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21일
날씨: 청명, 차가움
기록자: 동그라미
야림 말이 맞아.
그러니 나는 심지어 두 개의 집 얘기를 쓸 거야.
3월 사이 나는 베를린 집을 조용히 처분했다. 정확히는 세 명사는 집의 작은 방. 작년 7월 졸업한 직후 운 좋게 구했던 거처였다. 학생 비자가 끝나가는 시점이라 살던 기숙사에서 머지않아 나와줘야 했다. 이전에 베를린에 살았던 교회 오빠가 어쩌다 보니 유지하고 있던 본인 집에 세를 줬고, 학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바이마르에서 베를린으로 이사했다.
차가 없는 외국인이 네 시간가량 떨어진 다른 도시로 이사하는 건 정말 쉽잖은 일이었다. (이건 특히 짐을 미리 정리 못한 내 잘못이겠지!) 웬만해서는 그 어려움을 묘사해서 쓰겠지만, 이건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게 지난해서 도저히 못하겠다. 기숙사 나갈 때 하우스 마이스터 아저씨 올라오기 직전까지 미친 듯이 집을 쓸고 닦던 순간을 떠올리면 식은땀이 난다. 다시 한번, 이사를 도운 엘함, 스테판, 캐서린, 민희, 재우 형님, 건우에게 무한한 감사를 전한다...
그 여름 둘러보러 잠시 들렀던 그 집은 큰 창으로 햇빛이 쏟아지는 꽤 ‘멋진 공간’이었다. 왜, 당장의 꾸며진 상태는 영 그런데 구획 자체가 멋진 공간 있잖는가. 오래된 독일식 건물 꼭대기에 위치한 집. 당시 어학 공부 또는 대학 입시 중인 세 한국인 남성분들이 살고 있었고 집도 실용적으로만 활용되고 있었는데, 조금만 정성을 들이면 오래 머무르고픈 분위기를 담아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세 개의 방 모두 상대적으로 작았지만 천장이 높고 널따란 거실이 맘에 들었다. 내 방은 사실 여러 개의 뚱뚱한 화분과 안락의자 두어 개 두면 알맞을 테라스였을테지만, 그 집이 가진 가능성에 결정을 내렸다. 잠은 방에서 자지만 기왕 하우스메이트가 생기는 거, 먹고 일하는 건 거실이어도 즐거울 것 같았다. 또 스타트업의 성지인 베를린에 일하기 좋고 분위기 좋은 카페가 없겠는가.
이사를 오고 나서, 새로 이사 온 두 동거인들과 나는 제 짐을 열지 못하고 꼬박 이삼주에 걸쳐 집 전반의 찌든 때를 벗겨냈다. 먼저 직접 손때와 먼지가 켜켜이 쌓인 방 사면을 새로 칠했다. 대대로 서로에게 미뤄 주인 없이 방치된 많은 물건을 몽땅 버리고, 대체 언제부터 이런 모양 새였을지 알 수 없는 주방 두터운 기름때와 욕실 바닥 때를 벗겨냈다. 허리가 끊어질 듯한 상태에서 차려낸 식탁 앞에서 동거인들과 자연스레 동지애가 싹텄다.
그제야 나는 매트리스와 카펫, 침구와 커버를 고를 수 있었다. 그래 봤자 어느 집에나 있을 이케아 제품인데,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20분 거리에 있는 매장에 가서, 한참을 서성이고 만져보고 누워보고 밟아보고. 내 삶의 공간에 오래 있을 물건들이니까, 결국 어느 시점에 다 두고 가게 되더라도 함부로 고르기는 싫었다. 방에 둘 물건을 고르는 일은 매일 이 안에서 어떤 경험을 하며 살아가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설계하는 작업이니까.
주말마다 플리마켓을 크게 여는 곳이 많아 그중 한두 곳에 구경을 갔다. 구 동독식 디자인의 예쁜 스툴이나 램프를 살 수 있으려나 싶었다. 작은 액세서리부터 의자와 소파, 조명과 모피코트, 예술가들의 수공예품이 지붕 없는 박람회장처럼 야외에 줄줄이 전시되어있다. 하지만 장담컨대, 안팎을 철저히 구분해서 사는 - 밖에서 먼지 먹은 물건을 방안에 들이지 않는다든가, 안에서는 맨발과 좌식생활을 선호한다든가 - 이들이라면 소문 듣고 길러온 기대와 달리 선뜻 손이 가지 않을 컨디션이다. 사회적 자본, 공용공간에 관심 많은 나조차 매번 실망스러웠다. 아니, 그걸 선호할 수 없는 취향으로 내가 자라온 거겠지... 같이 간 동거인 J는 독특한 디자인의 반지만 세 개 골라왔다. 집에 와서 소독차 여러 번 헹궜는데 땟국물이 끊이지 않았다는 후문.
집을 알아보고, 그 정확한 위치 주변의 가게들을 가보고, 주소지를 옮기고 거주 허가증을 갱신하러 여러 기관에 들리고, 새로 정착할 교회 커뮤니티를 물색하고, 30분 S반을 타고 저녁 소모임에 참여해보고, 일하러 갈만한 카페와 도서관을 찾아다니고, 근처에 사는 동기들과 만나고, J와 수시로 장 보러 가고... 짧은 시간 열심히 내 삶터로서의 베를린을 읽어 내렸다. 자유로움이라 통칭되는 베를린의 무질서와 환대하는 분위기가 싫으면서 좋았고, 특별히 좋아하는 길거리와 모퉁이를 찾게 되었다. 아직 막연하지만 수개월 뒤 크로이츠베악 어딘가의 사무실에서 디자인 일을 하고 있을 나를 상상해보았다. 회사 안팎에서 동료들과의 커피타임. 줄곧 영어로 업무를 보는 건 어떤 느낌일까. 동거인 친구들과 작당모의를 하면, 넓은 거실 일부를 에어비앤비 공간으로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일이 되면 힐송 처치 베를린에 가서 밀레니얼식 예배를 드릴 것이다. 마치고 나서 문화의 양조장 안쪽 푸드트럭에서 C, J, M과 요기를 하고. 그러다 월급을 좀 모은다면 그다음 여름에는 더 너른 집으로 이사도 갈 수 있으려나.
지난 3월.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내려친 글자 몇 줄과 클릭 몇 번으로 그 집은 다른 친구의 것이 되었다. 생각해볼수록 믿기지 않는 일이다. 김포 부모님 집 방 벽에 등을 대고 침대 위에 우두커니 앉아, 대륙 반대편에 위치한 내 공간을 없어지게 할 수 있다는 게. 어쩔 수 없었다. 겨울 사이 나는 반년 못되게 한국에 들어와야 했는데, 코로나 확산이 급하게 진행되면서 하늘길이 점차 막히던 차였다. 이미 몇 개월째 멀리서 집을 유지하기가 부담스러워진 상태였다. 어쩌면 구직을 위해 독일로 돌아가는 게 꽤나 멍청한 생각일 수 있다는, 적어도 나 같은 외국인 구직자가 득시글한 베를린으로는 귀환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점차 설득력을 갖기 시작했을 때. 그리던 그림을 놓아주었다. 그 방을 거점으로 사방에 가지를 뻗어있던 상상들, 되고 싶었던 나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