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모스에서 찍은 마지막 사진 두 장을 올린다.
인구가 3천 밖에 안되는 작은 섬에 저런 크루즈 여객선이 입항하면 섬 전체가 오염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UFO에서 내린 것 같이 다 똑같이 생기고 똑같은 냄새를 풍기는 이상한 사람들이 거리를 휘젓고 다닌다.
그러나 너무나 아름다운 보름달이었고, 우리는 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그리스 천문학자 히파르쿠스를 이야기했다. 히파르쿠스 이야기는 너무 길어져서 아래에 나누어 담는다.
아버지는 50년대에 돈암동에서 살았다. 그 가난한 시절, 서울은 오늘날 아테네와는 달리 높은 건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편평한 동네였다. 할아버지와 함께 돈암동 성당에서 저녁미사를 보고 돌아오는 아버지는, 시야 한편에서 둥글고 밝은 달이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달은 원래 한자리에 박혀있는 것 아니던가? 그런데 앞으로 걸어나가면 달도 같이 앞으로 움직이고, 움직이기를 멈추면 달도 제자리에 멈춰섰다. 약간의 무서움을 동반하는 호기심, 어린아이 특유의 질문이 발생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왜 달이 쫓아 오느냐는 물음에 철학자였던 할아버지는 “너무 멀리 있어서 그렇단다”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물론 그 답변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어린아이였던 아버지가 철학을 업으로 삼았던 할아버지보다 훨씬 더 철학자였던 순간이었고, 달은 집에 가는 길 내내 아버지의 마음을 쫓아왔다.
이 일화가 재미있는 이유는 우리 모두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든지 어린 시절은 소박한 놀라움과 명랑한 의문으로 가득차 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던지는 모든 터무니없는 질문에 대해 정해진 답을 내놓거나 얼버무리지만, 어쩐지 만족스럽지가 않다. 마음 한구석에는 최초에 대면한 놀라움의 빛깔이 남아있다. 시간이 지나고 우리의 키와 머리가 커지면서, 그 놀라움은 차츰 퇴색되고 잊혀지기 시작한다. 모든 질문은 정돈되고 해답을 부여받아 각자 맞는 서랍에 수납된다. 하지만 놀라움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내가 만들어 놓은 세계 전체가 뒤흔들리는 사건이 생길때, 말하자면 마음의 방에 지진이 찾아올때, 서랍들은 제멋대로 열리면서 질문들을 다시 토해낸다. 갑자기 나는 왜 살아야하는지 모르고, 왜 밤과 낮이 뒤바뀌는지 다시 모르게 된다. 철학이 찾아온 것이다.
철학이 찾아오건 말건, 달은 여전히 신비로운 존재였다. 아버지가 생각을 시작했다. "질량이 지구의 8분의 1이나 되니까, 우리에게 대단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름달이 저렇게 머리 위에 떠 있으면 실제로 피가 그쪽으로 좀 몰려서 정신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밀물처럼 말이야" 나는 실제로 광증을 뜻하는 lunartic이라는 단어가 달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
크루즈에서 내린 사람들이 거리를 너무나 시끄럽고 향수냄새 나는 곳, 발로 걸어다니고 땀을 흘리면서 여행하는 법이 잊혀진 곳으로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 아마 순간적으로 섬의 인구가 20% 정도 상승했던듯 하다 -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걸어서 섬을 횡단하여 악의 무리로부터 도망쳤다. 섬의 가장 가느다란 부분이 800미터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대편 해변에 당도하자 노을이 무지개처럼 수평선을 전부 물들이는데, 건너편에 육지가 보였다. 그리스의 섬들에서는 항상 다음 섬이 보인다. 이 세계는 유한하고 물로 둘러싸인 곳(탈레스)이지만, 저 멀리 안광이 닿는 곳에는 항상 다음 우주가 있다. 유한과 무한은 바다를 향한 시선 속에서 교묘하게 마주친다. 그리스인의 우주다.
우리는 저 섬이 내일 가게 될 사모스일 것이라 생각했으나, 지금 지도를 찾아보니 이카리아 섬이다.
다음날 아침 배가 들어왔다. 섬과 섬 사이를 오가는 상당히 작은 배였다. 갑판에 있는 의자가 오래된 나무의자였고, 지겨운 표정을 한 젊은 군인들이 잔뜩 타고 있었다. 그리스는 어딜가나 군인들이 있다. 우리나라처럼 2년의 병역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총을 들고 있기 귀찮아서 군장 속에 쑤셔넣어 둔 것을 보고, 한국의 군필자 2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파트모스의 스칼라 항을 빠져나오는 모습을 잠깐 동영상으로 담아보았다.
3시간 반의 항해 끝에 도착한 곳은 사모스 남부의 항구 피타고레이오였다.
이름부터 피타고레이오고 여기는 그리스이기 때문에, 이 섬은 당연히 피타고라스가 몸소 오랜 시간 머물렀던 곳이다. (동상에는 "사모스인 피타고라스"라고 되어있지만 여기서 태어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동상을 보시고서 "직각에 미친 사람들" 이야기를 하셨다. 수학적 지식은 고대 바빌로니아나 이집트에서 이미 몇천년 이전부터 축적되고 있었다. 그러나 증명이라는 - 아버지 말을 빌리자면 "이상한" - 형식을 개발한 것은 그리스인이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증명한다고 해서, 세상에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심지어 직각 삼각형은 자연에 존재하지도 않는 형태이다. 증명을 도입함으로써 달라지는 것은 우리가 자연을 바라보는 형식이다. 그리스식으로 체계성을 갖춘 수학을 통해서, 우리는 자연에 기하학적인 구조를 덮어씌운다. 그리고 이렇게 상정된 자연의 수학성을 기반으로 측정을 한다. 위에서 보름달을 보면서 이야기했던 히파르쿠스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히파르쿠스(기원전 189년 출생)가 던진 질문 중 하나는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는 얼마인가?”였다. 할아버지의 철학적 물음에 아버지가 직관적으로 옳게 대답하셨던 것처럼, 달은 너무 멀리에 있기 때문에 육안으로 거리를 측정할 수가 없다. 우리가 눈대중으로 거리를 맞출때 우리는 양쪽 눈에서 보이는 영상의 차이, 즉 시차視差를 통해서 파악한다. 달과 같이 먼 물체의 경우에는 양쪽 눈이 보는 영상의 차이가 없다. 히파르쿠스의 생각은, 말하자면 눈과 눈 사이의 거리를 아주 멀리 늘리면 시차가 생길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미간이 얼마나 넓어져야 달의 거리를 알아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은 현대인의 미적기준에는 조금 걸리적거리는 질문이겠으나, 실제로 실행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는 혁신적이었다. 히파르쿠스는 전대의 기록을 참고하여 헬리오폰트에서 개기일식이 일어났던 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4/5의 부분일식밖 에 일어나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태양을 가리는 달이 각각 다른 각도에서 보였던 것이다! 두 도시를 두 눈 삼아 계산한 결과, 히파르쿠스는 달까지의 거리가 지구 반경의 70배 가량 될 것이라는 상당히 정확한 결과를 내놓았다.
고대의 정신세계에 비추어보았을 때, 히파르쿠스가 던졌던 정말로 어린아이같은 질문이거나, 달의 여신 셀레네에 대한 신성모독이었다. 과학 이전의 세계에서 해와 달은 “저기까지의 거리가 어디인가?”라는 질문이 해당하는 범주가 아니었다. 내가 사는 집에서 제우스 신전까지의 거리는 측정할 수 있다. 저기 멀리 보이는 섬까지의 거리도 정확한 측정은 어렵지만 질문할 수는 있다. 하지만 “달까지의 거리는 얼마인가?”는 마치 독실한 기독교인이 “천국까지의 거리가 얼마인가?”나 “영혼의 무게는 몇 그램인가?”라고 묻는 것과 같아서, 겉으로만 질문의 형태를 갖췄을 뿐이지 용인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것은 질문의 문법에 맞지 않는 질문이다. 그러나 히파르쿠스는 “달은 무엇인가?”라는, 우리 삶과 대단히 많은 층위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오래된 질문을 수량화된 정답이 존재하는 간단명료한 질문으로 변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달은 더 이상 잠과 이슬을 가져다 주고, 바다와 여성의 몸에 변화를 일으키는 신비로운 힘이 아니었다. 문명과 이성의 세례를 받으면서, 한때 신성했던 달은 거대하고 차가운 돌덩어리로 변해있었고, 그럼에도 히파르쿠스는 경이를 멈추지 않았다. 이성을 발견한 그리스인은 자신 안에서 모순을 느꼈을까?
다음날은 잠시 생각을 멈추고 걸어다니기로 했다. 유배지로 쓰였던 아름답지만 척박한 파트모스와는 사뭇 다른 곳이었다. 사모스는 로마 황제들이 즐겨찾던 휴양지로, 클레오파트라도 이곳에서 바캉스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소문대로 사방에 큰 나무들이며 풀밭들이 있어서 마음이 넉넉했다. 해변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웠고, 내륙은 대체로 올리브 밭 (그냥 몇백년 된 올리브 나무들이 몇백년 전처럼 우두커니, 주르르 서 있는 곳을 말한다)이거나 숲이었다. 풍요로운 곳이었다. 이 풍요로움에서 철학이 나왔을 것이다.
산을 걷다가 옛날에 극장이 있던 유적지 주변에서 아버지와 "인공물 찾기" 놀이를 했다. 아무데나 파면 유적이 나오는 그리스이니까, 우리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어릴때 형이랑 아버지랑 비슷한 놀이를 많이 했던 기억이 났다. 아버지는 이제 일흔을 넘으셨지만, 나와 함께 어린아이처럼 돌더미를 뒤지면서 글자 한글자라도 새겨진 돌을 찾아 헤맸다. 이십 분 가량 찾다가 허탕을 치고 내려오는 길, 오래된 오두막 벽에 우리가 찾던 "인공물"이 덩그러니 박혀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스어가 적힌 것으로 보아 로마시대 이전의 유물(최소 2천년 된..)인 것 같은데, 염소치기가 머무는 소박한 오두막 벽을 이루고 있었다. 거꾸로 박혀 있어서 왜 그럴까 생각했는데, 역시 아버지가 무언가를 알고 계셨다. 이슬람 지역에 가도 그리스 시대 유물이 후대의 건물에 사용될 때는 반드시 이런식으로 거꾸로 박혀있다고 한다. 과거를 뒤집어서 현재를 짓는 방식이다. 역사 속에서 자신을 규정하는 인간에게 과거는 부정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온전히 긍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기억과 자아, 둘 모두가 사라지지 않도록, 우리는 과거의 유물을, 과거의 사상을 고이 뒤집어서 쌓아올리고는 그 안에서 산다. 그게 산등성이에 선 초라한 오두막이라고 해도 말이다.
차를 빌렸는데 아이러니하게도 10년도 넘은 현대 "아토스"였다. 아토스는 물론 그리스의 지명인데, 그 이름을 단 한국 차를 오늘 우리가 그리스의 어느 섬에서 타고 있다. 대여료는 하루에 35유로였다.
차를 타고 헤라이온, 즉 예전 헤라 신전이 있던 곳에 도착했다. 내가 거인은 아니지만, 아무튼 내 사이즈와 비교해보아도 거대함이 느껴진다. 기원전 6~3세기 사이에 건축된 헤라 신전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 결코 뒤지지 않는 - 아마도 조금 더 큰 - 규모였다. 주 신전의 한변 길이만 100미터다!
헤라 여신은 이곳 사모스의 헤라이온에서 "태어났다". 신이 태어난다는 것, 태어나지만 죽지는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그리스적인 생각이다. 헤라 여신의 숭배는 기원전 16세기 경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스 반도에서 아티카 문명이 전파되고, 헤라가 고작 제우스의 부인으로 강등되고 정의되어 신들의 계보에 편성되기 전, 그들이 섬겼던 헤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신을 태어나게 한 이곳의 자연은 그 당시 얼마나 강대했을까? 알수가 없는 일이다. 전혀 알 수가 없어서, 상상조차 할 수가 없어서, 마음이 오히려 넓어졌다.
호텔에서 햇빛을 피하면서, 그리스의 신을 생각하는 글을 끄적여보았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을 필두로 하는 유일신교 신앙체계에 익숙하기 때문에, 다신교의 세계를 상상하기가 어렵다. 유일신교의 신은 필연적으로 추상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시나이 산에서 모세 앞에 나타난 야훼신은 불타는 가시덤불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모세는 그 앞에 바짝 엎드려서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유대교에서 두눈으로 신을 직접 본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야훼신의 천사가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낼때, 세 쌍의 날개로 손과 발과 두눈을 가리고 나타난다. 신성함은 만질 수도 눈으로 파악할 수도 없는 것이다. 신은 이처럼 모든 감각을 초월하는 것이기에, 아브라함 계열의 세 종교들은 모두 각자만의 방식으로 신의 그림을 그리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이슬람의 종교세계에서는 아예 그림과 영상을 이용한 담론이 부재하며, 그리스도교에는 신에게 어떤 속성도 부여하는 것을 금지하는 소위 부정신학이라는 해석전통이 있다.
그리스 신들에게는 이러한 초월적 면모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무속신앙의 여러 귀신들처럼 영매를 통해서만 인간과 교류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들도 아니다. 그리스의 신은 극도로 강화되고 승화된 인간의 모습이다.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의 중심에 있는 제우스(포세이돈) 청동상을 보면 그 구체적인 강대함에 전율을 느끼게 된다. 신은 완벽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거대하고 강인한 “몸”을 가지고 있다. 청동으로 된 신의 머리카락과 풍성한 수염에는 어마어마한 생명력이 깃들어 있다. 그는 오른손에 번개(또는 삼지창)을 들고서, 직선으로 뻗은 왼손으로는 적대자나 모독자를 한껏 겨냥하고 있다. 이 신을 모욕한 자가 자신의 죄를 뉘우칠 틈도 없이 끔찍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은 확신에 해당하는 감각이다. 제우스 상 앞에 서면 나는 신의 힘과 신의 분노를 느낀다. 신처럼 강대해지고 싶은 마음은, 청동이라는 질료 속에서 구체성을 획득한 신의 영상에서 만족을 얻는다. 반대로 신의 복수를 두려워하는 마음은, 형상의 완벽함 속에서 이 신이 가상의 창조물이라는 인식과 함께 위안을 얻는다.
사모스의 고고학 박물관을 찾았다. 사모스 같이 변두리에 있는 섬도 고고학 박물관이 두 개나 세계급 유물들로 가득차 있어서 놀랐는데, 특히 고대에 지중해 전체 - 이집트, 페르시아, 다른 그리스 국가들 - 에서 헤라 여신의 성지인 이곳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성물들을 보내왔다고 한다. 손톱만한 신상부터 7-8미터는 되는 거상들까지 다양했다.
박물관의 한 구석에서 충격적인 물건을 만났다. 이때는 아직 몰랐지만, 곧 이스탄불에서 깊게 느끼게 될 요소인 "성상파괴"의 한 형태였다
이는 기독교 발생 이전 고전기의 석상으로, 이후 사모스가 비잔틴 영토일 때 가해진 변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물이다. 설명에는 "기독교인에 의해 정화된 석상"이라고 되어있다.
신의 얼굴을 깎아내고, 새로운 상징을 새긴 그리스인들이 정화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과거다. 딱히 설명하지 않아도 자명하지만, 그 방식은 대단히 폭력적이고, 자해에 가깝다. 아시아, 또 한국의 근대화를 잠시 떠올렸다.
호텔에서 또 햇빛을 피하면서, 글을 썼다. 저번 글을 읽어본 모 편집자가 '좀 더 소설같이 써보면 어떨까' 조언해주어서, 그렇게 해보았다. 잘 되고 있는건지, 아직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거대한 원형의 돌 앞에 멈춰섰다. 벽에 붙어있는 안내문에는 이 돌의 의미가 설명되어 있었다. 가운데에 있는 구멍에 막대를 끼워서 돌리면서 올리브유를 추출하는 일종의 거대한 맷돌이었다. 안내문에는 두명의 벌거벗은 노예가 맷돌을 돌리는 힘겨운 장면을 그린 흑백 판화가 삽입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문득 말했다. “나도 노예가 되어서 저런 맷돌이나 돌리고 싶다. 그럼 아무런 생각도 안할텐데.”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하지만 대단한 고생이지 않을까요? 인간다운 삶이 아닐텐데요.” 나는 곧 이어, 거의 반사적으로 노예제의 불합리함을 설명하는 논리를 펼치려다가, 아버지가 결코 노예제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지점을 짚고 있음을 예감했다. “인간 안에는 그런 깊은 마음이 있는 것 같아.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려는 마음이.” 이것은 종교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얼마전에 마리가 만든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 작업은 작은 나무 입방체 위에 파프리카 씨앗을 극도로 정밀하게 부착해서, 매우 고생스럽고 무의미한 - 노예같은 - 작업과정을 아름다움으로 전환하는 실험이었다. 마리는 몇주간 하루에 몇시간씩 핀셋을 들고 씨앗을 하나하나 면 위에 위치시켰다. 이토록 무의미한 작업에 엄청난 집중력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했다. 인간이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반복적이고 무의미한 요소가 필요하다. 무한대로 늘어난 자유와 시간 앞에서 인간은 낭떠러지같은 공허함을 느낀다. 그런 경우에 반복 노동은 (경제적 가치가 아니라) 바로 그 무의미함 때문에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다. “맞아, 그리고 자신을 낮추려는 마음, 신 앞에서 엎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지.” "자아라는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노예의 삶도 살아볼만 하다는 건가요?” “모르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호텔에 돌아왔더니 말많은 주인장이 또 여러가지 질문을 던졌다.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해서 철학을 공부한다고 했더니 옆에서 청소를 하던 주인장의 부인과 환희에 차서, 거의 이구동성으로 “철학의 기원이 그리스인 것은 알고있죠?”라고 물어왔다. “네, 물론 알고 있습니다. 희랍어 수업을 듣다 말아서 그리스말은 몇 마디 모릅니다..” 주인장은 나에게 “필로소피아” “코스모스” “아스테라” 의 어원을 가르쳐주면서 철학적 소통을 시작했다. (이 중 “별”을 뜻하는 아스테라의 어원은 나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고정되지 않은 것’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가 문득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조금 묻더니, 자기 맘대로 이야기를 하나 시작했다. 그의 말로는 몇년 전에 ‘세계철학회장’인 일본인 교수가 바로 이곳 호텔 헤라에 묵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검소한 인물이어서 고급 호텔들을 모두 마다하고 굳이 검소한 자기 호텔, 그것도 아버지와 내가 묵고 있는 7번 룸에서 지냈는데, 아침마다 대가를 모시러 온 일본인 제자들이 비좁은 호텔 로비에 가득 도열해서 허리를 굽히고 맞았다고 했다. 권위에 무게에 압도된 일본인의 경직된 인사 자세를 그가 충실하게 재현했다. “그런데 이 일본인 신사분이 그리스어가 완벽하더라니까요”. 놀란 내가 물었다. “현대 그리스어를 했다고요? 어째서요?” “그야 세계철학회장이니까요! 당연하지요!” 주인장은 확신에 가득차 있었다. 그에게 철학적 능력과 그리스어 능력은 동일한 것으로 비춰지는 모양이었다. 내 생각에 학식이 높은 철학자라면 고대 희랍어 문헌을 좔좔 인용하거나 고전어로 작문을 했을 가능성은 농후하더라도, 상당히 딴판인 현대 그리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튼 여긴 내 호텔도 아닌데, 믿어야지 어쩌겠는가, 나는 계속 듣고 있었다. 흥분하여 말의 홍수에 들어선 그의 흐름을 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교수님이 (맥락으로 보자면, 그리스어로?) 이런 이야기를 해줬어요.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는 알지요?” 내 반응은 이미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었다. “디오게네스가 해적들에게 잡혀서 크레타에 노예로 팔려갔는데, 그를 구입한 주인이 그의 비범한 정신을 보고는 풀어주겠노라고 한 겁니다. 디오게네스 같은 위인을 노예로 쓸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웃긴 것이, 디오게네스는 갈곳도 없고 하니 그 제안을 거절하겠노라고 말한겁니다.” 처음 듣는 일화였기 때문에 나는 최초의 무관심을 깨고서 이입했다. “그래서 계속 노예로 살았나요?” “끝까지 들어보세요, 이 주인은 한술 더 떠서 그러면 자신이 노예가 될테니 당신이 주인이 되어달라고 했는데, 디오게네스는 이마저도 거절한겁니다.” 노예가 되고 싶은 견유학파 철학자..? 나는 아침에 박물관에서 아버지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결국 디오게네스에게 자기 아이들의 선생이 되어달라는 마지막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재미있지 않나요?” 나는 오늘 아침 했던 생각을 논해보기 위해서 말을 시작했다. “저희가 마침 오늘 아침에 박물관에서..” 바로 이 순간, 호텔 프론트로 전화가 걸려왔고, 흥분된 목소리로 손님과 통화를 시작한 주인은 정신적으로 철학과, 디오게네스와, 일본인 세계철학회장의 세계를 완벽하게 떠나갔다. 나는 주인에게 버림받은 노예의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 하루에 일어난 두 사건의 기묘한 연결은 내 머리 속을 계속해서 맴돌았다.
집에 와서 디오게네스의 일화를 찾아보니, 크레타에 노예로 팔려갔다는 전설이 과연 있었다. 그러나 노예가 되겠다고 하는 부분은 없었다. "가르치다"와 "주인이 되다"가 같은 동사임을 이용한 문학적 서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최초언급이 라틴어 문헌인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 출신의 철학학회장은 이 이야기를 대체 어떤 언어로 읽고, 어떤 언어로 이야기를 했을까, 그의 발음은 얼마나 일본적이었을까, 그런 자잘한 것들만이 궁금해졌다. 아니, 애초에 실존하는 사람일까?
아무도 없는 해변에 나가서 아버지랑 무릎까지 물속에 들어갔다. 물이 너무 맑아서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물수제비 경쟁을 했는데 막상막하였고 (최고 점수 9번), 아버지가 물수제비의 원리, 즉 돌의 회전면과 모멘텀에 대한 물리학적 설명을 해주셨으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문어를 만났다. 문어는 눈에 보이는 거리에 와 있었는데, 가만히 있으니까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놀랍게도, 물을 벗어나서 모래톱까지 올라오면서까지 우리를 만져보고 싶어했다. 다리를 내밀어서 아버지를 한번, 나를 한번 만져보더니, 이내 제트엔진처럼 물을 뿜으면서 유유히 지중해로 돌아갔다. 우리는 외계인에게 납치당했다가 풀려난 미약한 인간의 기분이었으나, 동시에 -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척추도 없는" - 연체동물과의 교감이 대단히 기뻤다.
그 문어는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몸짓과 눈빛(?)에서 느낄 수가 있었다. 우리를 결코 먹이로 착각한 것은 아닐 것이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우리를 감각적으로 확인하려고 했다. 나는 야생동물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독일의 숲 속에서 만난 동물들은 모두 수줍어서, 인간을 보자마자 사라지기에 바빴다. 과학과 철학의 발상지 에페소스를 마주한 섬 사모스, 여기에서는 문어마저 과학자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상하게도 문어의 호기심을 보면서, 이렇게 풍요롭고 진하고 다채로운 자연 속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종류의 호기심에 대한 직관이 생겨났다. 섬의 주민들은 수천년의 고된 역사에 시달리면서 철학을 잃었을지 몰라도, 저 문어는 3천년 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마치 화석으로 남은 발자국처럼, 철학이라는 것도 저 두족류 친구의 몸 속에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장일까? 문어에게 많은 것을 배워서, 남은 여행 동안에는 문어를 먹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하다.. 문어야.. (바로 다음날 문어 샐러드 먹음)
그리스의 음식은 너무나 좋다. 우리는 올리브유가 맛있는 고장의 음식은 맛없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올리브 나무가 잘 자라는 환경은, 다른 모든 식재료 역시 맛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훌륭한 올리브유를 곁들이면 뭐든지 맛이 200% 정도 좋아진다. 그냥 빵이랑 올리브유만 있어도 좋다.
부둣가에 나가니 터키가 보였다. 탈레스가 살았던,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사고라스와 헤라클레이토스가 살았던 에페소스다. 저기 저 높은 봉우리가 횔덜린의 노래에 등장하는 "트몰루스 산"이려나? 아무튼 우리는 유럽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아시아는 높고, 먼 곳에서 이쪽을 굽어보고 있었다. 철학은 저기에서 발생하여 여기 사모스 섬으로, 그리고 그리스 본토로 "밀려 들어갔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