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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야 Jan 15. 2024

임신출산 어플 보다가 대성통곡한 사연

2024년 1월의 일기

임신 16주를 전후로 부모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태어날 아이의 ‘성별’이다. 이 시기가 되면 초음파 사진으로 성기의 유무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임신, 출산과 관련된 어플에 가입을 하니, 비슷한 주수의 부모들끼리 엮어 주는 커뮤니티인 ‘베이비동기 모임방’에 입장할 수 있었다. 임신 초기의 입덧, 신체 변화 등 비슷한 고민을 나눌 수 있어서 1~2일에 한 번씩은 꼭 들어가 보곤 하는데, 어느 시기부터 게시판이 초음파 사진으로 도배가 되기 시작했다.


“딸일까요, 아들일까요?”, “병원에선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시는데, 반전은 없을까요?” 성별을 알고 싶어 하는 간절한 게시글 아래에는 감별사를 자처하는 댓글들이 우르르 달리곤 한다.


처음에는 흐릿한 초음파 사진만 보고도 어떻게 성별을 알 수 있는 건지 신기한 마음에 열심히 들여다보기도 했는데, 그렇게 수일이 지나면서부터는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거의 98~99%의 부모가 딸을 원하며, 아들임을 확정(!)받았을 때 실망감을 숨기지 못하는 반응들을 확인하고서부터였다.



딸을 선호하는 시대를 보며 나는 왜 씁쓸한가


나는 86년 범띠의 해에 태어났는데, ‘범띠 딸을 낳으면 기가 세고, 팔자가 드세다’는 이유로 여아 낙태가 특히나 더 성행하던 해였다(성비 통계로도 증명된 바 있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지만, 특히나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커온 나와 여동생은 일가 친척이 모이는 날이면 ‘고추를 달고 태어났어야 했는데’, ‘딸은 어차피 남의 식구’라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듣곤 했다(아들이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농경사회의 영향이 아직은 남아 있던 시대였기 때문일까. 엄마는 한편으로 내가 딸이어서 집안의 관심과 부담을 덜 받고 클 수 있었단 이야길 들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모진 말들을 듣고도 ‘딸도 아들 못지않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커야 했다.


그로부터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딸을 낳고 싶다’는 부모가 더 대세가 된 상황이 되다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나는 이러한 변화가 달갑게만 느껴지진 않는다. 딸을 낳고 싶다는 욕망의 기저에서 ‘아들보다는 살갑고 사랑스러운 딸’이라는 도식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딸을 선별해 낙태하던 시절보다야 훨씬 진일보했지만, 살갑고 사랑스러워야 한다는 것 역시 딸들을 옥죄긴 매한가지다.



어느 날 아침 대성통곡한 사연


이제는 시간이 흘러 인증글의 홍수 속에서도 ‘그러려니’의 정서를 유지할 수 있게 됐지만, 베이비동기 모임방에서의 ‘성별 감별’ 인증이 꽤나 스트레스이던 어느 날 아침에는 파트너에게 이 이야기를 하다가 엉엉 대성통곡을 한 적도 있다. 딸이든 아들이든 본인들의 육아관대로 키우면 될 것이지, 왜 이렇게 딸에 집착들을 하느냐고. 


지금 생각하면 이게 그렇게 대성통곡을 할 일인가 싶고, 그 장면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사실은 꽤나 진지하게 생각해야 될 일이기는 하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나는 파트너와 육아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가 함께 키울 아이가 다정다감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이로 컸으면 한다. 하지만, 우리의 바람과 달리 다정다감과는 거리가 먼 성격의 아이일 수도 있고, 겉으론 무뚝뚝해 보이지만 속은 깊은 이로 클 수도 있을 터다. 양육자인 우리를 좋아해주고 잘 따라주면 좋겠지만, 그 아이가 보기에 우리가 많이 부족하거나 자신의 성향과 잘 맞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우리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독립된 자아를 유지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아이와의 심리적 거리 조절을 잘하는 부모가 되자고 다짐해 보기도 한다.


물론 아직까지 눈앞에 나타나지 않은 존재를 상상하며 하는 바람과 다짐이기에, 내가 이렇게 할 수 있으리라 백 퍼센트 장담할 순 없다. 미래의 내가 언젠가 이 글을 읽으며 코웃음 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끝내 지키고 싶은 건 이 아이가 사회가 정해 놓은 ‘여자다움’, ‘남자다움’에 갇히지 않게 돕는 방식으로 양육하고 싶다는 마음이다.


출처: unsplash



여자다움, 남자다움에 갇히지 않을 수 있길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성별 이분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육아를 하고 싶어 하는 양육자가 우리뿐만은 아닐 것이다. 다들 각자의 육아관을 바탕으로 각고의 노력을 다하지만, 가정에서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쉽지 않다는 이야기도 숱하게 들었다. 


만약 우리 아이가 딸인데 유치원에 다녀온 후부터 또래 친구들을 보며 ‘공주 같은 치마만 입고 싶다’고 요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반대로 만약 우리 아이가 아들인데 ‘남자는 울지 말아야 한다고 들었다’고 애써 씩씩한 척을 하려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상상력이 풍부한 대문자 N 양육자들은 벌써부터 고민이 많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강요할 순 없을 것이다. ‘공주 같은’ 치마를 입는 게 그의 솔직한 욕망이라면, 그것이 나쁜 것도 아닐 터다. 다만, 다른 가능성을 바라볼 수 있도록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싶다. 딸에게는 다양한 옷을 입은 여성의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고, 아들에게는 우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며 솔직하게 감정 표현을 해주어 고맙다고 보듬어주고 싶다. 딸의 몸에 흉이 지더라도 아픔을 이겨낸 멋진 상처라고 북돋워주고 싶고, 아들이 운동을 두려워한다면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도 충분하다고 알려주고 싶다. 다행히 나와 파트너는 주어진 성역할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불화하는 이들이었기에, 우리의 경험을 들려주는 방법도 있겠다. ‘여자다움’, ‘남자다움’은 임의로 정해진 틀일 뿐이라고, 그걸 뛰어넘는 게 정말 멋진 일이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남는 고민들


여자다움, 남자다움을 뛰어넘어 자유롭게 자기다움을 탐색해 볼 수 있는 아이로 키우고자 하지만, 그럼에도 성별을 떠나 생각하기 어려운 지점들도 분명 존재한다.


특히, 여성에 대한 혐오범죄가 만연한 현실 속에서, 딸을 키우는 양육자들이 갖는 공포에 감정이입을 하게 될 때가 많다. 지난 해, 실제 딸을 양육하는 동료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다. 동료는 혐오범죄 뉴스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나는 걸 멈출 수가 없다고 했다. 나 역시 동료의 입장이었다면 그랬을 거라고 했다. 동료는 나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눈물을 몇 번이나 참으며, “그렇지만 그런 공포 때문에 우리 딸이 더 큰 세계로 나가지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건 더 슬플 것 같다. 만에 하나 어떤 일이 그에게 닥치더라도, 그에 맞설 수 있을 만큼 강한 딸로 키우고 싶다”는 말을 들려주었는데, 그 말에 나도 왠지 울컥했었다.


‘세상이 위험하니 일찍일찍 다니고 몸 조심해라.’ 얼마나 숱하게 들었던 말인가. 이런 말을 해야 했던 당시 부모들의 마음도 이해는 가지만, 이 말은 얼마나 많은 딸들을 움츠리게 했는가. 우리의 아이가 딸이라 하더라도, ‘세상이 위험하니 (알아서) 몸 조심해라’라는 말을 하고 싶진 않다. 그보다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지, 그걸 침해당했을 때에는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싶다.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주변에 도움을 청하는 편이 더 안전한 방법이란 걸 알려주고, 우리가 든든한 지원자가 될 수 있음을 어필하고 싶다. 


반대로 아들을 키우는 양육자가 된다면, “No means No”의 의미를 알려주고, 극도의 소유욕과 통제욕을 사랑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제대로 알려주고 싶다. 성애적 관계를 뛰어넘은 우정의 소중함에 대해 같이 이야기 나누고 싶고, 어느 한 욕망에 치우친 포르노가 아닌 다른 장르의 포르노도 세상에 존재함을 알려주고 싶다.


이 이상적인 바람들을 실현시킬 수 있을까? 물론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양육에 지치고 세상 풍파에 휩쓸릴 때마다 돌아와야 할 곳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이 글을 다시 읽고 또 읽으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기를. 


* 이르면 이번 주말, 늦어도 1달 내에는 우리도 아이의 성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가 지양하는, 그리고 지향하는 육아법에 대한 이야기를 더 구체적으로 많이 나눌 수 있겠지. 우리가 고통받아야 했던 '여자다움', '남자다움'의 틀을 던져버릴 수 있는, 그런 신인류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기쁨을 받아안을 수 있는 날이길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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