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비움에 대하여
도시를 걸어 다니다 보면 큰 건물 앞에 조성된 작은 녹지공간을 종종 볼 수 있다. “공개공지”다. 도시 환경을 쾌적하게 만들기 위하여 건물이 일정 규모 이상으로 커지면 일반 시민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건물 외부에 휴게공간을 마련하도록 하는 법이 제정되어 있다. 꼭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 건물이 지어질 수 있는 면적 안에 공개공지를 마련하면 건물을 조금 높게 지을 수 있는 인센티브를 주기도 한다.
서울의 상징과도 같은 종로 1가 교차로에는 매해 시작을 알리는 타종으로 유명한 보신각도 있지만 종로의 랜드마크이자 건물 상층부가 뻥 뚫린 독특한 모양의 종로타워가 있다. 얼마 전 타계한 우루과이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라파엘 비뇰리(Rafael Viñoly)가 설계한 건물로, 24층과 33층 사이의 30m가 되는 공간을 비워둔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저렇게 비싼 땅에 건물을 저렇게 비워놔도 되나?” 싶지만 사실 비밀이 숨어있다. 건물을 지을 당시 기준치보다 높게 지을 수 있도록 고도 제한을 풀어주는 대신 청와대에서 전쟁 시에 공군 작전용 공중 통로로 쓰도록 비워달라는 요청이 있었다고 한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현재 종로타워는 누구라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형태 덕에 종로의 상징이 되었다.
건물을 설계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건물을 비워내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통 가옥을 이야기할 때 어떤 이는 자연의 산세를 닮은 지붕 선을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목재 구조와 온돌의 우수성을 이야기하기도 하겠지만 나는 대청마루만큼 중요한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신발을 벗고 툇마루에 올라 방으로 들어가기 전 넓게 마련된 외부로 열린 공간. 건물의 앞뒤가 뚫린 이곳에 앉아 마당을 바라보거나 저 멀리 경치를 바라본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대청마루는 무더운 여름을 견디게 한 조상들의 지혜였다. 땅바닥에 맞닿게 건물을 짓는 게 아니라 한 단을 들어 올려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피했고, 열의 전도가 낮은 나무 널판을 사용해 시원함이 지속되도록 했으며, 건물의 앞과 뒤를 터놓아 햇빛을 받지 않는 뒷마당의 찬 기운이 건물 안으로 스며들 수 있게 만들었다. 탄소 저감과 에너지 절약을 이야기하는 지금, 생활 공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과감히 외부로 열어놓았던 옛 전통가옥 구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얼마 전 SNS에 한 건물 사진이 올라왔다. 종로1가 교차로에서 크게 한 블록 남쪽으로 내려오면 2호선 을지로입구역이 자리한 을지로1가 사거리가 있다. 5번 출구에 내려 명동으로 들어가려면 꼭 거쳐 가야 하는, 지상 20층 규모의 오퍼스일레븐 빌딩 사진이었다. 사실 가운데 뚫린 공간으로 치면 이 건물이 종로타워보다 원조다. 종로타워가 개장하기 약 15년 전 만들어진 이 건물 10층과 11층엔 원래 하늘공원이 있‘었’다. 당시 건물주와 서울시가 타협하여 만든 건물 안의 공개공지였다. 큰 건물을 짓고 외부에 휴식 공간을 조성하는 대신 건물 1층을 외부로 뚫어 명동으로 지나가는 길을 내었다. 그리고 10층과 11층을 높게 터서 시민들 누구든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면 서울 시내를 관망하며 쉴 수 있도록 유리 입면을 쓰고 설치 미술과 벽면 모자이크로 안을 채웠다.
소유주가 여러 번 바뀌면서도 잘 유지되어 큰 상을 받기도 한 이곳이 언제부터인가 커다란 광고 전광판으로 막혔다. 그 전광판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경관은 지키면서···’로 시작하는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아무리 시민들이 잘 알지 못하여 이용도가 떨어지고, 건물에 입주한 사람들만 쓰는 휴식 공간으로 전락했더라도 꼭 이렇게 채워내야만 했을까? 소중한 공강 시간처럼, 무용할지언정 비움이 필요한 것은 건축도 마찬가지일 텐데 말이다.
이 글은 고대신문(http://www.kunews.ac.kr)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