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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l Park Aug 16. 2017

이스탄불에서 보다


우리가 세웠던 최초의 계획은 아시아(터키)가 보이는 그리스의 섬에서 배를 타고 - 고대인과 같은 방식으로 - 터키 해안에 상륙해서 육로로 이스탄불까지 가는 것이었다. 우리가 와 있는 사모스에서는 터키가 손에 잡힐듯 가까이 보였고, 배를 타고 1시간이면 동방에 닿을 수 있었다. 아시아와 그리스가 부딪히는 그 경계를 넘어보면 어떤 영감을 얻을 수 있을까? 설레이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검색을 해보니 가장 가까운 연안도시 이즈미르 (옛 이름 스미르나Smyrna)에서 이스탄불까지 가려면 버스로 12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리고, 사모스 섬에는 작은 공항이 있다.


고대경험도 좋지만 가끔은 문명의 달콤함을 이길 수 없다


사모스 공항은 게이트가 4개밖에 없는 단촐한 공항이다. 매일 수십대의 배가 들고 나는 항구에 비해 터무니 없이 작고, 마음만 먹으면 피라고레이오 시내에서 걸어갈 수도 있는 거리에 있다. 


프로펠러기는 오랜만에 타보기 때문에 약간 긴장했다. 


아버지가 40년전 독일에 처음 유학을 떠날때 이야기를 하셨다. 물론 프로펠러기였고, 구소련 영공을 지날 수 없었기 때문에 서울->알래스카->북극해를 넘어 독일 이렇게 가는데 20시간 정도 걸렸다고 한다. 



그때 루프트 한자 비행기에 올라타서 좌석에 앉았을때, 아버지는 "서양 냄새"를 처음으로 느끼셨다고 한다. 반면 나는 그 냄새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그 냄새가 없으면 금방 질식한다. 내 코는 아버지의 코가 스쳐치나간 세계를 영영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당시에는 국민 한 사람이 들고 갈 수 있는 외화가 200달러로 한정되어 있었다. 가난을 모르는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배경이다. 할아버지는 자기 몫의 땅을 팔아 일본 가는 배를 타셨고, 아버지는 독일 국가장학금으로 20시간 걸리는 루프트 한자를 타셨다. 나는 독일 기숙사 학교를 다니면서 매년 한국에 들어왔다. 세 사람은 완전히 다른 시대의 사람들이다.



그리스도 철학도 과학도 아닌, 집안 이야기를 하다가보니 어느새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이스탄불 공항은 혼란 그 자체였다. 입국을 위해서 500명은 되어보이는 사람들이 울타리처럼 구불구불한 줄을 이루면서 서 있었다. 나는 크레타의 미궁을 생각했다. 미노타우로스는 극도로 긴 대기시간을 통해서 방문자를 말려 죽이는 그런 잔인한 도살자였던가? 많은 여자들이 검은 옷감에 휘감겨 있었고, 그들에게는 얼굴이 없었다. 조금 더 자유로운 여성들은 히잡 아래로 빛나는 두 눈만으로 존재했다. 나를 쳐다보는 낯선 이의 눈빛이 그렇게 강렬하다고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이슬람 국가에 처음으로 왔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어제까지는 기원전의 세계, 다신교의 세계, 젊은 민족들이 지배하는 세계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몇천년의 시간을 지나서 엄혹한 신을 만나게 되었다. 내 시야에서 여자들을 지워버리는 이상한 신이었다. 끝나지 않는 입국심사의 미궁으로 나를 밀어넣는 신이었다. 공기가 달라졌음을 나는 실감했다. 애게해의 공기는 너무도 가볍고, 맑고 - 오늘 세상을 떠난 박상륭의 표현을 빌리자면 - 너무도 무균스러워서 내 안에 있는 모든 습기가 전부 증발해버릴 것 같은 공기였다. 반면의 이곳의 공기는 탁했다. 위아래와 사방으로 엎치락 뒤치락 뒤얽힌 사람의 냄새로 가득 차있었다. 




호텔은 구시가지 한가운데 있었다. 다음날 아침을 먹기 위해 루프에 올라가보니 엄청난 전경이 펼쳐졌다. 

바로 하기아 소피아가 시야 한가운데 떡하니 있었다. 


그리스에서 지난 열흘을 보낸 관성인지, 아니면 뿌리깊은 서구식 사고 때문인지, 하기아 소피아를 보면서 그리스만을 떠올리고 있는데, 주건물을 둘러싼 네개의 미나레트에서 찢어질듯한 스피커음이 터져나왔다. "알라후 아크바르"로 시작하는 길고 긴 기도였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하기아 소피아의 이름은 이제 "아야소피아"였고, 1453년 콘스탄티노펠이 함락된 이후로는 모스크로 사용되었다. 어제 공항에서의 일이 더 기억났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데, 뒤에서 누가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또 누가 새치기를 하려나보다, 하고 생각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부드러운 얼굴을 한 40대의 유럽 여성이었는데, 우리의 대화를 줄곧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부드러운 표정 속에 많은 아픔이 숨겨져 있었다. “저도 이스탄불이 옛날에 콘스탄티노펠이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려고요.” 나는 물론 그렇다고 말했다. “반독일놈”인 나에게도 항상 그 도시는 콘스탄티노펠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긍정을 들은 그녀가 함박 웃음을 지으면서 “정말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마치 내가 560년 전 빼앗긴 콘스탄티노펠을 돌려주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나는 중립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서양"과 “동양"이 격돌하는 이 공간에서 공정한 판단을 내릴수 있는 판관의 권한이 왜 나에게 주어진 것일까? 나 역시 “동양인"이 아니던가? 내가 동양인이라면 어째서 나는 이토록 일관적으로 콘스탄티노펠의, 비잔틴의, 동방정교회의, 그리스 문명의 편을 들어주고 있는 것일까? 난 대체 누구고, 이렇게 나를 심판자의 위치로 몰아넣는 너는 누군가? 그녀가 들고 있는 여권을 보니 미국 여권이었다. 내 시선을 느낀 그녀가 말했다. “저는 유고슬라비아 출신이에요” 아, 유고슬라비아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나라, 민족과 종교들의 회오리 속에 사라져버린 곳… 그녀는 없는 나라에서 온 사람이었다. 이때 우리 차례가 되었기 때문에 여권검사대로 향했다. 한국 여권을 본 터키 공무원이 우리를 보면서 기분좋게 미소짓고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도장을 쾅 찍으면서 통과를 선언했다. “웰컴 투 터키!” 터키인은 한국에 대해서 큰 근거 없는 동족의식과 호감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나를 해맑게 환영해주지만, 나는 지금 서양인에게 콘스탄티노펠을 돌려주고 오는 참이다... 지난 열흘간 인적없는 그리스의 섬들에서 그저 자연을 느끼고 철학을 생각하는데 익숙하던 우리는, 이스탄불에 내리자마자 벌써 너무나 많은 감정을 느끼도록 강제되고 있었다. 이것은 아무리 추상의 공간으로 도망치더라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과 역사의 중력이었다. 나는 한동안 안 쓰던 마음의 근육을 다시 사용해야 한다.




아침을 먹자마자 하기아 소피아로 달려갔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6세기 이전에 지어진 건물 중에서, 아니 세계의 모든 건물 중에서 이렇게 대단한 것은 없다. 안에 들어가니 비잔틴 양식의 벽화가 웅장하게 드러나는 가운데, 이슬람 서예를 담은 거대한 판들이 있었다. 제단은 메카를 향하도록 원래보다 약간 더 남쪽을 향해서 틀어져있었고, 이로 인해서 생겨난 묘한 불균형이 공기에 담겨있었다. 그건 모든 개종이 가져오는 폭력과 아름다움의 공기였다. 




2층은 원래 황제/황후와 그 무리가 이용하던 공간인데, 이제는 누구나 올라갈 수 있게 개방되었다. 


대리석 난간에 한글 같기도 하고 이모티콘같기도 한 이상한 문자들이 많이 새겨져 있었다. 아무리봐도 관광객의 솜씨같지는 않았다. 


옆에서 힐끔거리던 터키 경비원이 말해주길, 바이킹이 남긴 룬 문자라고 한다. 그 멀리 있는 바이킹이 대체 여기에 왜? 


터키 젊은이의 말에 의하면 황제에게 고용되어 경비대로 근무했다고 하고, 아버지가 기억하는 문헌에 의하면 침략자였다고도 한다. 사실을 확인해보진 못하고, 그저 거대한 체구와 수염을 가진 북방인이 여기에 서서, 황제와 신이 가진 모든 영광스러움을 하찮게 여기면서 대리석에 단검을 대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슬람 교도들은 원래의 성화 위에 덧칠을 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것은 저절로 다시 드러났다. 엔트로피라는 것은 무자비할 정도로 평등한 것이어서, 경건함이 경건함을 지우게 하기도 하고, 그마저도 또 다시 지워지면서 원래의 경건함을 드러내도록 하기도 한다. 역설적인 것은, 이미 오스만 정복자들이 도착하기 오래전에 비잔틴에서는 성상파괴운동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가려진 성화들은 비잔틴인들이 스스로 지운 것, 이슬람 교도가 지운 것, 그리고 세월이 다시 드러낸 것, 이렇게 세 종류가 있다.


몽골계의 얼굴을 한 커플이 앞에 서 있었다. 여자는 히잡을 쓰고 있었고, 남자는 검은 바탕에 금필로 쓴 거대한 현판을 나지막하게 읽었다. "알라." "모하메드." 회족일까? 그들이 알라와 모하메드 사이에서 보는 성모와 아기예수는 무엇일까?



오스만 정복자들은 성당을 모스크로 바꾸면서 몇가지 건축물을 덧붙였다. 본당의 내부에 그렇게 지어진 이슬람 양식의 추가건축물 위에, 후대의 누군가가 또 십자가를 그려넣었다. 발칙하고 의연하다.


자기 손으로 성화를 지우고, 이방인이 룬 문자를 새기고, 정복자가 성화를 회칠하고, 알라의 이름을 써붙이고, 성화를 지운 회칠이 저절로 떨어져 나가고. 이슬람 양식으로 돌을 깎아 세우고, 그 위에 몰래 십자가를 새겨 넣고... 끝이 없어 어지러운 상징과 신상의 전쟁들이었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면서 신의 얼굴을 바꾸고, 신은 마치 자연처럼 모습을 바꾸면서도 결코 흔들린 적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느껴졌다.





하기아 이레네에 들렀다. 아무것도 없고, 비둘기 둥지가 되어 있는 곳이었다.

성화는 이미 비잔틴 시절 성상파괴의 일환으로 전부 없어졌고, 폭력적일 정도로 검소한 십자가 하나만이 남아있다. 충격에 정신을 잃고 보다가, 호텔로 돌아가서 이런 글을 썼다.


이스탄불의 새들

터키인들은 이교도 성상의 파괴라는 과업을 새들에게 맡긴다. 그들은 모든 그리스적인 것, 로마적인 것, 그리스도교적인 것, 한마디로 서양적인 것을 퇴치하기 위하여 비둘기라는 종족을 고용했다. 이 비밀스러운 계약관계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성 이레네 성당에 들어간 순간이었다. 한때 비잔틴의 웅대한 건축물이었던 하기아 이레네의 내부는 죽은 산호초 섬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고 모조리 파괴된 상태였다. 제단도 없고, 황금빛 모자이크도 없고, 의자도, 촛대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단지 중앙 돔에 그려져 있는 앙상한 십자가만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성상파괴의 시절에 속죄의 감정에 휩싸인 비잔틴인들 자신이 원래 있던 성화를 회칠로 덮어버리고 그린 십자가리라. 어두운 성당 건물에는 그렇게 신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는데, 단지 비릿한 냄새와 함께 중앙돔 전체에서 작은 흐느낌 같은 소리만이 끄윽 끄윽 울려퍼지고 있었다. 성소를 이교도의 손에 잃은 비잔티인들의 한이 뭉쳐서 음파로 화한 을씨년스러운 심령 현상일까? 아니다. 성당 건물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비둘기 소굴로 변해있었다. 벽과 천장의 모든 틈마다 비둘기가 둥지를 틀고 살고 있었고, 성당에 들어왔을때 후각을 자극했던 비릿한 냄새는 곳곳에 쌓인 비둘기의 오물에서 오는 것이었다. 위를 보니 거대한 그물이 쳐져 있어서 천장에서 떨어지는 비둘기의 깃털과 오물을 대충 받아내고 있었지만, 그 이상의 조치는 아무 것도 취해지고 있지 않았다. 터키인들은 이교도의 성소를 직접 파괴하는 대신, 자연의 힘 중 가장 지저분한 것, 거대한 비둘기 무리의 생활력에 그 위업을 떠넘긴 것이었다. 한때 수백명의 사람들이 신을 관조했던, 천구와도 같이 머리 위를 버티고 있던 신성한 돔은 이제 비둘기떼가 집단으로 서식하는 인공암벽에 지나지 않았다. 그곳에서 사는 비둘기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는 사실은 터키인들의 이런 계책을 더욱더 야만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시내에서 만난 다른 유적지들도 같은 운명에 처해있었다. 로마시대의 유물인듯한 거대한 승리의 기둥에도 어찌나 많은 비둘기들이 올라 앉아있는지, 대리석 재질의 기둥 자체가 회색으로 보일 정도였다. 1453년 비잔틴의 최후를 몇달 가량 연기해주었던 전설적인 철옹성의 잔해 위에는 갈매기들이 올라앉아 있거나 까마귀들이 회합을 벌이고 있었다. 그렇게 새의 발과 부리와 오물에 서서히 풍화되면서, 옛 비잔틴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스탄불이 고용한 하청업체는 탁월했던 것이다. 다음날 오후에 여객선 터미널을 지나다가, 노란색 카나리아를 새장에 넣어 들고서 한 소녀가 바쁘게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그 새가 마음껏 노래를 부르길 바랬고, 운좋게 새장을 벗어나더라도 푸른 자연이 있는 곳에서 살다가 죽기를 바랬다. 새야 울어라, 부술 성상이 없는 곳에서 울어라.



다음날에는 "아시아"에 가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여객선을 타려고 하다가, 막상 여객선 타는 곳에 가보니 건너편이 너무 가깝고 다리 또한 멋져서, 아버지가 "아시아까지 걸어가지 뭐"라고 하셨다. 그래서 아시아까지 걷게 되었다.

다리 위에는 수많은 이스탄불 토박이들이 강태공이 되어 무언가를 낚고 있었다. 그다지 큰 고기가 잡히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관광객들에게 낚시 도구도 빌려주고, 고기도 팔았다. 허가와 무허가의 구분조차 없는 것 같이 북적거리는 풍경이었다. 아버지가 60년대 서울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혼돈과 혼돈에서 나오는 엄청난 에너지를 말하시는 것이었다. "이 에너지라면 경제 성장이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다리 밑에 있는 식당에서 고등어 케밥을 먹었다. 터키에서 먹은 모든 음식 중에서 가장 깔끔하고 솔직한 맛이었다. 솔직히 이스탄불에서 만난 터키 음식은 그리스의 평균치를 한참 밑돌았는데, 3천원 정도 하는 이 간소한 음식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아시아쪽 갈라타 지구는 관광객이 별로 없고 영어도 거의 쓰이지 않았다. 그만큼 더욱 살아있었다. 서양과 동양이 아무렇게나 마구잡이로 엉켜있었고, 그 엉킴에서 시끄럽고 진한 냄새를 가진 삶이 풀려나오고 있었다. 부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힘이었다. 


사진은 없지만 저녁에 특별한 종교적 경험을 했다. 


어제 저녁에 아버지와 정처없이 시내를 떠돌던 중, 비잔틴 양식으로 보이는 비교적 작은 모스크를 하나 발견했다. 가까이 가서 안내문을 읽어보니 525년경에 유스티누스 1세가 직접 설립한 성당 건물이었고, 1453년 정복 이후에는 모스크로 쓰이고 있는 곳이었다. 별명은 “소小 하기아 소피아”이다. 앞에서 기웃거리면서 사람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힐끗 힐끗 쳐다보고 있으니까, 앞에 앉아있는 청년이 유창한 영어로 들어와서 보고 가라며 웃는다. 얼떨결에 처음으로 모스크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일단 신발을 벗어서 안에 있는 신발장에 집어 넣는데, 그 느낌이 한옥이나 절집에 들어가는 것 같아서 편안하다. 사람이 거의 없는 모스크에는 푹신한 초록색 카펫이 깔려있고, 메카 방향을 향해서 엹은 붉은색으로 줄이 그어져 있다. 그 줄에 맞추어 앉은 사람들이 기도를 한다. 우리는 여전히 쭈뼛거리면서 선 채로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했다. 맨 앞 제단 가까운 곳에서는 흰색 옷과 모자로 몸을 두른 이맘 한명이 매우 익숙하게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이마를 땅에 대고 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가 다시 절을 한다. 평신도 두명도 이마를 완전히 바닥에 댄채로 입술을 움직여서 기도문을 외우는데, 동작 속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움과 진실함이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뭔가가 여기에 있는 것 같아” 아버지가 작지만 격앙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앞쪽에서 기도를 마친 성직자가 흰수염을 휘날리면서, 함박 웃음을 지으면서 우리에게 손을 내민채로 다가왔다. 아살람알레이쿰, 나도 반사적으로 아살람아레이쿰을 말했다. 말을 안 통해도, 신의 집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우리가 애들처럼 보였는지 (합치면 100살인데!) 주머니에서 말린 대추야자 두개를 꺼내더니, 하나씩 손에 쥐어주고는 또 웃으면서 떠났다. 우리는 다른 기도자들과 같은 자세로 자리에 앉아보기로 했다. 카펫 위에 무릎을 꿇고 앉으니 서 있을 때보다 몇배는 더 강렬한 기운이 가슴으로 전해져왔다. 신이라는 말로 잘 표현이 안되는 무언가의 가장 바깥쪽 끄트머리가, 이곳에 겹겹이 쌓여있는 기도와 신앙의 극히 일부가, 자세와 공간과 냄새와 침묵의 힘을 빌어 잠시 우리 몸을 통과했던 것이다. 그 느낌을 그대로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다음날 블루 모스크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에 가서 이슬람의 강렬한 종교성을 계속해서 관찰했다. 거대한 곳이었다.



이슬람의 신은 모든 상像을 금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신전을 건축함에 있어서, 사람들의 모든 미적 감각은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패턴 (또는 글자)을 통해서 충족되어야 한다. “그림이 없이 아름다움을 표현 하려니까 수학이 발달할 수 밖에 없지.” 아버지가 말했다. 그리하여 이슬람에게 허락된 유일한 미적 경험은 음악, 언어, 기하학인 듯 했다. 



너무 많은 관광객들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어제와 같은 경건함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조차 않았는데, 우리 눈 앞에서 이상한 사건이 하나 펼쳐졌다. 사원 안에서는 관광객을 위한 공간을 간이 칸막이로 막아놓았는데, 이 곳에는 평소 모스크의 규범과 달리 여성들도 입장할 수가 있었다 (평소에 여성들은 따로 마련된 공간에서 기도를 한다). 그런데 한무리의 여성들이 이 칸막이를 뚫고서 남성들만의 기도공간으로 침입한 것이다. 놀랍게도 이들은 이슬람의 규율을 모르는 철없는 관광객이 아니라, 머리에 히잡을 쓴 여신도들이었다. 청소를 하던 관리인 남자 두명이 당장에 달려와서 쫓아내려고 했지만, 이들은 막무가내였다. 성스러운 구역에 도달하자 마자 이마를 바닥에 대고는 기도를 시작한 것이다. 복색을 보자하니 먼 시골에서 올라온 중년의 여인들이었는데, 평생 블루 모스크에서 기도할 기회는 지금밖에는 없으니 에라 모르겠다, 일단 바닥에 몸을 던지고 본 것이리라. 관리인들은 어이가 없었지만, 성난 표정을 유지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찌 신과 사람 사이의 일에 감히 끼어든단 말인가. 나는 여인들의 반란이 통쾌하면서도 감동적이었다. 그들은 할 기도를 전부 다 하고서야 유유히 사라졌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이슬람은 훨씬 덜 과격했고, 더 진솔했다. 지금까지 본 신앙 중에서 신에 대한 가장 절실한 사랑으로 가득찬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스탄불은 강렬한 경험을 남겼으나, 우리의 마음은 계속 기독교 세계의 몰락과 이슬람의 (과도할 정도의) 신앙 사이에서, 그리스 고대 세계의 명료한 찬란함과 이스탄불의 난잡한 역동성 사이에서 흔들렸다. 더 이상 순수하기 어려울 파트모스의 공기를 마시다가 사흘간 대도시의 매연을 맡으니 목이 아렸다. 과학이라는 키워드로 고대와 현대의 괴리를 읽어내고 있던 우리에게, 이스탄불은 결정적 해답을 제공해주기는 커녕, 끝없는 미로로 다가왔다. 그러나 모든 풍족함과 가능성은 최초에는 길을 잃도록 만든다. 언젠가 다시 돌아와서 생각을 완성할 수 있기를 빌었다.




위의 "이스탄불의 새들"에서도 썼지만, 길 위에 만난 존재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동물들이었다. 개들에 대해서도 짧은 글을 써봤다. 


이스탄불의 개들 

풀숲에 살면 삵쾡이인데 집에 살면 집고양이가 되고, 집 밖에서 살되 사람 곁을 떠나지 않으면 길고양이가 된다. 이스탄불은 길에서 살아가는 동물들로 넘친다. 그리스에서도 그랬지만, 이스탄불에서 고양이는 인도에서 신성한 소가 차지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듯 하다. 사방에 고양이 사료가 쌓여있고, 어딜가나 새끼 고양이들이 햇빛에 뒹굴면서 고양이 되는 법을 연마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새끼 고양이들의 노력은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어서, 초급 고양이 과정을 마친 녀석들은 어느새 햇빛에서 옅은 갸르릉을 띄고 하루의 대부분을 자면서 보낸다. 고양이도 그렇지만, 개라는 직업을 가진 경우는 더욱 놀랍다. 개는 항상 주인을 따르고, 주인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지금껏 생각했다. 하지만 이스탄불의 개들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놈들에게서 식탁 밑에서 먹을 것을 구걸하는 애완견의 애처로운 눈빛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들은 홀로, 또는 두놈이 짝을 이루어 다니면서 주위 환경을 파악하고 판단하며, 언제 자고 어느 땅을 파헤치고 어디서 침을 흘릴지, 어떤 고양이에게 겁을 주고 어떤 새를 향해 짖을지를 완전히 독자적으로 결정한다. 훌륭한 민주시민, 아니 민주견이다. 길고양이의 개념에 비추어 이들을 길개라고 부른다면, 길개는 스스로의 주인이어서 항상 당당하다. 이들은 인간을 마치 자연환경의 일부처럼 파악하기 때문에, 두 종족 사이에는 위계질서가 아닌 주권자 간의 존중이 존재하는 듯 하다. 길 위에서 사는 모든 존재들은 서로 동등하다. 길개는 대부분 더럽거나, 털이 빠지거나 몸이 성하지 않아서, 절룩거리면서 뛰어다니는 놈들이 많다. 아마 애완견에 비하면 오래 살지도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내가 집개라면 길개를, 길개 안에 담긴 한 줌의 늑대성을 부럽게 쳐다볼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원한 집인간인 나는 이스탄불의 길인간들을 선망의 눈으로 쳐다본다. 내 목줄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이길래, 나는 도망쳐 나갈 생각을 하지도 못하고 이렇게 그 주위를 평생 맴돌고 있을까? 매일 같은 사료를 먹으면서도 나는 왜 진짜 삶을 두손으로 움켜쥐지 못하는가? 나와 같은 인간들이 지금까지의 삶을 포기하고 길 위의 삶을 택하는 것은, 의중을 알 수 없는 주인의 변덕이나 기막힌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아예 불가능하다. 길들여진 채로 태어난 자들에게, 자유를 선택할 자유는 없다. 나는 푸들이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가축처럼 하품을 하면서 나는 호텔로 돌아간다. 길가에 누운 개가 나를 한심하게 쳐다본다.



마지막 날 아침, 비행장으로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하기아 소피아에 들렀다. 성화에도 알라의 이름에도 성상파괴의 흔적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보수를 위해 세운 압도적인 크기의 철골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성전의 일부처럼 보였다. 마치 우리 시대의 성상이 들어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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