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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건수 Sep 21. 2023

수강신청의 공간학

건축과 수강신청

대학에 다니며, 우리는 일반적으로 8회 이상의 수강 신청 전쟁을 치른다. 전공 필수 교과목을 장바구니에 담고, 남은 학점으로 교양이나 관심 있었던 다른 과 수업을 신청한다. 그렇게 새로운 학기를 준비한다. 개학 첫날, 그제야 내가 듣는 수업 장소가 어딘지 검색한다. 



  특별한 이벤트는 대개 장소와 함께 기억으로 남는다. 돌이켜보면 늘 같은 일상 속에서 가끔씩 맞이하는 낯선 경험이 머릿속에 깊이 새겨진다. 학교에서 기억에 남았던 순간을 떠올려 보자. 사람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처음 동기들과 마주했던 강의실, 겨울에 도서관 앞에서 미끄러 넘어져 약국을 찾아 ‘고연(연고)’을 사서 발랐던 기억, 좋아하는 사람에게 수줍게 고백했던 날… 그곳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이 있고, 사건의 배경과 공간이 있고, 때로는 계절의 온도가 추억을 상기한다.



  다양한 공간을 체험한다는 것은 결국 풍부한 삶의 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4학년 시절, 수강 신청 학점에 여유가 생겨 연기과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기초연기라는 과목이었다. 물론 연기과 학생도 있었지만, 그보다 다른 과 학생들이 더 많았고, 타교 수강생도 있었다. 특이하게도 책상이 아닌 연습실 바닥에 누워 한 학기 내내 수업을 가졌다. 세 시간 수업이었는데 연기 이론을 배우기보다는 몸과 얼굴의 긴장을 풀고 유연하게 하는 스트레칭을 매번 두 시간 정도 진행했다. 남은 한 시간은 서로 게임을 하며 보내기도 했다. 이 나이에 수건돌리기라니! 이게 요가인지, 게임인지, 연기 수업인지 헷갈리는 커리큘럼을 3분의 2 이상 지난 때에서야 준비한 대본으로 어설픈 연기를 할 수 있었다.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솔직히 수업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딱딱한 책상과 칠판이 아닌, 넷플릭스를 보는 것처럼 바닥에 누워 교수님과 자유롭게 대화했던 경험, 그때 만났던 다른 과 학생들과 만들었던 추억이 먼저 떠오른다. 영상을 전공하는 친구를 따라가 처음으로 편집실 환경을 구경하기도 했고, 비올라 연주하는 친구를 따라가 방음이 잘 되어 귀가 먹먹한 악기 연습실 안에서 연습은커녕 여러 명이 짜장면을 시켜 맛있게 먹었던 추억이 있다. 낯선 환경이었지만 오감이 살아있는 체험으로 머릿속에 각인됐다.



  얼마 전, 청소년을 위한 심리 문화공간을 설계할 기회가 있었다. 클라이언트는 유튜브 촬영을 할 수 있는 녹음실과 더불어 누워서 쉬고 때로는 맘껏 움직이며 놀 수 있는 댄스실, 그리고 방음이 잘 되어 내담자가 눈치 보지 않고 울 수 있는 상담실을 원했다. 순간, 전혀 도움 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기억 저편에 있던 연기 수업 시간이 떠올랐다. 그때 느낀 생생한 공간들을 잘 다듬어 새롭게 구현해내면 될 일이었다. 이렇듯 경험은 상상하지 못했던 우연한 상황에서 또 다른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 



  그리고 새로움이란 서랍 속에 숨어있던 경험에서 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기존의 답습을 다르게 보는 데서도 꽤 자주 온다. 강의실은 책상에 앉아 수업을 듣는 곳이기도 하지만 꼭 그런 곳이어야만 할까? 연습실에서 꼭 연습만 하란 법은 없다. 수업 시간에 강의만 듣는 건 아쉽다. 배움도 중요하지만, 낯선 환경에서 그 과목과 관련한 경험을 수강한다는 생각으로 수강 신청을 바라보면 어떨까. 다른 과 친구와도 한 번 이야기해 보고, 그들이 자주 가는 맛집과 공간에 따라가자. 그렇게 고대에서의 기억을 두텁게 쌓아보자. 기억은 경험의 또 다른 이름이다. 단순한 지식이 아닌, 공간에 둘러싸인 문화와 경험을 수강하자.




이 글은 고대신문에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http://www.kunews.ac.kr/news/articleView.html?idxno=41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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