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의 일기
요즘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4살 된 조카와 영상 통화하는 빈도가 높아졌다. 어린이집에 다닌 후로 제법 말이 많아진 조카는 나를 전화기 앞에 세워놓고 이런저런 수다를 떨기도 하고, 블럭이나 자동차를 이리저리 조립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아직 굳은살도 잡히지 않은 두부 같은 작은 손으로 장난감을 만지작만지작 하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집중하느라 미간에 살짝 잡힌 주름도 한참을 넋놓고 보게 된다.
그렇게 조카가 노는 것을 보다 보면, 잠시 잊고 있던 어릴 적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기도 한다. 엄마가 야쿠르트병에 담아준 퐁퐁 비눗물로 하루 종일 비누방울을 불어대던 기억, 지천에 널려 있던 풀을 돌로 찧고 놀다가 손이 초록빛으로 물들던 기억, 동네에 핀 나팔꽃을 바라보며 동생과 노래부르던 기억… 어른들의 입장에선 지루하게 반복되던 하루였겠지만, 아이들에겐 하루하루 새로움, 놀라움으로 채워지는 하루였겠지!
새와 나비를 볼 때나, 길가에 지천인 풀을 볼 때나 그저 신기해하고 즐거워하는 조카를 보며 괜히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비행기를 타고 멀리 여행을 나가서야 느끼곤 하는 즐거운 기분을 이 아이는 매일 일상에서 느끼고 있구나.’ 아이는 이 세계에 새롭게 여행 온 ‘여행자’일 수 있겠다. 이 귀여운 여행자들의 일상을 따라, 양육자인 내 일상도 좀 더 다이내믹하고 스펙터클해질 수 있을까?
임신 17주에 들어서며 배가 조금씩 불러오기 시작했다. 몸이 더 무거워지기 전에 이런저런 물품을 사고, 환경 정비를 해야 할 텐데… 몸은 더디고 마음은 급하기만 하다.
10년 가까이 둘만 살아오던 우리의 공간에 새로이 손님을 맞이한다고 생각하니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딱딱 떨어지는 각이 마음에 들어 들였던 가구들이 이제는 위험천만한 물건으로 보이고, 평소엔 못본 척 스윽 넘겼던 온갖 먼지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문틈이나 콘센트에 아이가 손을 대지는 않을지, 부주의하게 둔 칼이나 식기류에 아이가 다치지는 않을지 찰나의 상상만으로도 식은땀이 난다.
집 안도 이럴진데, 집 밖은 얼마나 위험할까. 보도블럭 깨진 곳, 육중한 무게의 가게 문, 관리가 안 되어 삐죽삐죽한 나뭇가지 등 요즘 내 눈엔 온통 위험한 것 천지다. 아이가 넘어지고 다치는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하루는 나의 엄마에게 “엄마, 나 너무 무서워서 아이를 못 키울 것 같아”라는 토로를 할 지경이었다. 엄마도 원체 겁이 많아서 우리가 다치진 않을지 걱정이 많이 되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두려운 티를 내지 않고 우리를 대할 수 있었을까. 20대에 이미 엄마였던 엄마가 새삼 대단하게 보인다. 엄마는 진정 ‘프로’였다!
아이를 따라 나도 재밌는 일상 여행을 하고 싶었는데(!), 현실은 여행자가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가이드 역할만으로도 벅찰 듯하다. 어떤 가이드가 될 것인가. 패키지 여행이 안전을 무시한 채 마냥 즐겁기만 해도 안 될 것이고, 반대로 마냥 ‘안전’만을 강조해도 지루하겠지. 즐거움과 안전을 모두 갖춘 그런 여행을 우리의 귀한 손님에게 선사할 수 있을까?! (우리의 여행자는 그의 엄마와 아빠를 닮아 분명 불만이 많을 텐데 말이다)
(우리의 부모가 그러했듯) 여행길에서의 다양한 리스크에 대해 미리 준비는 하되, 우리의 두려움을 아이에게 드러내지는 말자고 다짐해 본다. 넘어지는 아이의 뒤통수에 ‘너 그럴 줄 알았다’는, 아이의 상처를 헤집는 말을 던지지는 말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면 그만이다. 넘어진 슬픔과 아픔에 하루를 다 망쳐버리는 대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즐거운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여유를 알려주고 싶다.
여행 가이드로서 양육자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 우리가 안내하는 여행 코스에 만족해하는 것을 넘어, 여행 스킬을 익혀 배낭 여행을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 아닐까? 우리의 첫 여행 손님이 여행을 진정 즐길 수 있는 베테랑이 된다면 얼마나 기쁠까(나 또 울고 있니…). 이 상상만으로도 나는 이미 20~30년의 시간 여행을 한 것만 같은 느낌이다.
한때는 겁없던 여행자로 살아오던 내가 이제 그 위태로운 여행을 곁에서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입장이 된다니. '너 같은 딸/아들 낳아 보라'는 악담 아닌 악담이 현실화되지 않기만을 기도하면서도, 세상에 다시 없을 용감하고 호기심 많은 여행자를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 뜨거운 여름에 어서 만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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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후 빨리 일터로 복귀하는 것이 희망이고 목표이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어느 한 명은 전업 양육을 하게 될 가능성도 있겠거니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다. 그럴 때면, 전업 양육자인 내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기도 하고, 어디에서 내 직업적 정체성과 소속감을 느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만약 우리가 전업으로 아이를 길러야 하는 시간이 온다면, ‘여행 가이드’로서 직업적 정체성을 찾아보는 것도 괜찮은 선택지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좀 더 적극적으로 나의 정체성을 탐구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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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망상은 잠시 접고, 집 안의 가구부터 다시 정비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