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을 한 장 뜯고 보니 육아휴직이 4개월 남았다. ‘육아’ 휴직이긴 하지만 진짜 육아만 하다가 복직하기는 너무 억울하다. 이대로 회사에 끌려갈 수는 없다. 한 달에 한 가지씩 재미있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무엇을, 언제, 어떻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그러기로 했다. 그러다 인터넷에서 발견한 북토크 행사. 글쓰기에 대한 내용이라 더 솔깃했다. 문제는 집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평일 저녁 7시에 진행된다는 것. 그 시간이면 아기들 하원하고 밥 먹이고 목욕시키고 재우고…. 왜 재미있는 일은 항상 아기들 하원하고 일어나는가! 남편에게 독박을 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참가비를 입금해 버렸다. 그래 한 번 가보자.
저녁 6시에 혼자 시내를 운전하는 게 낯설었다. 도로는 이미 차로 가득 차있었다. 주차공간이 협소하다는 안내를 받고 서둘렀건만 퇴근 시간에 차를 몰아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민첩하게 움직이는지 까먹고 있었다. 그래도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들으며 운전하니 낯선 감각은 곧 상쾌함으로 바뀌었다. 조용한 동네의 독립서점에서 진행되는 북토크와 강연. 책과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각자의 고민과 비슷한 관심사를 나눌 수 있겠지. 어떤 사람들이 올까. 나처럼 어린 아기를 키우는 엄마도 있을까. 서로의 sns를 공유하게 된다면 어느 계정을 알려줘야 할까 잠깐 생각했다.
도착시간은 자꾸 늘어났다. 시작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을지 아슬아슬했다. 내비게이션을 켜놓은 핸드폰에 카카오톡 알람이 울렸다. 남편이 아기들 동영상을 찍어 보냈다. 영상을 열어보고 싶어서 마음이 간지러웠지만 빨리 도착해야 영상을 열어볼 수 있을 터였다. 한참이 지나도 체증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 애가 타는 와중에 핸드폰이 다시 한번 울렸다. 이번엔 모임 주최 측에서 보낸 문자였다. 주차공간이 다 찼으니 다른 곳에 주차하라는 내용이었다. ‘아오, 결국 그렇게 됐구먼!’ 머리를 쥐어뜯었다. 큰맘 먹고 뛰쳐나온 밤이 시작하기도 전에 제대로 풀리는 게 없었다. 주최 측에서 안내해 준 다른 주차장으로 내비게이션 목적지를 변경했다. 그곳에서 행사장까지 가려면 또 꽤나 걸어야 했다. 미지의 곳으로 향하는 드라이브가 더 이상 상쾌하지만은 않았다.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서 느낀 초조함은 모임 장소에 도착해도 해소되지 않았다. 북토크 시작에 앞서 남편이 보내준 영상을 몰래 보았다. 아기들은 저녁밥을 먹다 말고 애착 이불을 망토처럼 두르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당장 집에 가서 이불로 아기를 돌돌 말아서 들어 올리고 싶어졌다. 이불 김밥은 아기들이 좋아하는 놀이이다. 짧은 영상 하나에 내 마음은 집으로 달음질했다. 애당초 모임에 늦을까 봐 초조했던 게 아니었다. 현관문을 나온 그 순간부터 나는 집에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 북토크는 훌륭했다. 유익한 강의가 준비되어 있었고 스태프들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찬 강의와 대화가 나만 비껴간 이유는 나에겐 이보다 더 강력하고 중독적인 콘텐츠가 집 안에서 계속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갈 때는 죽어라 막히던 길이 돌아올 때는 뻥뻥 뚫려있었다. 아가들은 이미 잠든 밤 10시, 서두를 필요 없다는 걸 알면서도 느긋하지 못했다. 남편에게 전화해 보니 여느 때와 같이 아기들은 잠들 때 나를 찾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자리를 비운 것이 아기들에게 굳이 미안할 일은 아닌 셈인데도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오늘 하루 육아를 땡땡이쳤다는 죄의식에서 발로한 감정만은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딱히 다른 설명을 가져다 붙이기도 어렵다. 아침에는 정신없이 준비시켜 어린이집에 보내기 때문에 오후에 하원하고 나서야 제대로 눈 맞추고 놀아 줄 수 있는데 그 시간에 자리를 비운게 어딘가 거북했다. 물론 아기들은 엄마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래도 설득이 안 된다. 그냥 내가 용납이 안 되는 거다.
‘내 새끼 보는 게 제일 재미있다’고 말하는 듯한 내 안의 고슴도치 엄마적 면모를 제대로 목도했다. 자랑스럽지는 않았다. 분명 육아는 고된 것인데 역설적으로 육아에서 벗어나니 아무런 즐거움도 의미도 찾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꽤나 페미니즘과는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 엄마들에게 육아를 제외한 다른 여가나 사교활동 혹은 자기 계발 시간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나의 꼬락서니를 보라. 나의 취미활동에 새로운 영감을 얻고 나를 환기할 수 있는 비육아적 활동을 찾아 집 밖으로 나왔지만 이번 외출을 통해 내가 얻은 깨달음이란, 육아를 내팽개치고 밖에 나와있으면 겁나 꺼림칙하다는 거였다. 마음이 어찌나 불편하던지 나는 영감도 환기도 필요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람이 이렇게 모순적일 수 있는가. 내가 이렇게 표리부동한 사람이었나!
어쩌면 나는 기회비용을 너무 철저하게 따지느라 이번 외출에 실패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기들을 놔두고 집을 나갔으면 분명 일생일대의 경험을 하고 와야 했다. ‘얼마나 재밌는 일이 벌어지나 한 번 두고 보자’ 하는 마음으로 팔짱을 끼고 있으니 난 외출해 있는 내내 흥이 나지 않았다. 차는 막힐 수 있고, 참가자들 무리에 내가 속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행사장 직원이 나에게만 음료 주는 것을 까먹는 일도 발생할 수 있다. 모든 게 매끄럽고 재미있고 열광할 만한 순간으로 채워지는 건 아니다. 이 단순한 진리를 까먹고, 나의 외출을 육아에 대한 보상으로만 접근하니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실컷 입술을 뜯고 다리만 덜덜 떨다 와버렸다.
육아 휴직이 얼마 안 남았다. 재미있는 일은 아기들 하원 후에 발생하는 것이 맞다. 아기들이 집에 와야 깔깔 웃긴 한다. 이대로 복직할 수는 없다. 아기들하고 원 없이 놀다 가야 한다. 그렇다 해도 예쁜 식판에 영양 넘치는 음식으로 곰돌이 얼굴을 만들어 준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아기들에 대한 애정이 완벽한 육아 노동으로 변환되지는 않는(못 하는) 편이다. 틈만 나면 캔디 크러쉬를 하고 인터넷 쇼핑몰도 기웃거린다. 재미난 일이 발생하기를 기대하면서.
나의 이번 외출이 성공적이지 않았다고 해도 나는 계속 찍어먹어 볼 새로운 이벤트들이 필요하다. 그러니 비록 저녁 모임이라도 나를 부르는 걸 잊지 말아 줘라 친구들아. 재미난 공연이나 행사가 있다면 같이 가자고 한 번만 물어봐주어도 족하다. 그러다 또 동할 땐 야심 차게 육아 땡땡이를 시도할 것이다. 문 밖을 나가는 순간 내 결정을 후회하며 ‘집에 있을 걸…’이라고 곱씹는 미련한 짓을 반복하게 될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