은 바구니를 시켰다. 몇 번 와본 적은 없지만 나는 이 전형적인 독일 분위기의 음식점을 좋아한다. 주광빛 조명 아래 나무로 된 실내만큼이나 활기차게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이 늘 반짝인다. 바 테이블 위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감자를 앞에 두고 수아와 나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 날 혼자였더라면 무얼했을까. 적어도 이 가게에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옆에 앉은 독일인 할아버지가 가까이 있는 동양인 여성 둘에게 호기심이 있는 것 같다며, 각자 낮동안 겪은 일들은 묻어두고 눈에 보이는 대로 시덥잖은 얘기로 딴청을 부렸다.
장을 보고 나니 우리는 또또 허기를 느꼈고 집에 가서 라면을 먹고도 피자까지 한판 구웠다. 먹으면서 넷플릭스에서 아이유가 주연으로 나오는 옴니버스식 드라마 시리즈를 보았다. 아람, 이건 누구 작가가 연출한거고 이건 누구 작가가 연출한거래. 이 사람 나 좋아하는데 이건 의외로 좀 별로다. 오 그렇구나. 그래? 난 그거 처음 알았어. 한때 방송국쪽 일을 꿈꾸었던 수아가 두 눈을 반짝이며 논평을 했고 덕분에 나는 저녁부터 시작된 어떤 딴청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