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10월의 일기
“유치원 시절의 나는 다른 아이들이 다 하는 것을 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달력에 스티커를 붙일 때, 나만 스티커를 어디까지 붙여야 하는지 몰랐다. “31까지 쭉 붙이면 돼”라고 다들 가르쳐주어도 나는 31번 칸까지 셀 줄을 몰랐다. 실수하는 것이 두려워서 스티커 한 장 붙일 때마다 “또 붙여?” 하고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했다. 처음에는 “또 붙여도 돼”하고 친절하게 가르쳐주던 친구도 결국에는 화를 내서 내가 울면 선생님이 와서 더 야단쳤다. “못하면 처음부터 한다고 말을 하지 마.” 고작 여섯 살이었다. 무엇을 못하는지조차 모른다.” - 마스다 미리, <성장 속도>, <<전진하는 날도 하지 않는 날도>>
가끔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려본다. 모두가 그렇듯, 어떤 면은 뛰어났는가 하면, 또 어떤 면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부족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부족했다.
국민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학년 단위의 작은 운동회에서 반 대표로 이어달리기를 나갔었는데, 문제는 이어달리기가 어떤 경기인지도 모르고 그저 나오라 하니 나갔던 것이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앞선 상황이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내 차례가 되어 바통을 받고는 운동장을 반대 방향으로 냅다 뛰었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는 일이지만, 그때 선생님이 나를 바라보던 허탈한 눈빛과 타박(“넌 어디가 좀 모자라니?”),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으로 울 것 같던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일본의 에세이스트 마스다 미리의 짧은 에세이 <성장 속도>에 나오는 이 에피소드를 보며, 나는 아주 잠깐이지만 그 에피소드 안에 내가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른 아이들이 어려움 없이 잘하는 것들을 나만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을 때의 창피함과 불안감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일까.
회사에 갓 들어간 초년생 시절에도 그랬다. 기다려주고 가르쳐주는 사람보다는 윽박지르는 사람들로 둘러싸인 것 같았다. 누군가는 농담 반 진담 반 ‘넌 안 될 거야’라고까지 했다. 하나를 알려주면 둘을 까먹는 것 같고, 뒷자리에서 선배가 한숨만 쉬어도 나 때문인 것 같던 날들. 열심히는 하는데 운동장을 반대 방향으로 뛰고 있는 것 같던 날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나를 가로막았던 가장 큰 걸림돌은 ‘창피함’이었다. 내가 이런 간단한 것도 못한다는 창피함과 불안함에 빠져 허우적댔다. 좀 모를 수도 있고, 좀 못할 수도 있고, 좀 물어볼 수도 있는 것인데, 그때는 그게 세상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바보 같게도(!) 할 수 있는 것조차 펼쳐보지 못하고 엉엉 울기만 했다.
서른여덟의 나에게 이제 ‘창피함’이란 어쨌거나 딛고 일어나야 할 무엇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창피하지만 어쩌겠어, 그래도 살아야지. 창피하지만 어쩌겠어, 다음 달 카드값은 내야지(???!!!!). 창피함을 느끼지 않을 순 없지만, 최대한 빨리 잊는 게 최선이다. 지금 15년 전의 나를 만난다면, 빨리 잊고 맛있는 것이나 먹자며 데리고 나가고 싶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누구나 성장 속도가 다르다는 걸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속도 속에서 살아가고 싶다. 하루하루 내 나름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건 맞지만, 뭐 하나라도 약점 잡히지 않기 위해 아둥바둥 살고 싶진 않다.
다음 주에도 창피할 일은 도처에 널려 있겠지? 창피하지만 어쩌겠어, 그래도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