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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책언니 채송아 May 25. 2023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언제 오냐고요?

15년의 노력과 성과에도 교육환경이 바뀌지 않는다는 좌절 앞에서

대학원에서 예술경영을 공부하던 25년 전쯤의 일이다. 그날은 민간문화재단이 운영하는 공연장에서 이미 자리를 잡은 선배의 특강을 듣는 날이었다. 노동집약적인 공연예술의 특성상 대중음악 콘서트나 장기공연하는 뮤지컬이 아니고서야 연극, 무용, 클래식 등 순수예술 장르는 수익은커녕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대부분 국가의 지원, 기업의 후원이 있어야 제작 가능하다. 사정이 그러하다보니 문화재단의 공연장은 안정적으로 작품을 제작하고 운영할 수 있어 선망받는 직장으로 꼽힌다.


선배는 한참 본인의 일과 업계 현황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른 내용은 다 잊어버렸지만, 아주 가끔씩 떠오르는 말이 있다. “우리가 일하는 동안 공연계에 봄날은 오기 어렵다.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일해야 한다”. 당시 20대였고, 아이도 없던 나는 그 말에 전혀 동감할 수 없었다.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열심히 일한 만큼 보람과 성취 역시 당연히 내가 일하는 동안에 누릴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적어도 10년 후, 20년 후에는 눈에 보이는 성과가 있어야 한다. 예술로 인해 동시대가 풍요로워지는 것을 느낄 수 없다면 내가 왜 굳이 월화수목금금금 하루 12시간 넘게 이 일을 한단 말인가. 다음 세대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공자님 말씀처럼 품위 있지만 내 마음에 전혀 와닿지 않았다.


***



얼마 전,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동료 상근자가 지역모임의 등대장들과 신영복 선생의 ‘담론’을 같이 읽으며 인상적이었던 한 구절을 커뮤니티에 올려주셨다. 


“아름다운 꽃은 훨씬 훗날의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물며 열매는 더 먼 미래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씨앗과 꽃과 열매의 인연 속 어디쯤 놓여 있는 것이지요. 고전의 아득한 미래가 바로 지금의 우리들인지도 모릅니다. 그 미래 역시 아직은 꽃이 아니라고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 그렇구나. 

우리의 삶은 땅에 뿌려진 씨앗 위의 흙더미, 떡잎이거나, 새순이거나, 겨우 올라온 줄기 어디쯤에 놓여 있구나. 갑작스런 깨달음에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달려온 15년이 새롭게 다가왔다. 


우리 단체의 활동은 매년 가시적인 성과를 쌓았고, 단체의 성장과 함께 딸의 초중고 시절을 통과한 나는 아이의 학교생활에서 이미 여러 번 변화를 실감했다. 중학교 내신 수학시험에서 교육과정을 벗어난 문항 출제로 50점 맞기도 어려웠는데 선행교육규제법 제정 이후 무리한 출제 관행이 사라졌다. 반에서 공부 좀 한다 하는 학생들은 초등학교 5학년부터 외고 입시에 매달리며 오만 가지 스펙 쌓기에 열을 올렸는데, 입시전형이 개선되자 불필요한 특목고 입시 열기도 사그라들었다. 대규모 프랜차이즈 영어학원이 부도가 날 정도였으니, 사교육걱정의 성과는 괄목할 만했다. 


초1 한글 수업시간이 27시간에서 68시간으로 늘어나 국가가 책임교육을 완성하도록 한 성과는 딸이 고3이던 해부터 2017년부터 시행됐다. 아이가 대학생이 되어, 나 개인의 삶에 체감되진 않지만, 대입 원서에서 고교정보를 블라인드하고, 철인9종 경기라던 학생부종합전형도 간소화되어 입시에도 구체적인 변화가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사교육비는 치솟고 입시경쟁은 가속화되었다.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대입 개편안은 소모적인 수시와 정시 논쟁으로 갈 길을 잃고, 이제는 공정 시비까지 더해졌다. 10년 전에 도전적으로 내걸었던 ‘2022년 불필요한 입시 사교육은 사라질 것입니다’라는 슬로건은 성급한 목표라는 것을 인정하고 철회해야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15년동안 할 수 있는 일 이상의 것들을 해냈지만, 열매는커녕 꽃봉오리를 틔우는 것조차 지난한 일임을 깨달았다. 


처음에 단체를 기웃거릴 때 나는 내 아이의 삶만을 바라보았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 내 생각의 변화, 엄마의 노력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깨닫고, 단체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상근자로 일하기 이전부터 내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쏟아 부었다. 단체 활동의 성과로 내 아이가 직접적인 혜택을 받길 내심 바랐다. 그러다 어느새인가 아이 후배들의 삶이라도 달라지면 좋을 것 같았다. 다음 세대 전체가 살아가는 사회가 덜 경쟁적이고, 개인의 다양성을 키우는 교육으로 바뀐다면 우리 모두는 달라진 세상의 온화한 공기를 마시리라, 조금 더 먼 미래를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 


신영복 선생의 문장은 다음 세대를 위해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는 노력만으로도, 꽃과 열매가 있으리라는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땅을 가는 것만으로도  값지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지금 유독 더 힘든 시간이라면 어쩌면 올해 봄이 좀 늦어서일지 모른다. 봄 바람은 기대보다 늘 차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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