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코다테(Hakodate)
경사가 제법 가파른 언덕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홋카이도라 해도 8월 중순에는 꽤 더운 날씨여서, 언덕 끝까지 오르기도 전에 몸에 열이 오른다. 땀이 나기 시작하면 잠깐 걸음을 멈추고 쉬기도 해야 하는, 꼭대기까지 가는 길이 편하지는 않은 곳이다. 하치만자카라는, 러브레터 촬영지로도 유명한 언덕인데 러브레터의 어느 장면에 이곳이 나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언덕 끝에서 푸른 바다를, 양 옆으로 늘어서 초록빛을 더하는 가로수를, 밤이 되면 그 위로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떤 영화에 나왔어도 이상하지 않을 장소라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아주 긴 시간이 주어진 여행자라도 되는 것처럼 느긋하게 걸어 다니며 여행했던 하코다테의 이미지를, 나는 이 언덕 끝에서 바라보던 풍경으로 기억하고 있다.
하코다테(Hakodate)의 밤을 걸으며
홋카이도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것은 꽤 오래된 생각이었다. 아마 처음 그런 소망을 품은 것은 무한도전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그때 방송 제목이 '홋카이도 특집'이 아니라 ‘오호츠크해 특집'이었다는 것은―'오호츠크해 돌고래 떼죽음'이라는 박명수의 파격적인 랩 때문이었던 것 같다―한동안 잊고 지냈지만, 출연자들이 탄 기차가 끝없이 이어지는 설국을 달리는 장면은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한 아이가―아마도 그땐 '아이'가 맞았을 것이다―그 오래된 방송을 시작으로 홋카이도 여행을 꿈꾸다 만 서른 살이 되어서 마침내 기억 속의 그곳으로, 기대와는 달리 한여름에 떠났다고 하면 다소 기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행이란 늘 그런 것이었던 것도 같다. '언젠가 한 번쯤 가지 않을까', '내가 저곳을 갈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반복하다가도, 계획에도 없었던 순간에 갑작스레 오랜 기대를 실현해 버리는 일이 여행인 것이다.
한여름에 홋카이도 여행을 하게 되면서 가장 처음 여행해야겠다고 생각한 도시는 하코다테였다. 홋카이도 여행을 알아보기 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는 듯한, 다소 생소한 도시로 삿포로에서도 기차로 네 시간을 더 가야 하는 곳이었다. 홋카이도에 여러 본 가본 것도 아니면서 처음부터 삿포로나 그 근교 도시가 아니라 굳이 하코다테까지 가기로 한 것은 순전히 그냥 느낌을 따른 것이었다. 도시의 이름이 주는 느낌, 구글지도에 표시되는 도시의 위치와 모양, 인터넷으로 찾아본 사진 몇 장만으로도 목적지를 정하기는 충분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유난히 애착이 생기는 도시가 생기고는 한다. 내게는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지는 노을이 아름다웠던 이스탄불이, 밤을 새우며 거리를 헤매고 안개로 가득한 아침을 맞이했던 에든버러가 그런 도시로 남아있다. 이 여행에서도 그런 도시가 하나쯤 생겼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곳이 될 거라고 나는 하루 끝무렵에 도착한 하코다테의 밤거리를 혼자 오랫동안 걸으면서 생각했다. 차분한 도시의 첫인상이 꽤 마음에 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떤 장소가, 어떤 시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인지는 항상 여행이 끝나고도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야 알게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판단은 조금 더 미뤄두기로 했다.
밤거리를 조금 걸어보니 하코다테는 걸어서 여행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하코다테 자체가 유명한 관광지가 그리 많지 않은 도시기도 했고,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아카렌카 창고나 하치만자카, 하코다테 로프웨이 등이 모두 한 곳에 몰려 있었다. 나는 하코다테 역 바로 앞에 숙소를 잡았는데, 하치만자카가 역에서 20분 정도 거리여서 늦은 밤에 도착한 첫날부터 야경을 보러 밖으로 나올 결심을 하게 된 것이었다.
역 근처에 꽤 늦게까지 하는 이자카야 골목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하코다테는 밤이 길지 않은 도시 같았다. 대부분의 가게나 상점들은 이른 저녁에 문을 닫는 편이어서, 아카렌가 창고 근처는 관광지라고 하기에는 조용한 편이었다. 나는 조명을 환하게 밝혀둔 붉은 벽돌 창고 몇 개를 지나서, 하치만자카 언덕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자정이 가까워 오는 시간에 하코다테에서 하치만자카에 오르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했다. 이따금 차를 타고 지나가거나 잠깐 내려서 구경하는 현지인들이 몇 명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덕분에 언덕 끝에서 조용히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다. 언덕 아래로 항구가, 붉은 조명이 가득 담긴 바다가, 그 위로 밤하늘의 별들이 보였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 낯선 길 위에서 예민하게 깨어나는 감각들. 정말 오랜만에 다시 여행자가 된 기분, 한때 그토록 좋아했던 삶의 한 방식을 잠깐이나마 되찾은 느낌, 그리고 왠지 독하게 느껴지는 그리움 같은 것들이 바람에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