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정과 고요함
6월부터 꾸준히 운동장을 달리는 거리를 늘려왔다. 그만큼 조금씩 체력은 붙고 있다. 일상에서 움직이는 양도 늘었으며 집안일도 더 부지런히 하고 있다. 밖에서 막일을 하는 횟수도 늘었고 이래저래 몸으로 소비하는 열량이 늘었다. 그래서인지 생각이 단순해지고 있다. 감정의 기복도 적어지고 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머릿속이 잔잔해졌다. 내 속에서 대립하고 싸우던 감정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이것도 어쩌면 아주 잠시의 상황일 수 있다. 평온하지만 약간 맥 빠진듯한 이 기분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니 말이다.
몸이 소비하는 열량이 많아지니 자연스레 감정이 폭발적으로 소비할 에너지가 부족해지면서 나타나는 현상 같다. 주변의 자극에 덜 예민해지고 있다. 공백과 여백을 넘어 내가 약간 무디어졌다는 느낌이 든다. 아마 몸 자체가 주변 상황의 변화에 맞추어가는 중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적응 현상 같다. 그런데 이런 것이 괜히 낯설다. 아마 글을 지속적으로 쓰지 않았으면 이런 것을 정확히 인식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또한 반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냥 피곤하다고 느끼고 빨리 쉬고 싶다는 생각에 일상을 적당히 마무리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글을 꾸준히 쓰다 보니 이런 상태가 된 이후에는 글 역시 갑자기 무디어진 느낌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내면에서는 별다른 이야기가 생겨나지 않는다. 그냥 고요한 곳에 혼자 앉아 차분히 무언가를 주시하는 느낌이 지속된다. 그냥 지금은 모든 게 편하다. 어떤 것에도 크게 날을 세우고 싶지 않다. 그래서인지 더욱더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냥 계절과 계절 사이의 환절기처럼 나의 상태가 특정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느낌만 어렴풋하게 들뿐이다. 그래서 나 자신도 이어지지 않는 생각을 억지로 더 해볼 욕심은 없다. 단지 맘이 평온한 것에 이렇게까지 어색함을 느끼는 나 자신이 생소하다. 아마 며칠 더 이 상태가 지속되면 글 자체를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에서 더 불편해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으므로 글쓰기에 집착하는 내가 어떤 면에서는 재미있다.
올해는 정말 많은 것을 새롭게 경험하는 한 해이다. 내적으로 쌓여있던 감정이 휘몰아쳐 나를 완전하게 무력하게 만들었던 한 해이며, 그 속에서 정말 죽을 것 같은 불안과 공포도 생생하게 맛보았고 나 자신이 철저하게 무너지는 감각 속에서 인간이 이렇게까지 무기력해질 수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던 감정적 고비도 분명히 있었다. 내가 왜 그런 감정의 소용돌이로 휘말려 들어간 것인지 특정한 이유를 하나로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겠지만 결국 그런 것도 하나의 기폭제 내지 도화선이었을 뿐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내가 오래전부터 쌓아온 ‘불안’이 이제는 나를 완전히 압도할 만큼 거대해져 버렸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 상태를 무시하고 지나치면 언젠가 또 특정한 사건이나 상태에서 나는 또 같은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도 지금같이 운 좋게 그런 상태를 탈출할 수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잠시 평온해졌다곤 하지만 내 상태가 궁극적으로 좋아졌다는 느낌은 없다. 언제나 잠재적으로 폭발할 가능성이 있는 시한폭탄을 내 안에 내재한 채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더 꼼꼼하게 기록하고 나를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원래 조금은 들쭉날쭉한 기복이 있었지만 내 감정이 이렇게까지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다행히 감정이 왜곡된 인식과 만나면 더욱 고조되어 나를 완전히 망가뜨릴 수 있다는 것을 이번에 잘 배웠으니 좀 더 차분하게 나의 인식체계 전반을 되돌아볼 계기로 잘 활용해야 할 것이다.
기억, 감정, 인식체계 그리고 글쓰기 이것들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 것인지 아직 분명한 연관성과 사용법을 알지 못한다. 글쓰기가 내 전부는 아니지만 분명히 삶의 뼈대로 방향성을 세우는 데에는 큰 몫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그냥 덮어놓고 쓰기 시작했던 처음과 지금은 글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도 모두 다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꾸준하게 쓰기 위해 노력하는 것 말고 다른 구체적인 방법은 잘 모르겠다.
무언가 텅 빈 것 같은 허전함. 그래서 멍하게 편안한 느낌… 그 속에서 흔들리는 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힘들기도 했지만 몰아치는 감정 속에서 생생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서툰 글솜씨로 옮겨 적는 것이 그냥 너무 재밌기도 했었다. 그런 식의 경험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나의 글쓰기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조각을 모으고 하나의 세계관을 만들어 그 속을 생생하게 누비는 감각은 그 전에는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그런 경험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아직 제대로 마무리한 것도 없는데 그 세계에서 쫓겨나 듯 밀려 나온 것 같아 뭔가 아쉽기는 하지만 이제는 내실을 닦으면서 또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하는 구간인 것 같다. 나의 글쓰기는 분명히 계속되고 또 변화할 것이다.
나에 대해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많다. 이제는 그런 것들을 하나씩 정리해 둘 시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