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코섬_ DHC8-Q100
이시가키 공항의 대합실에서 보딩 타임을 기다린다. 이제 티켓을 들고 게이트웨이를 빠져나면 뱃길로 이어진 야에야마 제도의 섬들과는 당분간 이별이다.
버스에 올라 활주로로 향한다. 미야코행 비행기가 눈에 들어온다. 류큐 제도와 아마미 제도를 오가는 이 작은 비행기는 JAL 계열의 류큐 에어 커뮤터[RAC] 소속이다.
서울과 제주를 오가는 저가항공사의 비행기도 이렇게 작지는 않았다. 옆구리에 난 창은 겨우 열 개. T자로 꺾인 꼬리날개까지 높이는 채 8미터가 안 된다. 프로펠러를 단 터보프롭 엔진을 양쪽 날개에 하나씩 단, 장난감 같은 비행기다.
다섯 개의 계단을 밟아 기체에 오르자 스튜어디스가 환한 얼굴로 사탕 하나를 건넨다. 오키나와에서 나는 흑설탕 사탕이다.
창가 자리에 앉자 엔진 룸 밑으로 내려온 랜딩기어가 눈에 잡힌다. 경비행기로 유명한 세스나[Cessna] 사의 터포프롭 모델이 포르쉐 911 쿠페라면, 이 비행기는 1990년대에 나온 코롤라 세단에 가깝다.
등받이 포켓 위로 불거진 안내장에 JAL 로고가 박힌 비행기 그림이 있다.
기종은 DHC8-Q100.
DHC 화장품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드 하빌랜드 캐나다[de Havilland Canada] 사의 머리글자에서 따왔다.
DHC는 단거리 이착륙이 가능한 커뮤터기 제조사로, 훗날 보잉을 거쳐 봄바디어 사에 인수되면서 ‘대시’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Bombardier DASH8-Q100
이 비행기의 공식 명칭이다. 어떤 이름은 고집이 있다. 한 번 귀에 붙으면 여간해서 바뀌지 않는다. 여전히 DHC8-Q100로 불리는 비행기의 제원은 이렇다.
정원 37
길이 22.25m
날개 폭 25.89m
순항 속도 500km/h
최대 상승고도 2만5000ft
프로펠러를 단 커뮤터기는 제트기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속도가 느리고 비행 고도도 낮다.
이 작은 비행기는 활주로를 천천히 이륙해 웬만한 구름보다 낮게 난다. 여느 비행기보다 날개가 높이 달려 있어 시야의 가림은 적은 편이다. 날만 좋으면, 2만 피트 상공에서 빛바랜 인디고블루의 바다를 비행 내내 조망할 수 있다.
그때 옆사람이 팔을 툭 친다. 앞을 보니 스튜어디스가 입을 벙긋하며 손사래를 치는 중이다. 좀 전의 상냥함은 찾을 수 없다.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손님, 지금 사진을 찍으시면 안 돼요!”
꼬리날개 뒤로 멀어지는 이시가키섬을 바다와 함께 잡을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다. 놓치고 싶지 않다. 한쪽 눈을 질끈 감고 셔터를 누른다.
기체가 수평을 잡자 카메라를 내린다.
스튜어디스와 눈이 맞는다. 표정이 어둡다. 달리 할 말이 없다. 규정을 앞세워 충동을 누르다보면 정작 하고 싶은 일을 놓치게 된다.
“유도리가 없군.”
이렇게 혼잣말을 내뱉고는 창가로 시선을 돌린다.
유도리는 유토리[ゆとり]라는 말에서 왔다. 유토리는 ‘여유’를 뜻한다. 그러니까 “유도리 있게 하자”는 말의 본뜻은 “여유를 두고 차근차근 하자”가 된다. 그런데 일상의 쓰임은 그렇지 않다.
현해탄을 건너는 동안 획 하나가 부러져 달아난 것만 같다. 이 땅에서 유도리는 “너무 까다롭게 굴지 말고 융통성 있게 하자”는 뜻으로 널리 쓰인다. 열에 아홉은 그렇다.
‘여유’가 어쩌다 ‘융통성’이 된 걸까?
흰 와이셔츠 칼라에 누런 얼룩이 배듯, ‘유토리’에 부정적인 반감이 더해져 ‘유도리’가 된 걸까?
일본 사회는 매뉴얼을 중시한다. 사물을 분류해 체계를 세우거나, 일의 순서를 정해 단계별 대응책을 세우는 일에 능하다. 이런 작업에는 시간과 공이 든다. 여유를 두고 꾸준히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식민지 백성의 사정은 달랐다. 허리를 펼 새도 없이 일하는 소작농에게 “여유를 두고 차근차근 하라”는 말은 반어법에 지나지 않는다. 공출 일을 앞두고 어떻게든 목표로 잡힌 소출량을 맞춰야 했다. 그러니 ‘유토리’라는 말이 곱게 들렸을 리 없다.
DHC8-Q100이 프로펠러를 붕붕거리며 난다. 시끄럽다. 소음 억제 장치를 달아 여느 터보프롭 비행기보다 조용하다는 뜻으로 Q[Quiet]라는 이니셜을 붙였다고는 하지만, 30년도 더 된 일이다.
코가 냄새에 적응하듯, 엉덩이와 등짝은 이내 기체의 진동과 하나가 된다. 그러자 온갖 생각과 상념이 파쇄기 안으로 빨려 들어가 심해의 어딘가로 사라진다.
바다 위 한 지점에 초점이 맞는다. 고도가 낮아 사물이 점처럼 뭉쳐 보이지는 않는다. 물 빠진 청바지색의 바다 위로 바지선 한 척이 느릿느릿 떠가는 중이다.
갑판은 비어 있다. 구름의 그림자가 수면에 얼룩처럼 묻어난다. 그 풍경이 여유롭다. ‘유토리’하다.
잠시 후 기체가 높쌘구름을 뚫고 하강한다. 나비의 애벌레처럼 통통하게 살이 오른 엔진룸의 덮개가 열리며 랜딩기어가 내려온다. 작은 창은 민트블루의 바다 빛으로 가득하다. 페트리 접시에 배양한 푸른곰팡이 같은 산호가 환히 비친다. 오키나와 현에서 가장 투명한 바다란 말을 실감한다.
길을 따라 네모반듯하게 닦아놓은 사탕수수 밭의 풍경이 불쑥 끼어든다. 비행기는 구리마 대교 위를 나는 중이다. 이제 물빛은 에메랄드그린이다. 7킬로미터에 이르는 마에하마 비치의 흰 모래가 섬의 가장자리를 후광처럼 두르고 있다.
DHC8-Q100은 언제까지 이 노선을 다닐까?
여기에 대한 답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이시가키와 미야코를 오가는 이 작은 비행기에 대해서라면 꼭 해줄 말이 있다.
“그 작은 비행기 말이야? 유토리했지, 아무렴. 유도리 말고 유토리.”
지면의 마찰을 온몸으로 받아낸 바퀴가 활주로 위를 천천히 구른다. 노란 페인트를 칠해둔 마크 옆에 정확히 바퀴가 멈춰 서서, 30분이라는 짧은 비행의 마침표를 찍는다.
생각이 활주를 끝내고 남은 건 후회와 미련이다. 이는 연애의 마지막이 남긴 감정과도 같다. 눈앞에서 출구가 닫히면, 더는 날아오를 기력을 잃고 낭떠러지 앞에서 브레이크를 잡아야 한다. 사과의 타이밍은 그럴 때 온다.
어디 먼 곳의 기척을 들은 미어캣처럼 등을 세우고 눈을 깜박인다.
“좀 전엔 미안했어요. 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죠.”
이럴 땐 “고멘나사이”라고 해야 한다. 스미마셍 말고 고멘나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