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남해 여행에서
2년 만에 다시 남해를 찾았다. 첫 번째 남해 여행으로부터는 7년이 흐른 후였다. 눈으로 보는 풍경 만으로 시간의 흐름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았다. 지난 여행에 대한 기억이 완벽할 수도 없었고, 또 도시의 풍경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쉽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로 여행하는 남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독일마을이 있는 가파른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남해의 모습은 불과 2년 전 서른 살의 내가 바라봤던 것과 다르지 않았고, 스물다섯 살의 내가 처음 보았던 풍경과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했다. 같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가장 많이 달라진 것은 그곳의 풍경이 아니라, 그곳에 서 있는 나였다. 사람은, 그리고 한 사람의 삶은 그 삶의 주인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간직하고자 하는 기억에 비하면 너무나 빠르고 쉽게 변해간다.
<상실의 시대>에서 와타나베가 말한 것처럼, 기억이라는 것은 참 이상한 듯하다. 나는 비교적 최근인 2년 전에 한 번, 그리고 꽤 오래 전인 7년 전에 한 번 남해를 왔음에도, 이번 세 번째 여행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오래전 여행의 추억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같은 장소에서 가장 오래된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르고, 그때를 자꾸만 되새기게 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7년 전의 나는 몹시 더웠던 여름의 끝자락에 남해를 찾았다. 그때는 차가 없어서 대중교통으로 꽤 먼 길을 와야 했고, 학생이었던 만큼 여행 경비도 넉넉하지 않아서 택시를 탈만 한 거리도 웬만하면 걸어 다녀야 했다. 여행지에서는 많이 걸을수록 그만큼 길 위에서 헤매는 경험도 많아졌다. 여행을 다녀온 후 시간이 흐르면 왜 항상 어떤 명소가 아니라 낯선 길 위를 헤매었던 기억이 가장 선명히 남는지, 그것 또한 한동안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는 조금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단순히 말하자면 여행의 본질이 다름 아닌 낯선 길을 헤매는 행위에 가깝기 때문이다.
여행은 늘 낯선 감각을 깨운다. 7년 전 남해에서는 일몰을 보러 갔다가 갑작스러운 폭우를 우산도 없이 맞아야 했다. 비는 쏟아지고 하늘은 급작스레 깜깜해져 바다 위의 어느 다리를 열심히 달려 숙소로 돌아가야 했는데, 여름의 두꺼운 빗줄기가 피부를 마구 때리던 때 느꼈던 알 수 없는 짜릿한 감각을 나는 여전히 떠올릴 수 있다. 그렇게 비를 맞고 돌아가서 숙소에서 마셨던 컵라면과 시원한 맥주의 맛도 마치 여전히 떠올릴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먼 길을 가야 해서 차를 얻어 타고 이동했던, 당시 일상에서는 좀처럼 얻기 어려웠던 '낯선 이의 도움을 받는다'라는 기분이 마음으로 전해지던 때, 다랭이 마을의 꼭대기에서 비 내리는 창밖의 풍경이 좋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일부러 놓치면서 해방감을 느꼈던 때, 7년 전의 여행이 여전히 선명히 남아 있는 이유를 찾자면 아마 그런 순간들 때문인 것 같았다.
화창한 날씨를 바랐지만 이틀 내내 비가 내렸다. 다만 그저 맞고 걸을 만한 가녀린 봄비여서 나는 우산 대신 카메라를 들고 오랫동안 이곳저곳을 걸었다. 공기가 무거워서 이따금 무언가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오래전 그날처럼 시원한 폭우를 맞으며 상쾌한 기분이 되는 일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서른의 남해는 무척 화창했고, 스물다섯의 남해는 이틀 내내 비가 내렸었다. 그러니까 단지 날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오래된 기억이 더 선명히 떠오르는 것도, 돌아올 수 없는 시절을 오랫동안 그리워하는 것도, 그리움을 따라 가끔은 울적해지는 마음도, 모든 게 그저 날씨 탓, 그뿐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