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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느무느 Apr 04. 2023

오래되고 불편한 이야기

어린이집을 보낸 지 나흘 만에 둘째가 코를 흘리기 시작했다. 어린이집 가면 줄곧 병원 신세라는 걸 예상은 했지만, 처음엔 고작 30분만 있다 오는데도 감기를 옮아 오는 것을 보니 아기가 치르는 단체생활이 만만치 않음을 실감했다. 첫째도 다음 날부터 콧물이 나기 시작했고 결국 등원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서 두 아기 모두 코감기에 걸렸다.


지난겨울에 소아과를 다녀보니 요령이 생겼다. 쌍둥이는 둘이 함께 호명되는데, 둘이 같이 진료실에 들어가 있으면 기다리는 아기도 진료 보는 아기를 따라서 앙앙 울어버린다. 둘 다 목 놓아 울기 시작하면 의사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혼만 쏙 빠지므로 이번엔 남편과 아기를 한 명씩 데리고 들어가기로 했다. 남편이 먼저 둘째를 데리고 들어갔다. 잠시 뒤 아기 울음소리가 들렀다. ‘청진기를 가져다 대었군, 싫다고 발악하는 걸 보니 목, 귀, 코를 들여다보고 있겠군.' 아기의 반응만 들어도 진료실 풍경이 그러졌다. 이제 내가 첫째를 데리고 갈 차례였다. 무릎에 앉혀 놓은 아기를 으쌰 하고 안아 올렸다.


겨울 이후 오랜만에 만난 의사가 차트를 보더니 말했다. “지난 12월에서 아기 몸무게가 거의 늘지 않았어요. 몸무게가 이렇게 오래 정체되어 있으면 안 됩니다.” 아기들 먹성이 그리 좋지 않아 이유식 먹일 때마다 힘든데 몸무게 이야기를 하니 뜨끔했다. 의사는 아기들이 밥은 얼마나 먹는지 물었다. “이유식은 180ml씩 하루 세 번, 분유는 자기 전에 한 번 240ml 먹어요.” 그러자 의사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어머니, 그렇게 먹이시면 안 됩니다! 다른 아가들은 하루에 1000ml 넘게 먹어요. 지금 아기들 다이어트시키고 있는 거예요. 몸무게가 안 늘면 키도 안 커요. 아기 키가 작아도 어머니가 상관없으신 거면 그렇게 먹이세요. 키는 두 돌 전에 게임 끝납니다.” 묘하게 협박 같이 들리는 의사의 말에, 아기가 깨어있는 동안 최대한 먹이는 거라고 대답했지만 되려 꼬투리만 잡혔다. 깨어있을 때만 먹이면 어떻게 하느냐고, 밤에 잘 때도 분유를 줘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다고 또 한참을 혼났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진료는 시작도 하지 않은 채 훈계는 계속되었다.


“자 이제 아가 보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의사가 아기에게 청진기를 가져갔고 그제야 아기의 울음이 시작되었다. 목, 귀, 코를 순서대로 들여다보자 아가도 처치에 상응하는 울음으로 답했다. 첫째는 항생제를 처방받았다. 둘째보다 감기 증상이 심해서 약을 더 많이 써야 한댔다. 눈썹까지 빨개진 아가를 안고 진료실을 나오는데 내가 얼떨떨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했대? 몸무게 가지고 뭐라 하는 것 같던데.” 진료실 밖까지 목소리가 들렸는지 남편이 물었다. 남편에게 의사가 한 말을 전하는데 내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내가 밥을 잘 못 먹이고 있었고, 이렇게 하면 아기들 다이어트시키는 거고, 키가 안 크는 거고….” 


고압적인 목소리로 혼내는 남성을 만난 건 물론 처음이 아니다. 그럴 때 나는 웃음기 없는 싸늘한 눈빛으로 상대의 무례를 갚아주는 편이다. 의사의 길고 시끄러운 훈계에도 내 방식대로 대처하면 되었다. 하지만 그가 쏟아내는 비난의 말에 나의 내면 어디선가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의 비난에 나에게서 원인을 찾는 것은 내 오래된 습관이었다. 이번에도 비난받아 마땅한 이유는 쉽게 발각되었다. 먼저, 블로그에서 본 레시피 대로 아기 간식을 만들겠다고 생각만 하고 한참을 미루어 두었던 과거의 내가 검거되었다. 인터넷으로 레시피까지 찾아보고는 왜 바지런히 챙겨주지 않았는지 제 발 저린 마음이 조용히 자수했다. ‘아가들의 발육이 전적으로 양육자에게 달려있는데 조금 무심했던 건 맞지.’ 어린 생명을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조차 내가 전혀 몰라주었다는 듯이 굴었다. 내 과오를 들키고 나니 의사가 심은 우려의 씨앗이 순식간에 발아해 거대한 현실로 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아가들 발육에 이미 이상이 생겨버렸다는 일그러진 상상은 당혹스러웠고 그게 나의 잘못이라는 것은 공포스러웠다. 괴롭고 겁이 나기 시작하니 의사의 매너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중요한 건 내가 더 신경 쓰지 못했다는 것, 아가들이 충분히 먹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결국 난 촌스럽게 집에 다 와 눈물이 났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하며 눈물을 훔치고 있으니 습관적인 자기 불신에 또 빠져버린 나 자신이 지겨웠다. 익숙한 괴로운 기분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 순간까지 내가 의사를 비난하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기에 거기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잠시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되짚어보았다. 그런데 유레카. 간과하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의사가 아기 몸무게를 보고 놀라 언성이 높아진 거면 먼저 남편이 아기를 데리고 들어갔을 때 말을 했어야 한다. 영유아는 몸무게에 따라 약의 복용량이 달라지기 때문에 의사가 몸무게를 확인 안 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남편이 들어갔을 때에는 진료가 금방 끝나더니 내가 들어가니까 태도를 바꾸었다. 사실 일주일 전에도 남편 혼자 아가를 데리고 병원을 다녀온 적이 있었지만 의사는 아기 몸무게에 대해, 아가 밥 먹이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순간 헛웃음이 났다.


양육에 관한 타인의 조언을 듣는 것이 싫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환영이다. 혼자 고민하고 판단 내려야 하는 순간의 연속이기에 육아는 외롭고 고되다. 나는 의사가 여성 보호자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 말하고 싶다. 내가 그날 혼이 난 이유는 그 소아과 의사가 그저 괴팍했기 때문일까. 그가 원래 어떤 성격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서툰 보호자들을 상대하느라 그의 친절함이 모두 동이 났을지 모른다고 너그럽게 이해해 봐도 훈계질이 남성 보호자를 비껴간 것에 대한 원인은 설명되지 않는다. 의사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나의 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아기를 다이어트시키고 있는, 아기의 발육이 충분치 않아도 상관없는 엄마로 매도하면서. 의사가 엄마의 죄책감을 자극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효율적이라고 믿는다면, 아빠에게는 양육과 관련해 심각한 사안을 다룰 역량이 부족하다는 믿음 또한 형성되어 있다는 뜻이다. ‘못 미더움’을 담당함으로써 아빠들은 갖은 채근과 질타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 나는 평소와 달리 상대의 무례를 갚아주지 못하고 그것도 모자라 참회의 눈물까지 흘렸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내가 엄마가 된 것뿐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여성과 남성이 겪는 육아의 무게가 다르다는 이야기는 선사시대 동굴벽화에도 기록되어 있을 것처럼 낡고 낡은 이야기다. 주변에서 숱하게 들어 많은 사례들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겪어보니 이 불쾌한 일이 성별화된 경험이라고 처음부터 냉철하게 판단할 수 없었다. 성별화된 양육 책임을 경계하는 나에게도 의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엄마 역할이 내면화되어 있었다. 이건 마치 최면과 같다.  나를‘어머니’라고 호명하며 시작되는 충고에 다른 사고는 정지되고 순식간에 죄책감이 발동해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이 말이다. 나의 헛웃음은 안도의 의미이기도 했다. 남편이 먼저 진료실에 들어갔기에 의사의 훈계가 여성 보호자를 타깃으로 한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었다. 만약 내가 먼저 진료실에 들어갔다면 난 최면에서 빠져나올 실마리를 영영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 변별하기 어려운 사소한 사건들이 거듭되면 엄마들은 더 많은 책임을 지는 것에 익숙해지거나 무감각 해져 버린다. 엄마는 응당 비난받아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비난은 처음부터 엄마를 겨누고 있기에 피하기 어렵다. 이 오래되고 불편한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수도 있다. 비슷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겨운 나머지, 요즘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고 믿으며 진실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남성 양육자가 소아과 의사에게 질타를 받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아직 충분히 들려지지 않은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오지은 <당신께: 갈 곳 없는 마음의 편지>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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