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미러 시즌 5> 스미더린 리뷰
# 약간의 스포 있습니다.
인간사회와 미래 기술에 대한 충격적인 문제를 던지고 있는 넷플릭스의 대표 프로그램 블랙미러 시리즈가 다섯 번째 시즌으로 돌아왔다. 3편으로 구성된 이번 시즌은 인간은 앞으로 어떻게 지배당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점철되고 있는 듯하다. 온전히 인간의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감정도, 관계도, 권력도 결국엔 기술에 의해 지배당할 수 있다는 것이 블랙미러 시즌 5의 암울하지만 특색 있는 결론이다.
<블랙미러 시즌 5>에서는 두 번째 스토리이지만 기술의 지배라는 관점에서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스미더린>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보려 한다. <스미더린>은 교통사고로 약혼녀를 잃은 주인공이 상처 치유(?) 혹은 복수를 위해 소셜미디어 회사인 스미더린사를 만든 창업주와의 통화를 위해 인질극을 벌이는 내용이다. 인간관계를 더 풍족하고 다양하게 해 줄 것만 같던 내손 안의 소셜 미디어들이 우리의 삶을 더 나아가 우리의 관계를 얼마나 지배할 수 있는지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나(자신), 가족, 사회가 어떻게 기술에 의해 지배되는지 <스미더린>을 통해 생각해 보자.
1. 나
눈을 감고 나에게 집중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나를 지켜낸다. <스미더린>은 세상의 다른 소리가 아닌 나의 숨소리에 집중하고 기계로부터 해방의 시간을 갖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 명상 역시 기계를 통해서 이뤄진다. 숨을 쉬고 내뱉는 모든 과정들이 차 안의 AI에 의해 컨트롤된다. 기술에서 해방하기 위해 기술을 이용해야 하는 아이러니. <스미더린>의 첫 장면은 인간이 기술에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는 모습 그 자체였다.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존재해야 한다. 온전하지 않은 내가 접하는 수많은 정보와 관계는 위험할 수 있다. SNS가 위협적인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스마트폰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에게 나 스스로를 지켜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들 느낄 것이다. 실시간으로 재미있는 기사가 뜨고, 지인들의 이야기가 내 손 안으로 너무나도 쉽게 들어온다. 잠깐의 지루함을 잊기 위해 나를 잃어버리고, 핸드폰을 쳐다보는 것이 이미 일상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디지털 기술들의 부작용이 피부로 느껴지는 지경에 이른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핸드폰에서 멀어지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들을 한다. 집에 들어와서 핸드폰을 책상 위에 놔두고 갖고 다니지 않는 다든지, 일정 시간 이후에는 전원 버튼을 꺼버리는 등의 용기를 발휘하기도 한다.(핸드폰 전원을 끈다는 건 정말 큰 용기라 생각된다.) 이러한 노력이 무색하게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아 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이러한 기계의 무서움을 알아서 일까? 스미더린의 회장, 빌리 바우어는 디지털 디톡스를 수행한다. 사막 한가운데 천막에서 엄청난 돈을 들여야만 디지털 기계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깨끗한 공기와 물을 돈 주고 사 먹듯이 이제 완전한 디지털 해방은 억만장자만 꿈꿀 수 있는 고귀한 것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2. 가족
상처 치유를 위해 참여한 단체 심리 상담에서 주인공은 아무 말하지 못하지만, 자살한 딸의 엄마를 만나게 된다. 이 엄마는 딸이 자살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 딸의 일기나 사진첩을 봐야 하는 것이 아니다. 딸의 SNS 계정에 들어가 봐야 하는 것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흔히 가족이라면 너무나 당연하게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셜미디어가 활성화되고, 이용 빈도가 높아지면서 우리를 잘 아는 것이 가족인지 소셜미디어 속 타인들인지 헷갈리게 된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경험과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가족과의 대화 대신에 SNS 속 타임라인에 쏟아 붓기 바쁜 것이 사실이다.
가족뿐만이 아니다. 내 옆에 있는 친구, 회사 동료들이 SNS 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사람을 옆에 두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일이 익숙하다. 옆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것보다 타임라인 안에 자신의 감정을 써넣는 것이 더 익숙할지도 모른다. 내가 운전하는 차 안의 내 약혼녀의 안전보다도 (물론 순간이었지만) 내 계정에 올라온 좋아요 버튼 하나가 나에게는 더 중요한 의미일 수도 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알 수 있는 내 마음의 비밀 번호는 내 가족이나 지인이 아닌 내가 이용하고 있는 소셜 서비스가 알고 있는 것 아닐까?
3. 사회
주인공이 스미더린 사장과 대화를 하기 위해 인질극을 벌이는 장면을 보면서 묘한 충격을 받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하면서도 낯선 느낌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봤던 거의 모든 이야기에서 인질범이 무엇인가를 요구하기 위해 통화를 원하는 사람은 대부분 대통령이라든지 총리와 같은 정치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한 소셜 미디어 회사의 회장과 이야기하기 위한 인질극이라니...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터무니없는 이야기도 아닌 것이 내 삶에 더 가까이 와 있는 것은 거대 정치, 행정 조직이 아닌 SNS 아니었던가.
<스미더린>에서 보여주는 소셜미디어 회사의 힘은 상상 이상이다. 범인에 대한 정보 수집은 물론이고 범인의 현재 심리 상태와 해결방안까지 손쉽게 얻어낸다. 결국 기존의 조직들은 그 앞에서 힘을 잃는다. 우리는 그들에게 공권력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우리 스스로가 올린 정보들을 활용해 그 어떤 조직보다도 막강한 정보력을 확보했다. 정보에 앞선 조직이 더 큰 힘을 갖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사회적 순리일 것이다.
권력뿐만 아니다. 사람의 심리 역시 막강한 국가 기관보다 더 잘 파악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경찰은 별로 실력도 없어 보이는 인질 협상가를 내세워 주인공을 설득해 보지만 사태만 심각하게 만들 뿐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러는 사이 스미더린사는 인공지능이 뽑아준 노래를 통화 연결음으로 활용해 심리적 상태를 차분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뿐만 아니라 주인공 몰래 주인공과 인질범의 대화까지 엿듣는다. 어느 첩보 기관보다 유기적이고 효율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모습이다. 이렇게 우리는 사회적으로 이미 소셜미디어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눈을 SNS에서 눈을 뗄 수 없고, 그렇게 지배당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와 있다. 마지막 BGM(Can’t take my eyes off you)과 같이 우리는 그들에게 눈을 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눈길은 순간의 가십 혹은 지루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은 그놈의 SNS로부터 인류는 해방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