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들어간 첫 해, 내가 제일 많이 했던 일은 상사의 업무 스케줄을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계장 스케줄, 과장 스케줄, 부장 스케줄을 모아놓고 부장님에게 최종 결재를 받기까지의 최단 루트를 찾는다. 계획을 다 짰으면 행동개시다. 계장이 손이 비어 말을 걸어도 되겠다 싶으면 서류와 결재 대장을 가져가서 조용히 계장에게 내민다.
"확인・결제 부탁드립니다."
계장은 결재 서류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검은색 도장을 찍어준다.
그다음은 과장이다. 결재 서류를 잔뜩 쌓아두고 있지만 괜찮을 것 같다. 가보자.
"확인・결제 부탁드립니다."
과장은 계장의 검은 도장 옆에 빨간 도장을 찍어준다. 오케이. 클리어. 그다음은 부장인데, 어라, 부장님 자리에 있을 시간인데 어디 갔지?
견적서를 비롯해서 회사 직인이 필요한 모든 서류는 결재의 대상이다. 담당인 나, 계장, 과장, 부장의 순으로 확인을 하고 확인했다는 의미로 도장을 찍는다. 언제 누가 확인을 했는지 기록을 남기는 의미도 있겠고, 내가 이 서류에 책임을 지겠다는 뜻도 있을 것이다.
내가 있던 부서는 고객을 만나는 업종이었기에, 고객처나 다른 거점 등으로 외출하는 경우가 잦았다. 결재를 받는 건 사무실이어야 했는데(결재 대장과 도장이 사무실에 있기 때문에), 상사들은 늘 사무실에 있어주는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미션 결재받기'였다. 부장이 여름휴가라도 간답시면 그전에 모든 걸 다 해두어야만 했다. 정 안되면 옆에 부서 부장님한테 대리 결재를 부탁한다.
그래서 재택근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재택근무는 상상도 못 했다.
코로나로 긴급사태 선언이 발령되었음에도 일본의 많은 회사원들은 여전히 회사에 나가야 했다. 올해 3월에 일본정보경제사회추진협회가 공표한 조사에 의하면, 텔레워크가 가능한 시스템 환경이나 사내 규정을 정비한 회사는 전체의 30%에도 달하지 않았다.
일본에는 전일본인장업협회(全日本印章業協会)라는 게 있어서, 오래전 이야기이긴 하지만, 1997년 자민당 행정개혁 추진 본부가 페이퍼리스화를 추진하려고 했을 때는, 이 단체가 맹반대를 펼쳐서 이 계획을 좌절시켰다고 한다. 또한, 일본의 인장 제도・문화를 지키는 의원연맹이라는 것도 있는데, 행정의 디지털화를 추진해야 하는 타케모토 IT정책 담당 장관이 최근까지 이 연맹의 회장이었다는 코미디 같은 일도 있다.
어찌 되었든 코로나 사태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재택근무를 해야 했고, 시스템이 정비되기까지 우리 회사에서 했던 건 이거다.
①확인받아야 할 문서를 PDF로 변환해 메일로 계장, 과장, 부장에게 차례대로 확인을 받는다.
②확인받은 메일을 근거로, 사무실에 출근한 사람이 문서에 회사 직인을 찍는다.
③직인을 찍은 문서를 스캔해서 고객에게 메일로 송부한다.
④나중에 출근하게 되면, 메일로 확인받은 날짜로 결제 도장을 찍고, 회사 직인이 찍힌 원본을 고객에게 가져간다.
내가 다니는 회사, 대기업이다. 나는 IT사업을 하는 부서에 있다. 그런데 이렇다. 최근이 되어서야 겨우 work flow system을 도입해서 시스템 상에서 파일을 공유하고 확인/결재를 받는다. (그렇게 결재가 끝나면 종이 문서에 회사 직인을 찍는다. 그건 변하지 않았다.)
일본 사람들도 안다. 코로나 시대에 도장을 받기 위해 회사에 나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얼마나 비효율적인 일인지. 코로나 시대에 복직해서 일을 하면서 든 생각은, '내가 입사 초년도에 그토록 많은 시간을 투자했던 일은 도대체 뭐였던가'였다.
일본도 변하려 하고 있다. 코로나로 수면 위로 떠오른 문제들이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이다. 디지털 거버넌스의 이름 아래 페이퍼리스화, 항코(はんこ:도장) 리스화 등의 추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단순히 도장을 전자 도장으로 바꾸는 데 그쳐서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당연히 해 왔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전제하에, 확인과 결제, 책임에 대한 개념 자체를 재구성해야 하는 시점에, 일본은 와 있다. 과연 어디까지 변할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