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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정석 Sep 11. 2018

내려다본 유럽

    난 고소공포증을 가지고 있다. 이 고소공포증은 집안 내력이다. 아버지 역시 높은 곳을 무서워하신다. 우리 가족은 평생 아파트에서만 살았는데 이사를 자주 다녔었던 시절에도 10층 이상의 높이에 살아본 적이 없다. 바로 고소공포증이 있으신 아버지의 영향이다. 내가 초등학교 때는 남들 다 올라가는 구름사다리 한 번을 못 올라갔었다. 사다리를 붙잡고 몇 걸음 올라가기만 하면 다리가 부들거렸다. 그 위에서 뛰노는 것들은 무슨 깡다구로 그럴 수 있는 건지 원. 


내려다본 유럽


    그럼에도 나는 높은 곳에 올라가 경치를 내려다 보길 좋아한다. 지난 교환학생 시절에 유럽 여행을 하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올라갔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과거를 마주 보는 것만 같다. 내가 이 높은 곳까지 오르느라 지나왔던 길이 보이고 지난 며칠간 누볐던 도시의 곳곳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아련한 느낌이 좋아서 고소공포증을 지니고 있음에도 난 항상 높은 곳에 오른다. 이번엔 내가 여행하면서 내려다보았던 유럽의 도시들을 보여주고 싶다. 이 글을 쓰려고 찾아보니까 여러 도시에서 많이도 올라갔더라. 



1.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독일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내려다본 하이델베르크 구시가지

    명문 대학으로 유명한 하이델베르크다. 이 곳은 나의 첫 여행지이기도 했다. 그런데 보다시피 날씨가 내 첫 여정을 제대로 방해했다. 보통 하이델베르크 하면 울긋불긋한 지붕과 푸르른 네카어 강이 어우러지는 장면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내가 도착했을 땐 밤새 눈이 내려 저 모양이었다. 아예 눈이 많이 와서 하얗게 덮인 것도 아니고 좀 '덕지덕지' 느낌으로 눈이 쌓여 있었다. 

    그래도 저 장면을 바라보며 한동안 발을 떼지 못했었다. 첫 유럽 여행의 설렘 때문이었을까. 앞으로 펼쳐질 반년 간의 독일 생활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을까. 화려하지도 않고 저 성당도 자랑한 만큼 크지도 않았다. 대신 도시 전체가 뿜어내는 은은한 독일스러움이 이뻤던 것 같다. 날 좋을 때 다시 와봐야지 해놓고 가지 못 했다. 



2. 쾰른(Köln), 독일

쾰른 대성당에서 내려다본 쾰른

    쾰른 하면 내겐 강가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던 도시로 기억된다. 저 당시 여행의 테마가 라인강을 따라가는 것이었기에 맘 잡고 강가에 눌러앉았었다. 5월의 선선한 날씨와 해 질 녘 따듯한 햇빛을 받으며 보냈던 시간이 참 여유 있고 좋았다. 야경까지 찍기 위해 노을이 질 때부터 깜깜해질 때까지 강가에서 어슬렁거렸다. 독일 사람들이 강변에서 맥주를 쌓아두고 시끌시끌 즐거워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재밌다. 혼자 갔던 여행이었기에 그들을 구경하고 성당 뒤로 짙어지는 노을을 구경하고 그랬다. 11시쯤 되어 해가 완전히 졌을 때 찍었던 성당의 야경 역시 정말 예뻤다.

    왼쪽에 빼꼼 보이는 것이 쾰른의 상징인 쾰른 대성당이다. 원래는 하얀색이었는데 2차 세계대전에 폭격에 그을려 저렇게 되었다. 성당 전체가 얼룩덜룩 그을려서 기괴해 보일 정도다. 이 성당은 정~말 높은데 1884년 완공 당시 무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3. 오르후스(Aarhus), 덴마크

    여기가 어딘지 아는 사람은 정말 드물 거다. 나름 덴마크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라는데 딱히 유명한 건 없는 도시다. 높은 건물도 거의 없어서 높이 올라갈 데도 없었다. 저곳도 전망대라기보단 루프탑에 가까웠다. 근데 북유럽의 작은 도시를 보기에는 이 높이가 딱이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내려다 보기엔 참 올망졸망 아기자기한 도시였다. 이렇게 마주 보는 게 나았으리라. 루프탑의 탁 트인 바에서 맥주를 마셨고 무대에선 DJ가 노을과 어울리는 잔잔한 음악을 틀고 있었다. 무턱대고 우당탕탕 여행 다니는 내가 이렇게 분위기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오르후스의 기억은 너무나 행복했다. 



4. 런던(London), 영국    

테이트모던에서의 전경. 앞 빌딩은 샤드

    어휴 날씨 좀 봐. 런던에 4박을 있었는데 한 번도 해를 보지 못했다. 운이 지지리도 없었다. 런던 날씨에 대한 악명이야 익히 들었지만 이렇게 5일 내내 증명해줄지는 몰랐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런던이었기 때문에 이런 날씨도 괜찮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런던은 어차피 비로 유명한 도시 아닌가. 런던에서 비를 만났다는 건 진짜 런던을 만났다는 의미일지도? 바르셀로나, 로마 이런 도시에서 비를 만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는 합리화 같은 것이다. 

    구름을 지고 있던 런던은 런던스러움을 마구 뿜어 냈다. 내가 런던을 최고의 여행지로 꼽는 것도 이 점 때문이다. 도시에 가기 전에 가지고 있던 환상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들어맞았던 곳이 런던이다. 차갑고 세련된 현대식 건물들과 나이 지긋~해 보이는 옛 건물들의 조화가 너무 멋있었다. 독일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런던 뽕에 취해 있었다. 교환학생을 런던으로 갔어야 한다며. 비마저도 나의 런던 사랑을 막지 못했다. 



5. 그라나다(Granada), 스페인

알함브라 궁전에서 내려다본 그라나다

    '그라나다 - 알함브라 궁전 = 0'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알함브라 궁전은 그라나다의 유일무이한 상징이다. 이 알함브라 궁전의 하이라이트는 '나사리 궁전'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린 이 곳을 들어가지 못했다! 티켓에 쓰여있는 입장 시간이 알함브라 입장시간인 줄 알았는데 나사리 입장시간이었던 것이다. 알함브라에도 빠듯하게 도착했던 우리는 곧장 나사리로 갔어야 했으나 여유 부리다가 결국 데드라인을 지나버렸다. 돈은 돈대로 내고도 들어가지 못한 아쉬움이란... 그 아쉬움은 컸지만 이 아쉬움을 한 방에 날려준 것이 위 사진의 장면이었다. 궁전 망루의 난간에 서면 탁 트인 그라나다의 전경이 펼쳐진다. 그때 시야를 가득 매운 하얀 집들이 날 사로잡았다. 오밀조밀 모인 집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 모습이야말로 그라나다야!" 그라나다의 상징은 알함브라 궁전이지만 그라나다 사람들의 오랜 삶은 저 집들에 담겨 있으니 말이다. 



 6. 말라가(Malaga), 스페인

    내가 봤던 유럽의 경치 중 가장 예뻤다. 물론 내가 살던 프랑크푸르트도 야경이 또 한가닥 한다. 아무튼. 말라가의 경치는 뭔가 스페인스럽고 오션뷰에다 빌딩도 좀 있고 색깔도 이쁘니 여러 면서에 이쁜 경치였다. 아름다운만큼 보러 가기가 힘들다. 히브랄파로 성이 있는 산을 올라가야 하는데 더운 날씨에 그곳을 오르기가 만만치 않았다. 힘들 때면 내 앞에서 올라가고 있는 어린애들을 보며 날 채찍질했다. 꾸역꾸역 올라가다 보면 툭 튀어나온 작은 전망대가 있다. 히브랄파로 성까지 올라가는 것보다 이 곳 경치가 좋다. 사진도 그곳이다. 전망대에서 카메라 뷰파인더에 눈을 고정시킨 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15도씩 돌려가며 수십 장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아무리 많이 찍는 다고 특출난 사진이 찍히는 건 아님에도 셔터를 멈출 수 없는 경치였다. 



7. 바르셀로나(Barcelona), 스페인

몬주익 연덕 전망대에서 본 경치 

    11번 도시까지 쓰고도 이 사진에 대한 코멘트를 쓰지 못했다. 바르셀로나 사진인데 바르셀로나 같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몇 번을 쓰고 지웠는지 모르겠다. 며칠 전에 이 사진을 인스타에 올렸었는데 누가 해방촌 같다고 그랬다. 내가 봐도 참 서울 어딘가처럼 나왔다.  그래서 참 뭐라 쓸지 모르겠다. 바르셀로나의 개성을 싹 지운 바르셀로나 사진이네. 코멘트를 쓰지 못했다는 말로 코멘트를 대신한다.  



8. 로마(Rome), 이탈리아

바티칸 시국의 베드로 광장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쿠폴라에 올라 베르니니가 디자인한 베드로 광장을 내려다본다.' 오직 바티칸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순간이다. 바티칸은 소설 '천사와 악마'의 주 배경이 되는 장소다. 중학교 시절부터 이 소설의 팬이 던 내게 바티칸과 로마 시내는 마치 영화 스튜디오 같았다. 로버트 랭던 교수가 암살자를 뒤쫓던 성당과 광장을 직접 찾아가며 소설의 장면을 상상해봤다. 그중에서도 저 베드로 광장은 내가 가장 보고 싶던 장면이었다. 광장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열쇠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 열쇠는 바티칸의 상징이기도 하다. 동명의 영화에서도 참 자주 등장했던 그리고 중요한 일들이 벌어졌던 이 광장을 꼭 이 각도에서 보고 싶었다. 댄 브라운의 소설에 빠졌던 사람이라면 내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 종교, 과학, 음모, 비밀 이런 키워드들이 머리 속에서 폴폴 피어나며 내 로마 여행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9. 나폴리(Napoli), 이탈리아

왼쪽의 산이 폼페이를 덮쳤던 배수비오 산

    나폴리는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런데 가서 보면 특별히 예쁘진 않다. 과거에는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항구보다 배가 들어올 때 산이 보이는 항구를 미항으로 꼽았다고 한다. 오랜 항해에 지친 뱃사람들이 나폴리항에 들어설 때면 저 멀리 보이는 배 수비 오산이 고향에 가까워졌음을 알려줬었나 보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오랜만에 화산을 볼 수 있었어서 기억에 남는다. 2009년에 제주도에서 한라산을 본 이후 거의 10년 만이었다. 개다가 배 수비 오산이 그냥 화산인가. 2000천 년 전 폼페이라는 도시를 집어삼켰던 악명 높은 화산 아닌가. 나폴리의 살인적인 더위 때문에 화산에 오를 생각은 꿈에도 안 해봤지만(오르는 버스가 있긴 하다) 사실 저 산과 폼페이를 보고 싶어서 나폴리를 찾아온 것이기도 했다. 폼페이는 베수 비 오산 건너편에 있다. 화산이 터졌던 날 바람의 방향이 반대였다면 화산재에 묻힌 도시는 나폴리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10. 파리(Paris), 프랑스

개선문에서 마주본 에펠탑

    파리에 있을 때 에펠탑을 찍기 위해서 세 번이나 시간을 내서 탑을 찾았다. 모든 시간대에 에펠탑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해가 쨍쨍한 낮에, 뉘엿뉘엿 해가 지는 저녁에 마지막으로 깜깜한 밤에 에펠탑을 보러 갔다. 에펠탑 사진 1000장 찍기가 목표였는데 그만큼 찍었으려나. 물론 바로 옆에서 보는 것 외에도 파리 시내 어디서나 탑을 볼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장관은 개선문에서 바라본 에펠탑이었다. 저 장면에 매료되어 개선문도 두 번이나 올라갔었다. 에펠탑과 개선문을 볼 때면 무슨 치트키 같다. 둘 중에 하나만 있어도 엄청나다 할만한 도시의 상징들이 한 도시에 있다니. 랜드마크와 관련해서는 전 세계에 파리를 이길 도시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파리는 역시 파리였다. 



11. 프랑크푸르트(Frankfurt), 독일

내사랑 프푸

    마인 타워(Main Tower)에서 내려다본 프랑크푸르트다. 마인 타워에만 세 번을 올라갔었다. 전망대를 좋아하는 내게 프랑크푸르트는 최고의 도시였다. 유럽을 통틀어 이런 느낌의 야경을 가진 도시는 별로 없다. 아니 꼭 고층 건물들의 불빛 때문이 아니더라도 내게 유럽에서 최고의 도시는 프랑크푸르트다. 지난 2018년 2월 잔뜩 쫄아서 유럽에 첫발을 딛었던 나를 품어준 도시. 살다 보니 익숙한 곳도 생기고 골목골목에 얽힌 추억도 생겼다. 유럽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도 여기다. 이 곳에서 난 참 행복했다. 

    프랑크푸르트에 가면 아펠바인(Apfel Wein)이라는 술이 있다. 사과 와인이다. 살짝 시큼하고 떫으면서 달달하다. 겨울에는 따듯하게 데워먹기도 하는데 이게 참 별미다. 3월에 축구 직관 가기 전에 친구들과 콘슈티 시장에서 마셨던 따듯한 아펠바인이 생각난다. 



    다 쓰고 나니 지난 유럽 여행에 대한 정리가 되어버렸다. 거의 여행을 갈 때마다 전망을 한 번씩은 보고 온 것 같다. 요즘 나는 지난 여행을 추억을 먹으며 살고 있다. 서울에서 새로 생기고 있는 기억들은 그다지 매력적인 것이 아니어서. 전망대에 올라 그때 그때 여행을 돌아봤던 것처럼 지금은 내가 찍어온 사진들을 보며 지난 여행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참 멋진 기억들이다. 

    교환학생이라는 선택이 내 인생에 플러스일지 마이너스일지 모르겠다. 4학년 1학기에 교환을 떠나는 바람에 취업에 대한 생각은 완전 잊고 살았고 돌아와 보니 내가 처한 취준의 현실은 생각보다 막막했다. 남들보다 한 학기 뒤쳐지게 된지도 모른다. 교환학생이란 게 스펙이 되는 것도 아니거니와 영어실력이 많이 늘지도 않았다. 그래도 저 위의 사진들을 내가 직접 눈으로 보고 찍어왔다는 데서 위안을 얻는다. 자랑할만한 추억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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