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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Sep 24. 2023

기억에 이정표를 세우는 일

기념일을 챙긴다는 것, 여행을 한다는 것

기억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미로와 같다. 우리는 기억의 어느 지점에서든 탐험을 시작할 수 있고, 그 탐험은 시간을 따라 흐르기도, 시간을 거슬러 반대로 흐르기도 한다. 입구는 셀 수도 없이 많은데 무엇하나 출구가 아닌 끝이 없는 미로가 한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다 영원히 잊어버린 일들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막힌 길이 된다.


인간은 잊어버린 것들을 잊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나머지 길들을 다시, 영원히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인 듯하다. 기억 속에서 길을 잃기도, 불현듯 원치 않았던 길로 빠져들어 한참을 헤매기도 하면서.


홋카이도 오타루의 오르골당에서 판매하는 에코백. 지브리스튜디오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기념품이 많다.


생일을 몹시 중요한 날로 여기는 사람이 있었다. 번거로울 정도로 많은 날들을 챙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념할만한 날이라고 생각되면 무엇하나라도 특별한 일을 만들고 싶어 했다. 특별한 일이라는 게 꼭 거창할 필요는 없었다. 그 사람은 작은 조각케이크 하나를 놓고 어둠 속에서 잠깐 촛불을 바라보는 시간 만으로도 충만한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반대로 나는 대체로 기념일이나 생일 같은 것에 무감각했다. 그러니까 누군가 "스무 살의 생일은 인생에 한 번뿐인 날이잖아."라고 말하면, "매일매일이 인생에 하루뿐인 날이야. 올해 12월의 모든 날이 우리 생에 한 번뿐이야.'라고 대답하는 부류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생일이나 기념일을 챙기자는 말에 구태여 반항한 것은 또 아니었다. 나는 원체 일상에 계획이랄 것이 없는 사람이어서, 내가 호감을 가진 누군가가 무언가 일을 벌이자고 하면 늘 잘 따르는 편이었다. 그래서 20대 내내 많은 생일과 기념일을 쉽게 휘발하지 않을 기억으로 남기게 됐고, 그 기억을 따라 나도 조금씩 변해갔다.


시간이 조금 흘러서 한 발짝 떨어져서, 그러니까 그 생일과 기념일이라는 것들이 지나간 일이 되어버린 지금쯤 다시 돌아보니 그런 날들을 하나씩 챙기는 것이 보다 좋은 삶을 만들어 준다는 것을 알게 됐다. 대학생 때 고생스럽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준비한 선물을 받고 야채곱창 집에서 술을 마셨던 날이 있었고, 그보다 여유가 생겨 마음껏 비싼 고기를 먹고 커다란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사서 축하했던 날도 있었다. 더 시간이 흘러서는 자동차가 생기고 캠핑장에서 생일을 보낸 날도 있었다.  


이러한 하루들은 기억의 이정표 역할을 해준다. 기억 속 행복했던 순간으로부터 먼 훗날이 된 지금쯤 문득 기억 속을 헤맬 때, 내가 그 어리고 좋았던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시간이 어떻게 나를 흘러 지나갔는지 회상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 사라져 버려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기억이 쌓여가는 와중에도 선명하게 그 자리에 남아있는, 우리가 흔히 추억이라 부르는 존재가 된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라는 미로를 탐험할 때면, 의식은 그 '특별한 날'들의 이정표를 따라 흐르며 이곳저곳으로 여행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날을 기념한다는 것은, 복잡한 미로와 같은 우리의 기억 속에 이정표를 세우는 일인 것이다.


홋카이도 오타루, 기차역에서 운하로 내려가는 길




어느 날이든 기억을 헤매는 탐험을 시작하면 항상 '여행하던 나'를 만나게 된다. 그때마다 그런 날도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내 생에도 그런 시간이 있었지, 낯선 길을 헤매도 즐겁기만 했던 순간, 자유로운 선택이 모여 하루가 되던 날들, 하루하루 놓아주고 싶지 않았던 다시 오지 않을 시절들. 기억을 따라 걷는 길은 그렇게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경험들이 모여서 연결된다.


만 나이 통일법이 시행되어 두 번째로 서른 살을 맞이했던 2023년의 기억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볼 날, 먼 훗날 언젠가 그런 날도 올 것이다. 혼자 살아가는 삶에 다시 적응하는 게 참 어려운 일이구나 싶었고, 남은 시간이 두렵게 느껴지기도 했던 날들이 이어질 게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래도 다시 예전처럼 살아보아야겠다고 기어코 혼자 북해도로 여행을 떠났던 한여름의 기억이, 그 어려웠던 날들 가운데 이정표처럼 서있을 것이다.


오타루 운하 근처의 상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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