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밤 품었던 고민이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려주는 어른의 이야기
핸드폰을 열어 SNS에서 친구의 최신 게시물을 확인하는 일. 그 게시물에 하트를 누르고 댓글을 남기는 일. 혹은 수신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메시지 창으로 안부를 묻는 일. 우리에게 익숙해진 소통의 모습이다. 내가 누군가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을 떠올려 본다. 다른 사람과 깊게 연결되는 기분을 느끼는 일은 흔치 않기에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야 몇 개의 후보가 나온다. 한동안 코로나로 인해 물리적 거리마저 좁힐 수 없게 되니 마음을 여는 일에 취미가 없어도 긴 호흡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만남이 그리워졌다. 나도 모르게 생긴 향수에 잠겨 가라앉고 있을 때 오지은 작가의 신간 <당신께>를 접할 수 있었다.
오지은 작가는 독자들에게 긴 시간 편지를 써왔다. 오직 편지라는 형식으로만 가능한 내용을 담아서. <당신께>는 그 편지를 엮은 책이다. 2016년과 2017년에 적은 편지는 ‘떠나는 시간의 편지들’이라는 이름으로, 2020년에서 2022년에 적은 편지는 ‘돌아오는 시간의 편지들’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다. 독자들은 편지를 통해 오지은 작가의 여행을, 잠시 숨을 고르는 일상을, 방 한구석에서 시작된 사색을 따라간다.
오지은 작가의 글이 반가운 이유는,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 하는 구질구질한 마음을 부끄럼 없이 바라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는 이정표대로 반듯하게 지치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정표의 방향을 한 번 더 곱씹어 보는 사람, 어느 날은 과하게 뛰지만 그보다 더 오래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는 떠나는 시간과 돌아오는 시간 내내 그의 뜻대로 되지 않는 모습을 고백한다. 반듯하게만 걸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솔직한 심경도 밝히는데 그 덕에 나도 누군가를 향해 입을 삐죽거렸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런 나’의 모습도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한다.
제겐 자신의 삶을 컨트롤하는 사람에 대한 환상이 있습니다. (…) 이런 사람은 유니콘일까요. (…) 제 세계에서 계획은 엎어지기 마련이고,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기 마련이고, 코트는 끝내 드라이클리닝을 하지 못 한 채 다시 겨울을 맞기 마련입니다. 스무디를 만들려고 사둔 채소는 냉장고에 넣는 순간 잊혀집니다.일상은 작고 흔하고 슬픈 비극의 연속. (52p)
제니 오델의 책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을 읽었습니다. 재미있어 보여 샀으면서 펴기 전에 좀 삐죽거렸어요. 머리로는 알지만 할 수 없는 것들이 적혀 있지 않을까. (…) 게다가 오바마가 추천을 했다고 하니 왠지 더욱 거리감이 생겼습니다. 그는 적어뒀던 리스트대로 여름방학을 보낸 사람일 테니까요. 그런데 제 편견이 틀렸습니다. 얄팍한 편견이 깨질 때 기쁩니다. (204p)
패티 스미스의 책에 대해 오지은 작가가 제일 먼저 언급하는 부분은 읽는 이에게 소소한 웃음과 위안을 준다. 그는 패티 스미스와 같은 엄청난 업적을 이룬 사람도 일상의 작은 부분에 있어서는 지극히 평범하다는 것에 동질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가 동질감을 느꼈음을 털어놓는 것을 보며 나 또한 오지은 작가와, 더 나아가 패티 스미스와 같은 ‘종자’임을 확인한다. 세 다리만 건너면 세상 사람들이 다 연결되어 있다더니 오지은 작가 덕분에 독자들은 패티 스미스까지는 도달하게 되었다.
전설의 로커 패티 스미스도 같은 버릇을 갖고 있다는 것을 책 <M 트레인>을 보고 알았습니다. 그 책을 보면, 충동을 느껴 도쿄로 떠나기로 마음을 먹자마자 짐 리스트를 작성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몽상하기를 좋아하는 이쪽 종자들의 공통점일까, 하고 혼자 기뻤습니다. 이런 대단한 사람도 그런다고 생각하면 제 흠결을 조금 용서받은 듯한 기분이 듭니다. 어쩌면 흠결이 아닌 걸까?하고 너그럽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16p)
오지은 작가는 ‘어른’의 정의에 대해서도 사유한다. 어떤 사람들은 소위 이 시대의 ‘어른’이라 떠받들어지는 인물들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을 지도 모르겠다. 주로 자신에게 철저한 그 어른들의 이야기는 위인전이나 성경의 한 구절에 나올 것처럼 엄숙하고 완벽하게 다루어진다. 나 같이 삐뚤어진 독자는 그런 글들에서 교훈을 취하기보다 좌절과 열등감을 느껴버리기에 ‘어른’과의 거리는 더 멀게만 느껴진다. 오지은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서는 ‘흑과 백의 세계를 지나’온 사람, 우리가 영영 보지 못하는 달의 이면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 사람, 모르겠다는 말을 툭 던질 줄 아는 사람이 ‘어른’이다. 세상을 크게 보고 스스로의 작음을 인정한다는 면에서, 그의 이론은 평범한 나에게서도 어른의 모습을 발견하는 기쁨을 선사해 준다.
쭈뼛쭈뼛 자신 없는 모습을 조심스레 내보이던 작가가 편지를 통해 단호하게 말해주는 것도 있다. 그는 성취 만을 이야기하는 세계에서 그만두는 것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은 무게임을 알려 준다. 그만두기 전까지의 시간을 누군가는 분명히 보았다고 말하며 그만두는 자에게 이후의 행운을 빌어준다. 만루 홈런을 칠 수 있는 스윙이 아니더라도 지금 내가 휘두르고 있는 스윙도 분명 스윙이라는 사실, 점수가 나지 않고 기록에 남지 않아도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곤 한다. ‘돌아오는 시간’ 동안 작가는 확실히 깨달은 것 같다. 매 순간이 영광스럽고 의미 있고 반짝여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 간단한 진리를 알면서도 우리는 영광스럽지 않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곧잘 움츠려들기에, 그가 이 평범한 사실을 우리에게 조곤조곤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내려놓은 당신도
주저앉은 당신도
모두가 나아가는 당신입니다.
당신과 나의 행운을 빕니다. (184p)
작가는 이 위로를 27세의 자신에게도 편지를 통해 전한다. 41세의 오지은이 27세의 오지은에게 ‘당신은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것을 보면 작가가 앞선 편지에서 언급한 영화 <컨택트>가 연상된다. 영화는 ‘그 모든 고통을 겪을지라도 당신은 삶을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작가는 말한다. 영화에서 주인공 루이스는 다가올 이별을 알면서도 만남을 시작하고, 소중한 사람을 잃는 고통을 알고도 이를 막으려 하지 않는다. 루이스가 고통에 물러서지 않고 고스란히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고통이 아픈 만큼 행복이 찬란함을 깨달은 자의 결정이기에 숭고하게 마저 느껴진다. 41세의 오지은이 27세의 오지은에게 편지를 띄우는 것은 영화 속 헵타 포드가 루이스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과 같지 않을까. 내가 자주 진흙탕을 만나고 드물게 양지바른 길을 걷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의 행동과 결정은 틀리지 않았음을 미래의 내가 말해준다면 진흙탕이 아무리 질척여도 한 발 한 발 걸음을 뗄 힘이 생길 것이다.
반짝이는 젊음은 서투르게 방황하는 시간을 대가로 한다. 과거의 나에게 편지를 띄우려면 서툴던 내 모습을 마주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당신께>를 읽고 나는 십여 년 전의 나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오지은 작가에게 받은 위로와 용기, 웃음과 눈물에 힘입어 어른이라 착각했던 스물몇 살의 나에게 들려줄 작은 지혜의 한마디를 찾아본다. 말을 고르느라 가만히 생각에 잠기면 오지은 작가가 응원을 담은 커피 한 잔을 사들고 나타난다. <당신께>에서는 그 따뜻한 커피 향이 난다.
만약 우리가 아는 사이였다면, 그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면 무슨 말을 해줬을까 고민해봤는데 3일 밤낮을 떠들거나, 아니면 아무 말도 못 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그와 나의 시간은 같은 듯 전혀 다를 테니까. (…) 그래서 저는 가끔 커피를 삽니다. 무력함과 응원이 섞인 복잡한 마음으로, ‘원래 다 그런거야’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와 당신의 사기를 꺾을까 걱정하면서. (16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