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끝에 찾아온 원폭
갑자기 저쪽에서, 이쪽에서, 사람들이 운다. 눈 밑을 훔치고, 으흐흐흐 소리를 내며 울음을 참는다. 지상도 무릎 속에 얼굴을 묻었다. 이것이었구나. 나라가 없다는 것이 이런 거였구나.
왜 이 나라에 크고 넓은 사람이 없는 줄 아니? 너 같은 애들이 고자질하고 등 뒤에서 칼 꽂아서 그래. 그게 벌써 몇십 년이다.
조선의 이름으로 태어나 그 산하에서 자랐다. 그래서 고통받았고, 차별받았고, 배고프고 헐벗어야 했다. 오직 조선이라는 것, 그 조국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 때문에. 나라를 잃어버린 땅에서 태어났다는 그것 때문에. 그리고 이제 조선의 아들이기에 죽어가는구나. 조선인이라는 그것 하나로 죽을 때에도 차별받고 경멸당하면서... 버림받는구나.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일본은 헛된 마지막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결국 미국은 그해 8월 6일 히로시마, 그리고 3일 후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이 원폭으로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결국 일본은 버티지 못하고 8월 15일 항복했고, 우리나라는 해방"되었"다.
2016년 5월 27일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을 방문했다. 사죄를 할 것이다 아니다 말이 많았지만 결국 사과의 형태를 띠지는 않았다. 원폭 피해자에 대해 오바마는 이렇게 추모했다.
10만 명이 넘는 일본인 남성과 여성, 어린이들, 그리고 수많은 한국인과 몇 명의 미국인 포로 등 모든 모든 원폭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이 곳에 왔습니다. - 오바마
그 추모사 중에 한국인 희생자를 거론했지만 그 뿐, 오바마는 바로 옆에 자리한 한국인 위령비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일본 군국 주의의 최대 피해자일 뿐 아니라 끌려와서 잠깐 언급된 이 말로 호들갑을 떠는 한국 언론들이 있다. '한국을 잊지 않았다, 한국 피해자들을 동등히 취급했다' 아주 신이 났다. (어느 언론인지는 굳이 얘기 안 해도 될 듯.)
물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스러져간 이들을 추모하는 것 자체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만하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수많은 삶을 유린한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일본에게는 면죄부, 아니 그 비슷한 것도 줄 수 없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 이미 일본 언론들은 기가 오를 대로 올라 사죄 안 한 오바마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사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꽃만 놓으면 다냐. 미국은 가해자이고 일본은 피해자일 뿐이라는 코스프레를 아주 대놓고 하고 있다. '일본 너희들이 감히' 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라온다.
하긴 우리가 누구를 욕할 수 있을까? 1965년의 굴욕적인 한일협정과 2015년의 위안부 협상을 통해서 일본에게 면죄부를 준 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대한민국인데.
일제에 강제 징용으로 끌려간 조선 노동자들 800만 명. 이들은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인권을 유린당했다. 머나먼 타국에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끌려왔다. 임금은커녕 제대로 된 의식주라도 제공받으면 다행이었다. 병신이 되면 고향에 돌려보내 준다는 말에 자신을 자해하기까지 했던 사람들. 죄라면 그저 빼앗긴 나라의 무지렁이 백성이었을 뿐인데.
강제 징용은 일본 전역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나가사끼 주위의 작은 섬 하시마, 그 모습이 바다에 떠 있는 군함 같아서 군함도라고 불리던 그 섬이 소설 "군함도"의 배경이다.
섬을 감싸고 흐르는 급류가 거세어 섬을 드나들기 힘들어서 강제수용과 다름없는 절대 고립의 섬 하시마에서 조선인 징용공들은 해저탄광에서 기약 없는 세월을 보낸다.
하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단지 군함도의 억울한 삶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일제 치하에서 강제로 끌려가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던 보통 사람들의 삶을 생생히 그려낸 작가 한수산의 소설.
친일파의 아들이지만 형을 대신해서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는 주인공,
주인공을 기다리며 서러운 조선 여자의 삶을 사는 아내,
지옥과도 같은 군함도의 갱도 내에서 인간다움을 찾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투쟁하고 탈출하는 징용공 동료들,
돈을 벌기 위해서 군함도의 유곽에서 일하다 징용공과 사랑에 빠지는 조선 기생,
조선은 망했다며 일제의 세력과 같이 하며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는 사람들.
이 모든 인물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손에 잡히듯 일제 치하의 보통 사람들의 삶을 그려내는 소설이다.
그리고 1945년 8월, 나가사끼에 떨어진 원폭은 이 사람들의 삶을 한순간에 앗아갔다. 그리고,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그 수많은 죽음 사이에서도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했다.
그 어떤 압제나 고통, 질곡의 세월도 극심한 고통 속에서 새어나오는 '아이고'나 간절한 마음을 다해서 부르는 '어머니', 이 모국어를 빼앗아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일본인 구호대는 아이고 어머니, 아이고 어머니 하고 울부짖는 조선인들을 결코 병원으로 옮겨주지 않았다. 조선말을 하는 그들에게는 물도, 먹을 것도 주지 않았다. 방공호에서조차 그들은 내쫓겼다. 다친 몸으로 일본인들의 차별과 멸시 속에 버려진 조선인들은 거리에서, 부서진 건물 더미 밑에서, 누군가의 집 처마 아래서, 다리 밑에서, 강가에서 죽어갔다.
김탁환의 소설 '방각본 살인 사건'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소설에 대해서 얘기한다.
"공맹이 남긴 글이 아무리 훌륭해도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 가르침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네. 소설은 독자를 바로 끌어들인다네. 그 안으로 더욱 들어간다 이 말이지. 주인공과 한 몸이 되어 싸우고 사랑하며 한평생을 보내다 보면, 무슨 일이든 그냥 멀리서 구경만 하지 않고 앞으로 나와서 참여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지."
숫자와 건조한 사실이 나열된 역사는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무한도전의 멤버들이 군함도를 찾아가서 그 현장을 보고 눈물을 흘리던 장면으로 군함도는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강제 징용의 대명사가 되었다. ( 내가 무한도전을 그토록 사랑하는 이유 중의 하나 - 예능의 힘을 선한 의도에 쓰는 것)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나라를 잃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 시대의 보통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아내었어야 하는지 그 안으로 더욱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역사의 고통은 모두 그저 결정에 순응하고 다 높은 양반들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생각했던 민초들의 몫이었다. 임진왜란 때도, 일제 시대 때도, 6.25 전쟁 때도, 몇십 년 동안 계속된 독재 때도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그늘에서도. 지나간 역사는 역사다, 뒤로 하고 앞으로의 미래를 같이 만들어가자 이런 건 모두 개소리. 지난 일을 잊으면 역사는 뒤풀이될 뿐이다.
하긴 기득권층은 확실히 배우고 있는 건 맞는 것 같다. 다시는 방심하다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여러 방편을 만드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깨어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역사 교육, 일베, 테러방지법, 법 따위는 아랑곳 않는 무댓보. 그들은 참으로 세심하고 부지런하기도 하다.
우리는 그들만큼 부지런할까? 더 열심히 살고 기억하고 있는 걸까?
우리는 남을 짓밟고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인간답게 살고 싶은 것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