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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 본 썰: 섹시한 사주

by 무느무느


내가 다니는 회사는 현재 우두머리가 미치광이이다. 꼭 들어맞는 말은 아닐 수 있지만 이 사람을 표현하는데 더 많은 공을 들이고 싶지 않으므로 그냥 미치광이라 하겠다. 다행히 복직하고 미치광이에게 직접 시달일 일은 없었는데 지난주에 아주 제대로 엮이게 되었고, 결국 오후 6시 1분에 휴대폰으로 그녀의 짜증 섞인 고함과 같은 통화를 받는 것으로 사단이 시작되었다. (개인적인 사유로, 소리 지르는 사람과 통화하는 것에 대해 심한 트라우마가 있음)


오랜만에 트라우마 공격을 받고 내 심리적 밑동이 뿌리째 흔들리는 걸 경험하며, 미치광이의 처사에 화도 나면서 동시에 나를 "잡아 죽일까 봐" (실제 미치광이의 워딩임) 쫄리기도 하는 며칠을 보내고 있었다. 퇴근하고 카톡으로는 어린이집 엄마들과 히피펌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대화가 흐르고 흘러 사주 이야기가 나왔고 한 분이 사주를 신통하게 봐주는 곳을 소개해 주었는데 한 번 상담에 3만 원이란다. 3만 원? 서울 사주 시세의 반값도 안 되는 것 같은데 신통하기까지 하다니. 어차피 전화 사주니 당장 문자를 보내보았다. 오늘 저녁에 시간 되시나요? 한 시간쯤 뒤에 연락이 왔다. 네 편할 때 연락 주세요.


그래서 또 오래간만에 사주를 봤다는 소리다. MBTI, 혈액형, 또 뭐냐 뭐 그런 류의 것들에는 시큰둥하면서 꼭 주기적으로 사주는 보는 것이 어딘가 떳떳하지 못해, 사주 봤다는 말을 하면서 사족이 길다. 내란 수괴가 샤머니즘인지 무속인지 사이비인지에 그렇게 기대는 바람에 사주 이야기할 때 괜히 더 움찔하는 것 같다.


문자를 주고받은 번호로 애들 목욕할 틈에 전화를 걸었다.ㅇㅇ 분야의 ㅇㅇ 쪽에서 일하실 것 같은데 실제론 어떠신가요~ 하고 내 직장의 카테고리를 가뿐하게 맞추면서 사주풀이는 시작되었다. "당장 내일모레에 진짜 그 미치광이가 저를 잡아 죽일까요"(내일모레에 회의하기로 했었음)라고 물어보긴 너무 쪽팔려서, 회사가 좀 골치 아픈데 직장 운은 어떤가요, 했더니 사주 들을 때마다 매번 듣는 말 비슷하게 '지금 직장이 천직이다, 일 잘 하고 계속 잘 다닐 거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곤 한 술 더 떠서 올해는 뭐 다 무난하고 좋으니 크게 걱정할 것이 없다고. 다짜고짜 좋다고 하니 더 물어볼 것도 없어서 "그 미치광이는 언제까지 그 자리에 있을까요ㅠ" 하고 묻는 대신 "회사 리더십이나 조직에 변화는 없을까요~" 하고 점잖게 물었다. 그것도 내가 원하는 대로 좋은 소식 있을 것 같다고... 휴 그래 진짜 그리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이 뭐라고 회사 사정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들려주는 두리뭉실한 말에 숨통이 좀 트였다.


근데 웃긴 건 그 사주 선생님이 갑자기 내 사주가 "섹시한 사주"라는 것이다. 남편한테 사랑을 많이 받는 사주이고, 내 덕에 남편이 잘 되어서 남편이 잘해준다고 하던가. 이 말도 사주 볼 때마다 자주 듣던 말이긴 한데 잠시 뜸을 들이다가 "한마디로 섹시한 사주라고 할 수 있죠"라고 하는 것이다. 섹시라는, 정말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내 사주 앞에 붙다니. 수녀에 가까운 삶을 산 지 오래라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게 뭐 어떻게 좋은 거예요? 정확한 대답을 받지 못 한 와중에 아빠랑 목욕하던 애들이 소리 지르면서 짜증을 내는 바람에 대화도 잠시 끊겼다. 물놀이하다 뭔가 마음에 안 든 아이들의 짜증으로 집안이 소란스러운 와중에 주제는 다른 이야기로 옮겨갔고, 이미 딴 얘기 하고 있는 사람한테 "아니 근데 저기요" 하고 두 번 물어보기는 좀 그랬다. 아직 나는 "섹시한 사주"라는 단어 뒤에 물음표를 찍고 있었지만 수화기로는 아 네네 하고 뒤이어 나오는 말들에 호응해 버렸다.


마침내 그 '내일모레'가 도래해서 우두머리와 회의를 했고, 사주 선생님 말대로 나는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고 회의는 끝났다. 분명 며칠 전 받은 전화(고함)에서는 나를 타깃으로 삼은 것 같았는데 며칠 사이에 마음이 바뀌었는지 나를 잡아 죽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그 미팅이 뭐 바람직했다거나 문제가 없었던 건 전혀 아니지만 일단은 내 트라우마가 불러일으킨 걱정에 비하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은 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끝나고 나니 다시 떠오르는 건 사주 선생의 "섹시한 사주" 발언. 아 말마따나 인생 좀 섹시하게 살고 싶은데. 이제 와서 섹시하게 살 일이 뭐가 있다고 섹시한 사주라니. 수녀 아줌마의 궁금증만 불을 지피는구먼. 도대체 그게 뭐냐고요!!! 한 번 더 전화하게 만들려는 전략인가. 다음번에도 사주 볼 일 있으면 일단 여기에 전화한다... 하지만 못 물어볼 것 같음. ㅋㄷㅋ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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