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온 INFP
날짜: 2020년 7월 19일
기록자: 동그라미
날씨: 장대비, 꿉꿉한 공기
지난 금요일 밤, 열 시가 넘은 시각. 미룰 수 없는 회사 업무가 너무 많아서 사무실에서 팀원 한 명과 야근을 오래 하고 있었다. 직접적인 내 업무는 좀 전에 끝났지만 같은 팀원이 맡고 있는 공동 업무가 끝나지 않아 슬슬 발이 동동 굴러졌다.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회사에서 김포 신도시로 이동하는 데엔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야 하는 터라 무사히 집에 도착하려면 사무실에서 열 시 반에는 나오는 게 안전하다. 문어카톡방(나, 뽈, 수아, 야림이 들어있는 그룹)에 아직 퇴근을 못했다고 알리자, 수아는 여느 때처럼 본인 집에 자고 가라고 했다.
사무실에서 그의 집까지는 마을버스로 십 분 거리. 머릿속으로 빠르게 시뮬레이션을 해보았다. 지금껏 나는 부모님 집에 사는 동안 외박을 한 적이 거의 없다. 그랬다간 대체 무슨 일이냐며, 뭐하는데 그러냐며 엄마의 비논리적인 의심과 소박을 잔뜩 맞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랑 단둘이 사무실에서 일을 정리하고 있던 팀원을 이 넓은 건물에 홀로 (물론 그는 진즉에 "제가 마무리지을 테니 먼저 가세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두고 가는 게 오늘만큼은 싫었고, 이미 기진맥진한 상황에 대단히 할 수 있는 일도 없겠지만 그냥 수아와 뽈이 보고 싶었다. 출근하는 날마다 물리적으로 멀리 있지 않았는데도 몇 주째 보기가 참 안됐다. 일과를 마치고 나면 나는 신데렐라 마냥 더 늦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 어릴 때부터 지켜온 부모님 집에서 사는 동안의 룰이었다.
그리고 이 날 나는 그냥 어기기로 했다. 어렵지 않게 가족 카톡방에 구구절절 장문의 메시지를 남겼다. 예상치 못하게 야근을 오래 하게 되어 수아네에서 자고 가려 합니다, 내일 귀가하겠습니다 라는 골자의 내용. 아니나 다를까 바로 엄마의 전화가 걸려왔고, 성난 엄마의 목소리가 분명 옆 동료에게도 들렸을 게 분명하다. 너 지금 어디야, 네가 어떻게 엄마에게 이럴 수 있느냐, 갑자기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너 뭐하려는 건데, '계약직 주제에' 회사가 너한테 뭘 그렇게 해주냐며 왜 그리 열심히 하느냐라는 소리까지. 내 나이가 서른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지면서 헛헛한 웃음이 입에서 비집고 나왔다. 난 언제까지 나를 설명해야 할까? 수아네에 도착하면 두 사람과 함께 있는 인증숏을 찍어 보내라는 얘기로 거친 통화가 끝났다.
동료의 업무를 함께 해치운 다음, 건물 1층을 돌아다니며 커다란 사무 공간의 조명 전원을 모두 끈 다음 같이 무서워하면서 깜깜해진 건물을 빠져나왔다. 버스 막차를 잡아타야 하는데 무얼 어디서 타야 할지 몰라서 동료가 알려주는 방향대로 뒤로 손을 흔들며 정신없이 정류장으로 뛰어갔다. 사 개월 가까이 이곳에 근무했지만 인근으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를 별로 타본 적이 없다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바로 도착한 7721 버스에 올라 뒤쪽 좌석에 앉았다. 요란했으나 마음만큼은 너무도 개운했다. 내가 선택하고 싶은 만큼의 책임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이 짜릿하게 좋았다. 복잡하지 않은 내 떳떳한 이유가 좋았다.
꽤나 더운 여름밤. 곧 수아와 뽈을 만나 편의점에서 칫솔과 맥주, 컵라면을 하나 사서 수아 집으로 갔다 (편의점에서 엄마는 왜 연락이 없냐며 또 전화가 왔다). 가운데 거실이 있고 양쪽으로 난 방에 각각 수아와 다솜이 살고 있는 집. 도착하자마자 얼른 엄마에게 인증샷을 찍어 보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의식적인, 나란히 서서 찍는 셀카 너무 오랜만 아니냐며 셋이서 히죽댔다. 두 사람 먼저 씻으라고 하고, 나는 거실과 부엌 사이 애매한 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하필 아침 일곱 시에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집을 나선 날. 너무 오래 일하고 나니 온 몸에서 난 열기로 전신에 땀이 찬 찝찝한 느낌이 들었고 두 친구의 집에 함부로 몸을 늘어뜨리고 있기조차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샤워를 끝낸 두 친구가 각자의 방에서 커다란 티셔츠와 반바지 한 벌을 빌려줬다.
이윽고 나도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로 샤워를 했다. 욕실에 놓인 러쉬 샴푸와 바디젤을 빌려 썼다. 거품을 내며 오빠, 아빠와 함께 쓰는 우리 집 욕실을 떠올렸다. 몇 주째 쓰고 있는 공동 샴푸가 내 머릿결에는 맞지가 않아 신경이 쓰이던 중이었다. 두 남성분과 다른 제품을 쓰고 싶으면서도 물건을 늘어놓는 것을 싫어하는 아빠 눈치가 보여서 (때론 그 둘과 나눠 쓸만한 물건이 아니어서) 다른 걸 사다둘 생각이 안 났다. 아무튼, 선명한 파파야, 라벤더 향기가 너무도 상쾌했다고.
노란 조명을 어슴푸레 켜놓은 거실에서 탁자에 둘러앉아 컵라면이 익는 걸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탁자 새로 샀구나! 응, 절반 가격에 잘 샀어. 오른쪽 방에서는 뽈이 런던에서 굳이 챙겨 온 LP위 수아가 그에게 선물한 앨범이 돌아가며 재즈가 흘러나왔다. 좀전에 편의점에서 네 캔에 만원 하는 맥주를 사 왔지만 수아와 뽈이 'Moonlight'라는 스코티시 배럴 에이지드 에일을 먹어보겠냐며 와인병같이 생긴 맥주를 권했다. 보통 '난 선호가 없으니 여러분 좋은 거 해'라고 말하며 뭔가를 선택하기 미안해하는 마음을 숨겨버리는 나지만, 오늘은 어쩐지 그래 마시자! 해버렸다. 초콜릿과 캐러멜 향이 진한, 아주 맛있는 맥주. 뽈은 남한테는 안 빌려주는 특별 잔에 전문가답게 병 바닥을 잡고 꼴꼴꼴 잔을 채워주었다. 우리는 더 이상 두 눈꺼풀이 버틸 수 없을 때까지 마시고 수다를 떨었다. 세 시가 넘은 시각, 두 친구는 거실에 이불보와 베개를 내어주며 내 잠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모든 방에 한 사람씩 누운 꽉 찬 집이, 완성되었다.
동그라미도 커피 마실래?
수아의 두 손가락이 내 어깨를 살짝 밀었다. 화들짝 눈을 뜨고 내가 낯선 곳에 있다는 생각에 소리 없이 놀랐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11시를 향하고 있었다. 지난밤 방바닥에서 자는 게 조금 낯설다 싶었는데 잠은 푸지게 잘 잤다. 수아는 밖으로 소리가 안 나게 왼쪽 방에서 원두를 갈았고 나는 함께 부엌에 오도카니 서서 커피를 내렸다. 우리 집에선 모닝커피 마시고 도로 낮잠 자는 게 룰이야, 수아가 말했다. 그런 이상한 룰도 있다니, 잠시 생각하다가, 정말 멋지구만, 이라고 또 생각했다.
원래 계획은 이어서 김포로 놀러 가자고 했었는데, 결국 내가 그냥 여기 더 있고 싶어서 취소했다. 달리 크게 한 일은 없다. 수아와 노브라 차림으로 슈퍼에 다녀오고, 뽈이 만들어준 비빔국수와 땡초 고추를 곁들여 먹으면서 눈물을 쏙 뺀 다음 넓게 핀 혀로 폴라포를 먹었다. 거실에 셋이 가로로 누워서 배 두들기면서 누워서 음악을 들었다. 각자 책을 읽다가 다시 곯아떨어졌다. 독일에 있는 K에게까지 연락해 스팀(Steam) 아이디를 빌려 고성을 지르고 초조해하며 게임을 하다가, 동네 가게에서 피자를 픽업해다 먹었다. 우리 누구도 지난 한 주동안 있던 사회 이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 무얼 어떻게 할 건지 따위는 묻지 않았다.
좋아하는 음악, 책, 영화, 음식, 물건, 가게, 동네, 취미,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대화는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수아와 뽈네에서 보낸 '힐링캠프' 약 20시간 속에서 나는 여성-또래 친구들이 만드는 안전한 공간, 그리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어떤 활기를 발견한다. 반드시 직접 공을 들여 만들어야만, 함께 모일 때에만 열리는 특별한 이 시공간. 엄마의 상상 속에서 이 곳은 온갖 사악한 의혹들로 버무려져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이것을 더 열어보고 싶은 욕심이 진심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설명하지 않고도 내가 그냥 나일 수 있는 곳, 친구들과 함께 일 수 있는 곳을 상상한다. 아마도 이 '일박일일'을 한동안 오래 기억할 것 같다.
아. 그나저나 나도 수아와 같이 INFP다. 내 경우엔 오랫동안 변함없이 INFP가 나왔다. 별로 MBTI에 몰입하는 편은 아니지만, 집에 있으면 친구가 보고 싶고 모임 자리에 가면 곧 집 생각만 나는 타입이라는 설명에는 격한 공감. 누군가가 강하게 끌어내 주어야만 바깥으로 나올 동력을 얻는 INFP. 이번의 충동 어린 외박 외에도 언제나 (부러 의도하지 않고도) 나에게 자극과 용기를 동시에 주고, 지혜를 나누는 야림, 뽈, 수아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