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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느무느 Aug 01. 2023

약 드세요, 약.

나는 약을 좋아한다. 자주 아픈 사람으로서 아픈 곳을 낫게 해 주는데 싫을 이유가 없다. 약에 관심이 많은 나는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으면 봉투에 쓰여있는 약품명과 설명을 꼼꼼히 읽어본다. 이번 전투에는 어떤 용병들을 파견하게 되는지 스펙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마음이랄까나. 


몇 년 전 얻은 강력한 용병은 항우울제이다. 내가 먹는 약품은 ‘뉴프람정’. 약 봉투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뉴프람정: 신경전달 물질의 양을 조절함으로써 항우울 등의 효과를 나타냄.’ 약을 먹은 지 5년이 넘어가지면 이 문구를 읽을 때마다 여전히 설명이 형편없다고 느낀다. 다른 약들에 쓰인 설명, 예컨대 코막힘을 개선한다는 혹은 객담의 배출을 도와준다는 것과 같은 설명에 비하면 ‘신경전달 물질’ 이라던가 ‘항우울 등의 효과’라는 말은 너무나 모호하지 않은가. 특히 ‘항우울 등의 효과’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약을 받은 최초의 순간에도 정확히 똑같은 의문이 들었지만, 난 절박했기에 겁먹거나 포기하지 않고 약을 열심히 복용했다. 그리고 이 수수께끼 같은 약은 나를 지탱해 주는 여러 용사들 사이에서 단연코 에이스가 되었다.


내가 이렇게나 얼빠진 사람이었던가 하고 느끼기 시작한 것은 나의 우울이 끝도 없이 치닫던 때였다. 인생에서 처음 겪는 우울은 아니었다. 고비라고 느낄 만큼 위태롭게 우울감에 빠졌던 시기를 이미 수차례 지나왔는데 그 막막한 시기가 다시 도래했었다. 나는 사소한 실수들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지난 대화를 잘 기억하지 못했다. 만날 약속을 정하려고 단톡방에서 날짜를 투표로 정하고 강남에서 보기로 했다고 치자. 며칠 뒤 한 친구가 그날 급한 일이 생겨 날짜를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꾸기로 하고, 일요일에는 또 다른 친구가 예약했던 식당까지 오기 너무 멀어 장소를 강남에서 이태원으로 바꾸기로 한 일이 발생한다. 약속을 조정하느라 대화창에서 한참 동안 이야기가 오갔음에도 나는 뒤늦게 대화를 훑어보고 ‘우리 그럼 강남에서 토요일에 보자’ 하고 정신없는 사람처럼 대꾸하는 식이었다.


이런 식의 실수는 회사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가장 크게는 이메일을 쓰면서 자꾸 오타를 냈다. 아니 내가 쓰려는 문장이 내 손에서 제대로 출력되지 않았다. ‘노트북’이라고 쓰려했다면 ‘트노북’이라고 쓴다거나 ‘ㄴ토ㅡ북’이라고 써졌는데, 내가 생각하는 거의 모든 문장을 글로 옮길 때마다 이런 실수를 했다. 타자라면 이미 초등학생 때 한컴 타자연습기로 600타는 훌쩍 넘기던 나였다. 잘 못 써진 단어를 지우고 다시 쓰기 때문에 상대는 느낄 일이 없다고 해도 나는 고작 멀쩡하게 보이기 위해 많은 애를 써야 했다. 어딘가 고장 난 듯 행동하는 나를 목격하는 것은 괴로웠다. 내가 이 정도로 어리숙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내 머릿속이 다른 것에 사로잡혀 지금 해야 할 사고를 방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 다른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우울이었다.


나는 내가 겪고 있던 증상이 개별적이고 분리된 실수들이 아니라 두뇌 오작동에서 기인한 동일한 사건들인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우울한 날은 실수가 더 잦고 실수를 인지한 날은 우울감이 더 심했기에 둘은 분명 연결된 것이었다. 당시 내 머릿속에서는 마음에 영구적인 상처를 남긴 과거의 사건들이 서로 엉겨 붙어 악성 종양처럼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난 그 괴로운 기억들에 수시로 방해를 받았고, 키보드 앞에서 손을 잘 못 놀리게 된다던가 친구들의 대화에 집중을 하지 못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 거대 종양은 나의 상상력을 교란시켜 내 미래는 암울하고 참담할 것이라는 무서운 생각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했다. ‘난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참다 참다 꽥 소리 지르는 심정으로 나는 정신과를 찾았다.


약을 처음 먹고 하루 이틀은 머리만 아팠다. 당장 ‘항우울 등의 효과’가 발휘되지 않은 것은 실망스러웠지만, 알고 보니 항우울제는 그런 식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었다. 우울증 약은 우울을 느끼지 않게 해주는 약이 아니었다. 괴로운 기억은 거기 그대로 있었지만 현실에 불쑥 튀어나와 나를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일은 예전 같지 않았다. 끌고 들어가는 장력이 조금 약한 날도 있었고, 예전에 며칠을 괴로워했던 일이 하룻밤이면 괜찮아지기도 했다. 조금 더 지나자 불안으로 산만했던 마음이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친구들과의 대화도 더 잘 기억하게 되었는데, 마음이 안정되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쏟을 수 있게 되자 자연스레 집중력과 기억력이 좋아진 탓이었다. 


회사에서는 오타만 줄어든 것이 아니었다. 거슬리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사무실에 꼭 한 둘은 있기 마련인데 그런 사람들의 경솔한 말을 들어도 크게 개의치 않게 되었다. 상태가 안 좋을 때에는 오늘 들은 말 한마디에 매달려 혼자 화를 냈다 미워했다 하는 나만 손해인 짓거리를 반복하곤 했었다. 그리고 나면 나의 예민하고 속 좁은 모습에 또 실망하고. 어디 하나 도움이 될 게 없는데 꼭 며칠에 한 번은 이 못난 성격의 태엽이 감겼고 나는 꼼짝없이 못난 습관을 되풀이했다. 그러던 내가 변한 것이다. 마치 어둠에 잡아 먹혀도 하루면 괜찮을 수 있게 된 것처럼, 회사를 떠나고 나면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을 더 이상 떠올리지 않고 있었다. 나는 예민하고 속 좁은 사람이 아니었다. 남의 말을 곱씹으며 힘들어하는 약한 사람도 아니었다. 온종일 묻은 때를 뒤돌아 서서 먼지처럼 털고 떠날 수 있는 힘이 나에게 있었다.


내 인생은 이대로 해피엔딩을 맞이한 것일까. 그럴 리 없다. 약으로 일상의 소음은 잠재울 수 있었지만, 외부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내 안의 불안정한 정념이 다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누군가 나의 진심을 의심한다던가, 내 실수를 빌미로 나의 능력과 존재가치를 폄하한다던가 하면 뉴프람정으로는 부족했다. 약까지 먹고 있는데도 마음의 평화를 얻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새드엔딩 아닌가. 하지만 나의 좌절에 손 잡아 준 것 또한 약이었다. 긴장도가 높아 삶이 버거워지는 증상을 토로하자 병원에서 항불안제를 처방해 주었다. 약물명은 ‘자나팜정.’ 이 약은 솔직히 나에게 술수를 부리긴 했다. 약을 먹고 나면 불안하거나 떨리는 마음이 눈에 띄게 안정되었다. 몇 번의 안정 효과를 경험하자 나는 약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범할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업무 압박이 몰려와도, 좋게 끝날 리 없는 어떤 회의를 앞두고 있더라도 나에게는 약이 있었다. 여차하면 약을 먹으면 될 일이었다.


이 항불안제, 다른 말로 신경안정제는 잠에 들지 못할 때에도 유용했다. 불면을 겪던 내가 취침 전에 먹도록 처방받은 약물은 ‘삼진디아제팜.’ 우울과 불안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과하게 각성시키기도 한다. 나는 우울이 성황인 한밤중에 특히 각성되는 쪽이었다. 너무나 피곤해 온몸이 쑤시고 눈꺼풀은 감겨오지만 결코 잠들 수가 없는 밤이 많았다. 눈을 감고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머릿속은 환해졌고 새하얀 공간에서 내 안의 어두운 자아에게 끝없이 심문당했다. 잠에 들려면 이 심문관을 마주치지 않아야 했는데, 심신 안정뿐 아니라 근육 이완에도 효과적인 ‘삼진디아제팜’은 심문관의 근육도 아주 순살로 만들어 놓은 모양이었다. 약을 먹고 조금 기다리면, 못된 자아는 힘이 쏙 빠졌는지 나를 찾으러 오지 않았다. 나는 밤마다 호출당할 일 없이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할렐루야.


삶은 여전히 괴롭고 나는 자주 우울하다. 사실 아직도 안 괜찮다. 하지만 인생을 리셋하기 위해 다시 태어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나의 용병들과 해진 곳을 열심히 기워가며 살아간다. 지긋지긋한 인생을 약도 안 먹고 버티던 때를 떠올리면, 지금은 힘들 때 붙들 수 있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현대 의학을 만난 것에 그나마 가슴을 쓸어내린다. 우울이 넘실넘실 계속 밀려오는 파도라면 정신과 약은 패들 보트다. 약이 나를 전방위로 보호해 줄 수는 없으니 대양을 가로지르는 거대 유람선이 될 수는 없다. 그래도 바다 위에서 발을 딛고 엉덩이를 붙일 수 있는 패들 보트가 어딘가. 게다가 건강보험이 적용되어 몇 천 원 밖에 하지 않는데. 거센 파도가 치면 패들 보트고 뭐고 짠 물은 하릴없이 잔뜩 먹게 되지만, 패들 보트 덕에 파도에 잡아 먹히지는 않는다.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 이게 가장 중요하다.


어떤 약도 절대 우울이라는 바다를 메마르게 할 수는 없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폴짝 뛰어넘을 수 있는 작은 시련만 상대할 수 없는 게 인생인지라, 난 약을 끊을 생각이 절대로 없다. 다시는 험한 파도 앞에 혼자 놓이고 싶지 않다.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우울을 마주 했을 때의 공포를 또 느끼고 싶지 않다. 그 공포를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선택지가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약을 먹기 전까지 몰랐다. 이 선택지는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 하루종일 정신적 괴로움에 시달리면서도 별다른 고민 없이 맨 몸으로 감당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대다수이다. 도대체 왜? 하루에 햇볕을 10분도 안 쬐어도 꼬박꼬박 선크림은 바르면서? 


나는 매일 생각한다. 

‘진작에 약 먹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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