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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 축구 Apr 29. 2016

판타지거나, 화딱지거나

아내가 결혼했다 (2008) | 드라마 | 119분

"오늘 사실 기분이 좀 울적했었는데, 덕분에 좋아졌어요"

"왜 기분이 울적했는데요?"

"... 아니에요. 말 안할래요"

"왜요, 말해 봐요"

"다 그렇잖아요. 남들한테는 별거 아닌데, 자기한테는.."

"아, 속 터져. 뭔데! 말해 봐요"


"바르셀로나가 졌거든요"




이 여자, 남자를 너무 잘 안다. 당신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원래 우울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안 밝히려 한다. 남자가 끝까지 추궁하자 못 이기는 척 대답한다. "좋아하는 축구팀이 졌거든요"


자, 당신이 깊은 최면에 빠지는 순간이다. 게다가 최면을 거는 여자가 무려 손예진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나는, 아니 당신은 이미 그녀의 노예.


새벽이면 해외축구를 챙겨보는 여자. 카탈루냐의 역사 때문에 바르셀로나를 좋아하게 됐다고 말하고, 클루이베르트의 헤더와 히바우두의 왼발을 이야기하는 여자. 축빠들에게 있어 주인아(손예진)은 그야말로 '판타지' 그 자체다.


새벽에 같이 엘 클라시코를 보는 여자, 축빠들의 판타지다


우리야 상상에 그칠 뿐이지만, 그런 여자를 눈앞에 마주한 노덕훈(김주혁)은 어떠했겠는가. 게다가 불행히도 이분은 '금사빠'다. 인생은 순식간에 뒤바뀐다.


덕훈이 인아에게 흠뻑 빠지는 동안, 내 눈빛도 점차 몽롱해진다. 인아는 축빠들에게만 매력적인 여자가 아니다. 예쁘고, 사랑스럽고, (여러 면에서) 솔직한, 그야말로 완벽한 여자다. 이런 여자가 자신을 사랑한다는데 어떤 남자가 마다할까.


하지만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면 재미가 없지. 판타지는 깨진다. 그것도 와장창.


다른 남자랑 또 결혼하겠다고!!?




'아내가 결혼했다'


이 영화의 제목은 비유나 상징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다. 완벽해보였던 인아의 정체는 폴리아모리(Polyamory: 두 사람 이상을 동시에 사랑하는 다자간 사랑을 뜻하는 말). 그녀는 덕훈과 결혼한 상태에서 다른 누군가와 또 다시 결혼하겠다고 태연하게 말한다. 판타지가 화딱지로 바뀌는 순간이다.


덕훈의 시련도 시작이다. 감정은 널을 뛴다. 인아를 사랑하는 마음과 치미는 분노가 격렬하게 대립한다.


"....나, 당신 만난 거 후회해. 당신 미워해. 당신 마음대로 해. 웃지 마. 이런 내가 쏴죽이고 싶게 미워지니까"


판타지를 자극하던 영화는 종반으로 갈수록 분노를 유발한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점차 인아의 성향을 받아들이는 덕훈의 모습 때문이다. '저런 호구가 다 있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런데 우습게도 인아가 밉다는 생각은 안 든다. 나쁜 X이지만, 그 와중에도 너무 예쁘고 매력적이다. (주관이 아니라 객관이다!) 또 너무 당당하고. 그래서 이 영화는 거부감보다 '불편함'이 쌓인다.


손예진의 또 다른 남자, 주상욱




"형님은 한국 축구의 문제점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 골 결정력 부족이잖아"

"그렇죠, 골 결정력 부족. 그런데 난 그 얘기 들을 때마다 조금 (기분이) 그래요. 한국 축구의 문제는 골 결정력이 아니라 축구를 즐기지 못한다는 거에요. 모두가 하나가 돼서 골을 향해 달려가는 그 집단적 황홀감 같은 거요. 적이 꼭 적인가? 다 같이 골을 향해 달려가는 거지"


인아가 사랑하는 또 다른 남자, 한재경(주상욱)이 영화 종반부 덕훈과 술자리를 가지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언뜻 들으면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비유를 이해하면 어이 없는 대사다.


덕훈이 바라는, 즉 인아의 남편으로서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을 한국 축구의 골 결정력을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것과 같이 구시대적이고 뻔한 이야기로 치부하고, 인아의 가치관을 받아들여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축구를 즐기다', '집단적 황홀감' 따위의 단어로 치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화딱지는 절정에 이른다.


하지만 영화는 우리의 화를 풀어줄 생각은 않고, 그대로 직진해 끝나 버린다. 덕훈은 결국 재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인아와 딸 지원, 그리고 재경까지. 네 명이 다 같이 함께하는 길을 택한다. 뭐야, 이거.





개운함보다는 찝찝함이 남는다. 모호한 감정이 치밀어 오르고, 가치관의 혼란이 온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분명하게 뇌리에 남는 게 있다. 축구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축구와 함께 간다. (오프닝과 엔딩 모두 엘 클라시코다!)


물론 일반적인 축구 영화와는 분명 다르다. 위대한 선수를 심도 깊게 조명하지도 않고, 독특하거나 감동적인 축구 이야기를 다루지도 않는다. 축구팬의 이야기, 다시 말해 우리 곁의 축구 이야기에 여러 상징과 암시를 넣어 전체적인 내러티브와 버무렸다. 불편함을 걷어내고 생각한다면, 이 영화는 축구라는 소재를 꽤나 잘 활용한 영화다. 흥미를 돋우고, 생각할 거리도 남긴다.


판타지거나, 화딱지거나. 살면서 누군가를 만난다는게 결국 그렇다. 이 영화는 다소 극단적인 설정과 표현을 활용했지만.


그리고 축구도 마찬가지다. 판타지거나, 화딱지거나. 축구에 인생이 담겨 있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 이 영화는 미성년자 관람 불가다. 궁금한 미성년분들은 조금만 더 참아주시길. 


영화 공식 예고편



글 - 김정희 (前 베스트일레븐 기자)

사진 - 영화 스틸컷, 포스터

교정 - 오늘의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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