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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Oct 04. 2020

설렘을 찾아서

계속 가

2020년 10월 4일 일요일

날씨: 햇빛, 선선함

기록자: 동그라미


와. 마지막 글을 쓴 지 두 달이 넘었어. 그날그날 체력을 모두 쏟아부어야 하는 매일이다. (나만 그런 건 아닐 텐데 함께 일기를 쓰는 문어들에게 미안.) 이건 꼭 글로 쓰고 싶다! 고 마음은 진즉에 여러 번 먹었는데, 시간을 내어 앉아 그 생각을 글로 안착시키는 작업은 좀처럼 하지를 못했어.

돌아간 런던에서 한 달 새 겪은 변화를 동거인 이야기로 시작한 뽈의 일기는 아주 잘 읽었다. 나도 이제는 하나의 글로 담아낼 수 없는 변화가 많았던 터라 어디서부터 적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뽈처럼 재미있게 쓸 요령은 생각이 안 나고, 그냥 지리하더라도 시간순으로 적어야겠다. 느낌상 앞으로도 한동안 또 그럴 것 같아서.



7월 31일

상상력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나날이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잘 모르는 채로 잘 해내야 하는 일들이 낮동안 숨을 가쁘게 만든다. 일에 집중하다 보면 화장실도 참게 된다.

이번 주에 갑자기 퇴근길마다 핸드폰에 담긴 작년, 재작년 내가 나온 사진들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늦은 시각 띄엄띄엄 오는 6호선 지하철을 기다리는 승강장으로부터 귀갓길 한 시간 반 내내 계속 들여다본다. 두 대의 모니터 앞에서 하루 종일 하얗고 검은 것들을 읽던 같은 눈으로, 내가 있었던 다양한 공간들로 다시 돌아가 본다. 지나간 시간 속의 내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확인하는 이유는 그때의 낯섦을 기억해내고 싶어서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에게 여기에 그리 오래 있지 않을 것이라는 걸 상기시켜 주게 된다.


2017년 9월, 독일 카셀. 독일에 도착한 지 며칠 안되었을때. 동행한 K가 찍어주었다.


8월 10일

3년 전쯤 우리 문어 넷이서 다 함께 한 회사에 다니고 있었을 때, 나와 야림이 업무차 세종시에 Y 연구원님을 인터뷰하러 간 적이 있었다. 국책 연구소의 보안 시스템과 빽빽한 파티션을 지나 만난 연구원님은 놀랍게도 와이셔츠에 정장 바지가 아니라 연청바지에 베이지색 컴뱃 부츠를 신고 있었다. 함께 일식집에서 점심까지 먹었는데, 그의 열려 있고 진솔했던 태도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페북 친구를 신청했다.

어느 날, SNS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그가 지난 7월 중순에 본인이 담당하고 있는 군산 도시재생 프로젝트에 함께할 사람을 구한다고 했다. 주변에서 여럿이 나에게 포스팅 링크를 공유해주었다. 관심 있지 않느냐고. 연구소 특성상 평소 건축, 도시 분야 전공 석박만 뽑는데 이번의 경우 좀 더 다양한 분야에도 기회가 열려있었다. 공고문을 읽자 마음이 잔잔히 설레었다. 이렇다 할 아무 근거가 없는데 그랬다. 거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지원했다.


얼마 뒤, 서류 합격했으니 월요일에 면접을 보러 오라는 메일이 왔다. 설마 이 코로나 시대에, 억수로 퍼붓는 폭우로 인한 침수피해 속에 - 월요일에 세종시로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하겠어? 아니나 다를까 직접 오라고 했다. 현 직장이 기관 특성상 청년들을 배려하기 위한 기술을 고민하고, 안전 감수성이 높다 보니 (많은 심사와 모임이 온라인으로 대체되었다) 더욱이 이 연구소가 아주 보수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전날 면접복장이라는 것을 갖추러 바삐 다녔다. 그동안 내 또래가 대다수인 회사, 기관에서 일한 덕분에 서른이 되도록 옷장에 정장이랄 게 없었다. 대기업에 다니는 지인에게 자문을 구하여 SPA 브랜드에서 간신히 구색만 갖췄다. 거울 속 급하게 산 하얀 블라우스 카라 위 머리를 질끈 묶은 내 모습이 꽤나 촌스러워 보였다. 아. 물론 여느 때처럼 화장 안 하고 갔어. 월요일 아침에 인사 담당자 출근 시각에 맞춰 '오늘 정말로 변함없이 면접을 보느냐' 재차 전화 문의한 후, 하릴없이 아주 분주하게 출발했다. '설마 이게 필요하겠어' 싶은 마음으로 대기실에서 40분 동안 준비한 재미없게 논리적인 멘트가 없었다면 면접 때 대단히 당황했을 것이다. 그렇게나 조직의 분위기와 안 어울리는 인간이 입사를 시도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당일, 놀랍게도 비공식 합격 소식을 들었다. 그제야 뒤늦게 조금 두려운 질문이 들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나. 나는 자꾸만 아무도 등 떠밀지도 않은 새로운 방향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왕복으로 무궁화호를 탔었다. 평소에 탈 일이 전혀 없었던 기차. 사실 아침에 비밀요원처럼 데스크에서 인이어 지시를 내리는 K가 없었다면 제때 가지도 못했을 것 같다.


8월 20-21일

진심으로 그럴 생각 아니었는데 격무에 의해 집에 갈 막차를 정말로 놓친 늦은 밤. 당황해서 수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통 재깍 받는 친구가 응답이 없었다. 밖에 있는 갑다 싶어 입에서 망했다가 절로 나왔다. 이어서 뽈에게 전화했다. 사실 당시에 이 세상에 나오기 위해 태동하던 우리의 출판레이블 '문어사' 관련 이슈로 서로 조금 깔끄러운 게 있던 때였다. 수화기 너머로 뽈이 여느 때처럼 내 이름을 길게 늘여 불렀다. 수아는 방에서 자고 있는데 아무튼간에 오라고 했다. 흔쾌함이 고마웠다.

집에 들어선 나를 보고, 너 저번에 여기서 외박했을 때도 그 옷 입고 있지 않았냐고 수아와 뽈이 물었다. 야근 저주라도 받은 것인가.


(왼) 출국 직전의 뽈은 마감 노동자로서 잠도 못자고 허리가 부서지도록 글을 쓰고 있었다. (오) 잠에서 깬 집주인... 흡사 여름방학 맞은 초등학생 바이브





8월 22일

면접 결과가 직후 Y 박사님이 내게 집을 어서 구하는 게 좋을 거라는 조언을 했다. 수도 이전 이슈로 또 한 번 세종시에 이목이 집중되던 때라 집값이 마구 오르고 있었다. 2주 만에 집을 보러 세종시에 갔다. 혼자서 집을 보러 가겠다, 내가 미리 잘 알아보고 갈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내 말에도 엄마가 극구 동행하겠다고 설득했다. 엄마도 집 계약 같은 거 전혀 모르지만 그냥 같이 다니기라도 할게!!!(고함). 결론부터 말하면 엄마가 같이 안 왔으면 나는 그날 파무침이 되어 계약을 할 용기를 잘 내지 못했을 것이다.

독일에서는 2년 혼자 살았지만 한국에서는 처음이다. 그때는 기숙사에 살았던 것이라 크게 신경 쓸 일이 없었는데 서울에서 원격으로 오피스텔을 알아보려니 정말 쉽지 않더라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수많은 분들께 존경을). ㄷㅂ이니 ㅈㅂ이니 하는 어플들로는 정상 매물이 아예 존재하질 않았다. 엄마의 운전 덕분에 서로 꽤 떨어진 세 곳의 부동산에 들러 도담동, 어진동에서 매물 세 곳을 보았다. 방들은 다 모양이 똑같았다. 그래서 다들 매물 있기만 하면 전화상에서 계약을 한다고 하나보다. 세 번째 부동산에서 결코 친절하지 않은 중개사 아저씨와 월세 계약서를 썼다. 직접 번 돈으로 보증금을 낸다니 뭔가 스스로 믿어지지 않았다. 내게 작은 방이 생긴다. 한국에서.

사실 그날은 정말 이상한 날이었다. 집을 얻은 날이면서 동시에 없앤 날이기에. 세종에서 김포로 돌아오는 차 안, 베를린에서 K가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이미 진즉에 넘긴 베를린 방에 아직도 남아있는 내 짐을 K가 대신 정리하러 가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이 집은 줄곧 여러 명의 단기 세입자 손을 타고 있었고, 내 짐의 일부는 집 여기저기에 흩어져 쓰이고 있었다. 내가 그 집을 떠나온 지 벌써 1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캐리어 두 개에 박스 네 개는 나올 양의 나의 짐. 계획은 K가 필수 짐을 추려 베를린에서 4시간 떨어진 자신의 동네로 우선 가져간 다음, 거기서 한국으로 부치는 것이었다. 단시간 내에 짐을 추려야 했다. 영상통화로 K는 끈기 있게 일일이 옷 한 벌, 물건 한 개 끄집어내서 챙길까 말까 나에게 확인했다. 정말이지 몹쓸 짓이었다. 다 버려져도 할 말이 없는 짐을, 나는 타인에게 1박 2일 시간을 내게 해서 대신 추리게 하고 있었다. 와중에 쉽게 결정을 못 내리겠는 물건은 또 어찌나 많은가. K는 혼자 통풍이 안 되는 집에서 밀려오는 약속 시간 안에 물건을 선별하고, 쓰레기와 재활용품, 구제물품을 각각 배출하고, 짐을 가방에 싸고, 대단히 무거운 두 개의 캐리어를 5층 계단을 오가며 옮겼다. K는 비 오듯 땀을 흘렸을 것이다. 반면에 나는 전화로 이래라저래라 하다가 끊은 후 엄마가 운전해주는 차에 앉아 편안하게 집에 가고 있었다.


나는 며칠 동안 두통과 복통을 호되게 앓았다. 뭔가 끝나가고 있었다. 새로운 일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나는 독립적인 생활을 하겠다고 말하면서 이전보다 더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K가 보내준 현장의 사진들. 왼) 내 방에 흩어져 있던 물건들. 오) 내 옷 대부분은 적십자 기부함으로 들어갔다.  





또 저주받은 복장을 하고 있다.


9월 4일

직장에서 상반기 내내 준비해온 열흘짜리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막을 내렸다. 설마 설마 했는데 행사 시작 직전에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이 2.5단계로 진입했다. 8월 15일 광복절에 있었던 광화문 대규모 집회의 여파가 불어닥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열흘 내내 30명가량이 숙식을 해야 하는 것이다! 보통 같으면 많은 행사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연기하거나 취소를 택했을 것이다. 두 선택지를 고려하기에 이 사업의 경우 너무 많은 내외부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있었고, 물리적으로 한 자리 한 때에 진행될 수 없다면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차라리 병원에 준하는 방역 지침을 준수하는 게 낫겠다고 결정했다. 말도 안 되게 많은 변수들과 매번 생각지 못한 이슈들을 그저 정확하게 관찰하면서 나아가자고. 아! 생각해보니 첫 이틀은 우리 엄마도 고밀도 접촉자로 의심되어 나는 아예 참여를 하지 못하기도 했었다(결과는 음성으로 밝혀졌다).

다행히 코로나와 관련된 문제가 없이 프로그램이 끝났다. 코로나 관련이 아니면, 웬만한 문제들은 그냥 문제로 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정황상 나는 기관의 최고 우두머리들 외에 제일 가까운 팀에게 조차 퇴사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이은 격무, 자꾸만 심각해지는 코로나, 양의 되먹임으로 불어나는 업무들, 이미 죽은 화초 같은 컨디션의 동료 얼굴들... 그러다 행사 끝날 무렵, 겨우 이야기를 꺼냈다. 어쩌면 핑계다. 이야기를 꺼내는데 오래 걸린 진짜 까닭은, 내가 이곳 동료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이직은 결코 이곳이 맘에 들지 않아서, 싫어서가 아니다. 그냥 내 다음 갈 길을 알았을 뿐이다. 이곳 최고 보쓰 A는 (그룹에서 늘 조용한 편인 내가) 정말 강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코로나로 인해 불시착한 듯 입사한 이 직장에서, 오히려 너무 많은 응원을 받으며 자라났다. 나는 그걸 똑똑히 알고 있다.


매번 말로만 드라이브 가자고 하다가, 내 퇴사를 알아버린 팀과 함께 관용차를 타고 북악 스카이웨이에 갔다.



9월 12일

지난 며칠간 부모님 댁 내 방에 있던 짐을 아주 많이 정리했다. 정말이지 그간의 인생을 한 번 정리하는 느낌이 들었다. 가진 옷, 책, 물건들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가만 들여다보니 자리만 차지하지 내 손이 닿은 지 오래된 물건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내게 용기를 준 우리의 미니멀리스트 뽈,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는 곤 마리, 지금의 나에게 새 기회를 주라는 미니멀리스트 유튜버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아빠는 이미 2주 이상 전부터 내가 가져갈 주방 제품을 챙겨서 나를 섭섭하게 할 정도였다. 나는 아빠에게 키우던 화분을 하나 달라고 괜히 졸랐다. 이윽고 박스 서너 개, 캐리어 두 개, 책 짐 두 개, 큰 화분 하나쯤을 차에 싣고 오빠와 엄마가 세종시에 함께 와주었다. 이미 청소 업체가 왔었어도 못 믿을 일이라며 두 사람이 내가 지낼 공간에서 미친 듯이 청소를 시작했다.

같이 지내는 게 힘들다는 티 팍팍 내던 딸내미/동생이 기어이 집을 나간다는 데도, 온 가족이 각자 알아서 팔 걷고 연차를 쓰고 시간을 내서 내 이사를 돕고 있었다. 우리는 이것이 나의 공식적인 독립이 될지 한 번도 제대로 얘기하지 않았고, 못했다. 그럴 용기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청소와 집 정리가 한차례 끝나고 밖에서 저녁을 먹었다. 엄마와 오빠가 차를 타고 출발하고 나는 여기에 남아 그 뒤꽁무니를 보며 손을 흔들어야 할 타이밍이 자꾸만 다가오고 있었다. 밥을 먹는 것인지 그들의 얼굴을 보러 앉아 있는 것인지 모르겠더라.

아직 의자도 없는 방. 쓸쓸함과 슬픔과 두려움과 긴장이 뒤섞인 밤.

뭔가 대단원이 끝나고 있었고

새로운 일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짐싸면서 책이 나에게 생필품이라는 걸 깨달았다.





10월 4일


세종시에서 지도 앱에 코 박고 걷기 일쑤였던 나는 금세 자전거를 배워서 눈에 익은 길들을 빠르게 달릴 줄도 알게 되었다. 자취는 그 어느 때보다 자발성을 필요로 하는 생활이고, 게을러지지 않기 위해 매일 분투 중이다. 새로운 직장에서의 삶은 아직 한참 적응 중.

나는 지금 김포 부모님 집이다. 꽤 긴 추석 연휴를 맞이한 오늘에서야 지난 두 달의 여정을 요약해 쓴다. 더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아예 안 날 것만 같아. 나열만으로도 꽤 숨이 가쁘다. 아빠는 명절 찬스로 이런저런 질문을 해온다. 예전부터 도시재생 뭐 하고 싶어 했잖아, 정확히 무슨 일 하고 있어? 기분이 어때? 특히나 그 연구소에 가서 내가 행복한지 자꾸 확인하고 싶어 한다. 아직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어서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아직 낯설어요. 세종시 집은 환기가 영 안되어서 난감하고요. 전 게을러요.

시간이 좀 더 흐르면 또 이맘때 사진을 보면서 '아아 옛날이여' 같은 생각을 하려나. 내게 설렘은 언제나 낯섦을 동반한다. 낯선 것은 두려움을 자극한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 고통스럽게, 설렘을 찾는다. 그래서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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