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30일 수요일
날씨 : 흐리고 비, 스산함
기록자 : 뽈
런던에 재입성한 날이 8월 31일. 오늘은 9월 30일. 벌써 한 달이 흘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이사와 사내 롤 변경, 텀블벅 오픈, 퇴사와 이직 등 많은 일이 있었는데, 한 번에 몰아 쓰면 너무 장황할 것. 이번 글에선 돌아온 런던에서의 새 거처와 그곳에서 만난 새로운 거인들, 그러니까 ‘동거인들’을 소개할까 싶다.
동네 얘기부터 시작해볼까.
코로나의 습격을 받아 한국으로 일시 도피하기 이전까지 반년 넘게 살았던 동쪽의 ‘뉴햄’을 영영 떠나 이번에 옮겨온 지역은 남서쪽의 ‘로햄튼’. 런던 시내를 중앙으로 둔다면 이 둘은 서로 대각선 정 반대편에 있다. 그리고 떨어진 거리만큼이나 동네 모습과 분위기도 다른 편.
#1
뉴햄은 역사적으로 영국에 막 정착한 가난한 이민자들이 다른 지방으로 떠나기 전 잠시 머물렀던 지역이었더란다. 하여 런던에서 가장 낙후한 지역이자 강력범죄율 2위(살 땐 몰랐던 사실. 나 어떻게 새벽에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다녔지? 무식이 용감ㅎ..)에 달하는 자치구로서 오랫동안 악명을 떨쳤으나, 런던올림픽을 계기로 착수한 도시재생이 이뤄진 지금은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 공원과 유럽 최대 규모의 복합쇼핑몰 ‘웨스트필드’가 들어서는 등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 중이다. 정확히 내가 살았던 곳은 뉴햄의 중심 ‘스트랏포드’에서 도보로 15분가량 떨어진 ‘메릴랜드’였는데, 주민과 동네 상인 대부분이 인도, 파키스탄, 남미 출신 이민자들이다. 해서 주위의 리테일샵과 식료품점, 식당이 취급하는 메뉴나 물품도 주로 이들 입맛과 편의에 맞춰진 편이고, 스트랏포드까지 나가야 프랜차이즈 카페나 서비스 시설을 찾을 수 있다.
한편 로햄튼의 경우는 주민 상당수가 이곳에서 쭉 살아온 가족 단위 백인들이다. 윔블던, 리치몬드 같은 부촌과 맞닿은 지역이라 편의시설이 잘돼있고 치안도 좋은 편이라는 평이 일반적인데, 뭐 그런가 보다. 다른 건 제쳐두고 확실히 좋은 점은 가족 단위 주거단지라서 조용하다는 것과 풀과 나무가 유독 많다는 것. 집에서 조금만 걸으면 런던에서 제일 넓은 공원(집주인피셜)인 ‘리치몬드 공원’이 있고, 꼭 리치몬드가 아니라도 크고 작은 공원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기차역이나 번화가 나갈 때 산책하듯 숲길을 걸을 수 있어서 쾌적하다.
#2
지역뿐 아니라 집과 방의 생김새도 달라졌다.
메릴랜드에서 살았던 집은 삼층 주택. 1층에 부엌, 부엌과 연결된 정원, 화장실과 욕실, 집주인이 사는 싱글룸이 있고 2층에 더블룸이 둘, 3층엔 개인 욕실이 포함된 언스윗룸이 또 둘이다. 코로나가 덮치기 이전 만실이었던 시절엔 총 여섯 명이 한집에 살았다. 내 방은 2층의 아주 널찍한 더블룸이었고.
반면 지금 집은 복도식 맨션이다. 쉽게 말해서 복도식 아파트. 한 동에 총 열네 가구가 산다. 재미있는 점은 각각의 집 내부가 2층 구조라는 것. 예를 들어 우리 집 현관을 열면 바로 왼편엔 내 방, 오른편에 작은 화장실, 정면에 부엌이 있고 부엌문을 들어서기 직전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다. 계단을 오르면 더블룸 둘, 싱글룸 하나, 욕실 겸 화장실 하나가 있는 식. 아파트인데 집에 들어가면 2층으로 나뉘어 있다니까? 나만 신기한가...0_0? 아무튼 내 방은 천장에 계단을 품고 있는 1층 더블룸. 해리포터 방과 닮은 구조인데 쬐금 더 크다. 메릴랜드 시절보다 방 크기가 반 토막으로 줄었지만... 월세도 반 토막이기 때문에 만족. 그래도 옷장이며 책상, 책장 등 필요한 건 갖춰져 있다. 그리고 카펫이 아닌 마룻바닥이지롱, 야호- 창도 튼튼하고(메릴랜드 집 창문 손잡이 너무 연약해서 한번 부숴먹음) 크다.
#3
메릴랜드 시절의 플랏메이트는 모두 또래 한국인이었다. 은행원인 집주인, 워홀러인 나, 나머지 넷은 한인 유학생. 성비는 1:5. 집주인을 빼곤 전부 여성 테넌트였다. 그러나 교류는 제로.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바로 맞은편 방에 살던 사람이나 집주인을 제외한 다른 이들과는 말 한마디 섞은 일이 없다. 내 라이프 사이클 자체가 늦은 밤이나 새벽에 귀가하는 모양새라 부엌 이용 시간이 겹친 적도 없고, 아무튼 얼굴 볼 일이 없었다. 진짜 아주 정말 드물게 마주칠 때면 꾸벅하고 묵례만 하는 사이. 약간 어색하고 딱 그만큼 불편하지만 서로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사는 사이.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친대도 언뜻 봐서는 모르는 행인인 줄로 알고 스칠 사이. 인간미 없어 보일지 몰라도 당시엔 그게 큰 장점으로 다가왔다. 너무 편했다. 혼자 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흡사 자취하는 기분. 혼자라 평화로웠다. 내 몫으로 할당받은 냉장고 칸과 찬장에 온전히 나만 먹는 식재료와 술을 채우고 비우고 다시 채우고 비우는 사소한 일마저 즐거웠고 정원이 바라다보이는 부엌 식탁 혹은 방 창문께에 앉아서 홀로 지내는 모든 시간이 좋았다. 동경만 해오던 ‘나혼산’ 생활을 비슷하게나마 시작했던 때라 그랬던 것 같다.
로햄튼의 플랏메이트는 여러 부분에서 전자들과 반대다. 우선 나를 제외한 전부가 영주권자이고, 성비가 뒤집혀서 나를 제외한 모두가 남성이다. 출신국도 다양하고 또래가 없다. 구이용 연어는 좋아하지만 연어회엔 질색하고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며 일요일 저녁마다 피자를 배달시켜 먹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마흔세 살 M과 요거트와 달다구리, 낫또를 좋아하고 경마와 마작을 즐기며 멘소래담을 찬양하는 일본 출신의 일흔 살 T와 이 집의 주인(은 은행이지만)이자 실온 보관한 소주를 사랑하며 일주일 중 7일을 일해도 행복하다는 남양주 출신의 마흔세 살 L. 이 셋이 나의 새로운 동거인들이다.
#4
오, 물론 여기에도 내 몫의 냉장고 칸과 찬장이 있다. 있지만 사실상 무의미하다. 이 집 부엌에 있는 식료품 대부분은 공공재다. T가 경마 게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단골 가게에 들러 사는 채소와 과일이 늘 식탁 위에 놓여있고 밥솥엔 그가 안쳐둔 따뜻한 밥이 늘 있다. 본업이 셰프인 T와 L의 찬장은 온갖 양념류와 차, 커피로 그득하고 냉장고를 열면 맥주나 T가 좋아하는 제로 콜라가 마를 날이 없으며 냉동고에는 얼린 고기와 얼린 생선과... 이하 생략. 해서 내 찬장에는 파스타면과 라면뿐이다. 정말 먹고 싶은 게 아닌 다음에야 자잘한 식재료를 살 일이 없어졌으므로.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요리가 늘었다고 내심 자화자찬했는데 뭐.. 이 집에서 나는 하룻강아지에 불과하다. 이들 셋이 놀랍도록 요리를 잘해서 일을 다녀오면 웬 치킨 스튜나 빠에야 같은 것들이 부엌에 턱하고 등장해있을 때가 있다. M이 남겨둔 피자도 공공재, L이 해놓은 고기찜도 공공재, ‘2 for 5’를 그냥 지나치지 못해 냅다 사둔 고기로 T가 만든 함박스테이크도 공공재. 그러니까 놀랍도록 먹을거리가 풍족한 집이다. 먹을 게 이토록 풍족한 집에 살아본 적이 없건만. 할렐루야.
#5
이 집에선 내가 가장 과묵한 사람. 세 사람 다 대단한 수다쟁이다. 같이 있노라면 <라떼는 말이야 특집> 끝장 토론 혹은 집단적 독백쇼 방청객석에 앉아있는 느낌이다. ‘라떼는 말이야’, ‘우리나라는 말이야’, ‘너희 나라는 말이야’, ‘영국은 말이야’... 끝이 없어. 재밌어서 계속 듣긴 하는데… 워낙 말들이 많아서 배도 금세 고플 것 같다. 아, 그래서 부엌에 늘 먹을 게 많은 걸까?
#6
T와 L은 동료였다. 나와 그들도 동료였고. 우리는 같은 호텔에서 일했다. 내가 한국에 가 있던 동안 흔쾌히 짐을 맡아준 것도 이들이다. 내가 런던으로 돌아올 즈음 그 집에 살던 다른 이가 귀국하게 되어 방이 하나 비게 됐기에 여차여차 그 방에 들어와 살게 됐다. 메릴랜드에 비해 통근 시간이 한 시간도 더 넘게 늘어났고, 여러 번 갈아타야 해서 번거롭긴 하지만 서울 교통 생각하면 다를 바 없다. 점점 익숙해지는 중이다.
#7
2주에 한 번쯤은 T, L과 함께 한인타운인 ‘뉴몰든’ 나들이를 간다. 고령인 까닭에 외출을 최대한 삼가며(경마 게임장 가는 것 빼고) 코로나를 주의하고 있는 T가 콧바람 쐬는 유일한 날. 그가 좋아하는 카페에서 카푸치노를 한 잔씩 마시고 없는 게 없는 ‘H 마트’에 들러 나는 라면, T는 낫또와 후리가케를 장전한 뒤 M이 좋아하는 김밥과 깐풍기를 사 와다가 다같이 부엌에 둘러앉아 나눠 먹는다. 나는 이 집에서 뭐랄까, 약간 늦둥이 막내아들(왜냐면 딸을 대하는 느낌은 아니거든...) 혹은 조카처럼 여겨지는 듯하다.
#8
그래서일까. 메릴랜드 집에서는 일을 나갈 때, 3분 거리 테스코에 잠시 나갈 때, 잘 때, 심지어 욕실에 씻으러 내려갈 때조차 방문을 잠갔다. 나뿐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했고, 안전상 그게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으므로. 그런데 이 집에선 아무도 방문을 잠그지 않는다. 가장 작은 방에 사는 T는 거의 방문을 열어둔 채 생활한다. 여기 와서도 처음 며칠은 꼬박꼬박 방문을 잠그고 다녔는데 언젠가부터 나 역시 방문을 잠그지 않고 나가게 됐다. 그럼에도 오히려 안전하다고 느낀다. 어색하지 않음을 느낀다. 편안함을, 느낀다.
이 집에서는 얼마나 더 살게 될까.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어쨌든 현관문을 열었을 때 느껴지는 인기척이, ‘다녀왔습니다’란 말을 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 아침저녁으로 안부와 식사를 챙겨주는 이들과 한집에 사는 일이 나쁘지 않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꽤 힘이 된다. 홀로 있는 공간과 시간을 그토록 동경하고 갈구하던 때는 언제고 혼자가 아니란 사실에 안도하다니 우습지만. 이제 와 아무 의미 없는 생각도 종종 한다. 어쩌면 록다운 당시에 나를 영국에서 밀어낸 결정적인 것은 급작스럽게 팔려버린 집도, 유령 도시도, 해고 위기도 아닌 ‘홀로 고립된 나’였던 건 아닐까. 그때 혼자가 아니었다면,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이제 와 아무 의미 없는 생각이지만.
수다 떠는 거인들 사이에 앉아 이 자리를 가만히 관망하고 있노라면, 자리를 정리하고 방에 들어와 잠자리를 정돈할 때면 아무래도 이런 시기에는 역시 혼자보다 함께가 나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거리를 두고 접촉을 자제할 것을 권고받을수록, 역설적이게도 지치지 않으려면 혼자서만으로는 어려운 건가 하는 생각을 한다. ‘함께 이겨내기’. 지겹도록 식상하고 진부한 이 말이 이런 시대에는 여전히 통하긴 한다고, 그러니 전연 부정할 수는 없다고, 어떤 면에선 그저 승복할 수밖에 없다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돼버리는 것이다. 그래. 이런 시대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