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모두 이 세상을 떠났지만 (RIP) SF 문학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3분이 있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A. 하인라인, 그리고 아서 C. 클라크. 이 중에 아서 C. 클라크는 그 유명한 스태린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원작자이기도 하지요.
아서 C. 클라크의 수많은 명작들 중에 저의 대학 시절을 채웠던 책은 <라마와의 랑데부>라는 7권짜리 대하소설이었습니다. 외계로부터 날아온 비행선과의 조우로부터 시작해서 이 우주와 생명 자체에 대한 질문과 대담한 상상까지 펼치는 아주 스케일이 큰 소설이었지요. 생동감 넘치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지금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숨이 막히는, 말 그대로 숨이 막히는 다양한 미스테리와 모험을 선보이기도 하고요. 천문학과 기계공학 뿐 아니라 셰익스피어까지 꺼내는 저자의 넓고 깊은 지식에 감탄을 금치 못하여 (무식한 내 자신을 자책하며) 시간 날 때 마다 다시 읽고 읽고를 반복했던 책입니다. 한 10번은 읽은 듯 합니다.
1990년대 중반에 이 소설을 읽어 제꼈으니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대략적인 기억은 남아있습니다만 세세한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기억을 떠올리려면 제 책장에 꽂혀 있는 누렇게 변색한 책을 꺼내들어야 합니다만, 그 7권의 책 중에서 아직도 기억하고 되뇌이는 문장이 있습니다.
당신의 인생이 끝났을 때 만약 <나는 무언가를 배웠다> 혹은 <나는 사랑했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 또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행복했다>라고요.
사실 이 문장은 주인공이 한 말도 아니요, 이 책의 주된 이야기 흐름에서 중요한 말도 아닙니다. 주인공 니콜이 외계 우주선에서의 생활을 힘들게 꾸려가다가 아버지 피에르가 한 연설을 떠올리며 등장하는 피에르의 말이에요. 그런데,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뭔가 머리를 툭 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건가? 내가 살아가면서 두고두고 생각해야할 무엇인건가? 라마의 창조적인 SF적인 상상과 멋진 줄거리를 따라 가는 걸 잠시 멈추고 생각에 잠겼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로도 살면서 제 안에서 되풀이된 건 물론이구요.
책을 읽다보면 이렇듯 머리를 한 대 치듯이 깨어나는 순간이 생기곤 하는데요.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에서는 이렇듯 사고와 태도에 변화를 주는 책읽기가 필요하다고 얘기합니다. 카프카가 한 말을 인용하며 제목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해놓았습니다.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냐.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
"책은 도끼다" 이 책에서는 저자에게 울림을 주었던 책들을 소개하며 왜 그 책과 작가를 좋아하는 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강의 형식으로 얘기하는 데요. 광고 일을 하는 저자인지라 정말 섬세한 감수성과 창의력이 돋보입니다. 자신에게 의미가 있었던 책들중에서 몇 번이고 곱씹으며 되뇌었던 문장을 인용하며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감상을 곁들이기 때문에 버리지 못할 문장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를 설명해주기도 하고, 중국의 옛 시를 읇기도 합니다.
하루 종일 봄을 찾아다녔으나 보지 못했네
짚신이 닳도록 먼 산 구름 덮인 곳까지 헤맸네
지쳐 돌아오니 창 앞 매화향기 미소가 가득
봄은 이미 그 가지에 매달려 있었네
깊은 울림과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그 책에 온전히 빠지는 시간과 자신의 일부가 필요합니다. 아서 클라크가 제 머리를 친 문장을 요즘 페이스북과 SNS에서 나도는 플래시 뉴스들, 예를 들어 "인생에 대해 깨달음을 주는 10가지 명문들"에서 읽었다면 저는 20년 후에 그 문장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그래서 이 책에서도 저자는 다독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책이 얼어붙은 내 머리의 감수성을 깨는 도끼가 되어야지 그냥 읽었다고 얘기하기 위해서 읽는 건 의미가 없다, 단 한권을 읽어도 머릿 속의 감수성이 깨어나야 한다. 다독의 컴플렉스에서 벗어나라.
하지만 저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컴플렉스를 가져서라도 책을 많이 읽으려는 자세는 필요합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저자처럼 뛰어난 감수성과 창의력을 가지고 읽고 쓰기에 많은 시간을 쓰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많은 회사원들이 그렇듯이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피곤한 몸과 머리를 쉬기 위해서 스마트폰과 패드를 꺼내들게 되지, 다시 나를 긴장시키는 책들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대학 때만 해도 다양한 소설을 가까이 했던 저였지만 회사 생활에 지치면서 책과는 멀어져갔고 경제경영, 자기계발 류의 책들만 간혹 읽게 되었었습니다. 그러다 간만에 읽게 된 재밌는 서스펜스 소설 한 권으로 다시 독서가 시작되었지요. 그 후에 의식적으로 읽은 책을 기록해가며 많이 읽으려 애썼습니다. 1년에 100권의 책을 읽어보자 했지만 실제로는 당연히 그 수만큼 읽지 못했어요. 2015년에는 45권, 2016년에는 64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당연히 그 안에는 정말 긴 시간과 나의 정신을 쏟아야 할 꽉 찬 책들도 있었지만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도 있었고 제목만으로도 익히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자기계발서도 있었습니다. 권수를 채우고자 얇은 책을 선택하기도 했지요 (웃음). 하지만 다시 책을 읽는 것이 조금씩 습관이 되어 가면서 나의 시간과 정신을 온전히 독서에 할당하는 양이 늘어났습니다.
다독은 그동안 안 쓰고 버려놓았던 책을 읽는 근육 - 저는 이를 독근이라 부릅니다 -을 기를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자신에게 재미있고 흥미 있는 책이라면 더 쉽겠지요. 그 근육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책에 대한 식별안도 늘 것이요 소수의 좋은 책을 몇 번이고 읽으면서 자신의 머리를 때리는 도끼를 더 경험하기 쉬워질 겁니다.
책은 도끼다에는 정말 좋은 책들의 내용과 그에 대한 해설과 감상이 들어있습니다. 책 한 권을 버릴 데 없이 아주 꽉 메우고 있지요. 이미 몇 년전에 베스트셀러였던 책이고 후속작 다시 책은 도끼다가 서점에서 다시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더군요. 이 책에서 소개되는 책들을 같이 읽으시면 더 좋겠지요.어쨌든 이 책은 책에 대한 책 즉, 메타 데이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