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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 축구 May 31. 2016

망설이지 마. 인생 모르는 거니까

호주 시드니,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 (ANZ 스타디움)

누군가 내게 2015년 5월 30일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무조건 토트넘 핫스퍼의 유니폼을 사고야 말테다. 그럼 또 다른 후회를 할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땐 꼭 유니폼을 한치의 망설임 없이 살 것이다.




시드니가 이제 막 늦가을에서 겨울에 들어가려던 때였다. 긴 소매의 맨투맨만 입기엔 제법 쌀쌀해진 5월의 마지막 토요일 늦은 오후. 영국 북런던의 축구 클럽인 토트넘과 호주 A리그 소속 시드니 FC 간의 경기가 있는 ANZ 스타디움으로 부리나케 발걸음을 옮겼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회 주경기장이었던 ANZ 스타디움. 우리나라가 준우승을 차지한 2015 AFC 아시안컵 결승전이 열렸던 장소이며, 8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상당한 규모를 자랑한다. 난 기차를 두 번 환승해 경기장이 위치한 시드니 올림픽 공원에 도착했다.


오후 4시 27분. 경기시작이 3시간 반 가량 남았지만 일찌감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생애 처음으로 유럽 명문팀의 경기를 눈앞에서 본다는 기대감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경기장 앞에는 펍, 가판대, 공식 팝업 스토어 등이 열려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영국에 직접 가지 않고 처음으로 만나는 북런던의 그 명문클럽 아닌가. 스카프, 열쇠고리, 경기책자 등을 샀다. 이때 사실 유니폼을 살까말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이유인즉 앞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두꺼운 라인이 내마음을 흔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일은 참 모른다. 이 글을 적고있는 지금, 손흥민이 그 토트넘 유니폼을 입고 있을줄이야. 진짜 저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유니폼을 가장 먼저 사겠다고 거듭 다짐하며 아쉬워하는 건 그래서다.



마음만은 화이트 하트 레인


팝업 스토어 오른쪽에 기념사진 촬영을 위한 판넬이 마련되어 있었다. 스카프도 샀겠다 마음만은 화이트 하트 레인. 혼자온 듯한 아저씨에게 촬영을 부탁했다.


TV로만 보던 토트넘 경기를 직접 보게됐다는 설렘으로 스카프를 펼쳤다. 가슴이 뛰었다. 영국은 아니지만 영연방 국가에서 보는거니까 EPL 경기를 보러 가면 이런 기분이겠지?


팝업스토어 왼쪽에는 호주 현지 후원사인 'R'사에서 마련한 크로스바 챌린지가 열렸다.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지고 단 한 번이라도 맞히면 축구공을 주는 이벤트였다. 


축제이니 만큼 나도 대열에 합류했다. 간단한 절차를 거쳐 도전! 결과는 슬프게도 하나도 못 맞혔다. 괜히 쌀쌀했던 날씨 탓을 해본다.


해가 뉘엿뉘엿지기 시작했다. 경기를 보러 온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기온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반대로 고조됐다. 한껏 뜨거워진 분위기를 전하기 위해 현지 취재진도 급 분주해졌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특히 아이들이 많이 모였다. 덩달아 나도 무리에 합류했다. 내심 내게도 인터뷰를 권하려나 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기자의 질문에 제각각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팀 이름을 말했고 가장 좋아하는 토트넘 선수 이름을 말하기도 했다.


아이들과 인터뷰 중인 현지 취재진


인터뷰는 못해도 생방송 화면에 잡히기라도 해보자 싶어 서성거렸다. 기자와 아이들의 모습을 담는 내모습이 몇번 잡혔다. 생각해보니 나도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였던거 같다.


아이들의 인터뷰는 마치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 같았다. 나는 더 사람이 많아지기 전에 허기를 달래기 위해 음식가판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핫도그와 콜라를 구입해 근처 벤치에 앉은 뒤 경기 책자를 펼쳤다.


축구를 사랑하는 이들이 영어공부하기 제격. 대략 만원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경기장쪽으로 다시 움직였다. 시끌벅적하다. 무슨일인가 싶어 다가가 보니 시드니에 있는 토트넘 서포터가 응원가를 부르며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현지 방송사 리포터는 열정적인 축제 분위기를 담아내기 위해 팬들의 응원을 더 적극적으로 유도했다.


분위기를 끌어올리던 토트넘 서포터들


서포터 무리를 지나 경기장에 더 가까이 접근하자 토트넘의 마스코트인 '치피' 가 서 있었다. 그냥 지나갈 수 있겠는가. 넉살좋게 또다시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역동적인 손인사는 덤.


치피와 한 컷



시원한 경관, 새의 흔적 그리고 따뜻한 차


이젠 진짜 경기장에 들어설 차례다. 티켓을 손에 쥐고 경기장 입구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줄을 서서 기다렸다.



곧바로 입장이 시작됐다. 가장 저렴한 자리를 구한 탓이겠지만, 입장 후에도 내 자리를 찾아가는 길은 계속 빙빙 도는 오르막길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재촉한 걸음이었음에도 10분은 족히 걸었을까. 마침내 내 자리가 위치한 스탠드 입구가 보였다. 신이 나서 들어갔건만 거기서 더 올라가야 했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좀 더 오른 곳은 경기장 지붕이 닿기 직전의 자리.


자리에 도착해 벅찬 숨을 몰아쉬고 약간 실망한 뒤 천천히 돌아섰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심장을 뛰게했다.


멋진 축구경기장이 선사하는 눈호강


그야말로 탁 트인 경관에 가슴이 시원해졌다. 선수들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선수들은 못보더라도 경기 자체를 관전하기엔 최적의 위치라는 점으로 위로삼았다.


시원한 경관을 넋 놓고 보다가 정신을 차려 내가 앉을 좌석을 살펴봤다. 절망적이었다. 내 자리는 지붕 근처라는 것을 새들이 증명해줬다. 그 많은 흔적들...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경기 내내 좌석 등받이에 기대서 볼 수 없는 자리였지만, 그래도 어떻게 온 직관인데! 달아오른 열정은 막을 수 없었다.


핫도그가 좀 부실했는지 다시 속이 심심해서 스낵바에 갔다. 마침 도넛을 팔길래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한 상자에 6개나(!) 들어 있는 도넛을 안고 행복감에 젖어 자리로 돌아왔다. 겨울이 시작되려면 아직 좀 남았음에도 축구장이라 그런지 해가 지니 제법 쌀쌀했는데, 지금도 그 느낌은 생생하다. 따뜻한 차와 도넛.



허리케인의 위력을 실감하다


도넛을 순식간에 비우고도 아쉬워 입맛을 다지던 중, 경기 시작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선수소개가 시작됐다. 경기장 전광판에 토트넘 선발출전 선수들의 얼굴이 차례로 표시됐다. 장내 아나운서가 멋들어지게 선수들을 소개했다. 해리 케인과 크리스티안 에릭센의 차례에 특히 호응이 컸다.


전광판 선수소개


선수소개가 끝나고 댄스캠 시간이 이어졌다. 카메라들이 관중석 여기저기를 비추면 춤을 추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벤트 시간이었다. 재밌는 건 도중에 토트넘의 숙적인 아스널 유니폼을 입은 관중들이 비춰졌는데, 그들이 아랑곳하지 않고 춤을 추자 정말 엄청난 야유가 쏟아졌다.


저녁 8시. 선수들이 입장했다. 다시 10여 분 뒤 전광판으로 카운트 다운이 시작됐고 관중들이 힘차게 따라 외쳤다. 폭죽과 함께 시드니 FC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토트넘은 주전 선수들을 빼지 않고 최고 전력을 갖춰 나왔다. 특히 2014/15시즌 EPL 득점 2위를 차지한 최전방의 해리 케인에게 모든 관중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경기 초반 안드로스 타운젠드의 슈팅을 시작으로 토트넘은 특유의 매서운 공격력으로 시드니를 몰아붙였다. 해리 케인은 '허리케인'이라는 별명답게 슈팅 가능한 위치와 각도를 따지지 않고 어디서든 골대 근처로 슛을 날리며 날카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타운젠드 첫 슈팅 장면 직캠


에릭 라멜라의 라보나 킥도 직접 볼 수 있었다. 워낙 순식간이라 아쉽게도 영상으로 담아내는데는 실패했지만 라멜라가 구사한 이 기술 하나로 모든 관중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시드니는 토트넘에 맞서 간헐적으로 공격 전개를 시도했지만 이렇다 할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다. 그나마 오른쪽 날개로 뛰고있던 버니 이비니가 스피드를 활용하여 돌파하는 모습이 눈에 띄는 정도였다. 내 옆에 앉아 있던 현지인은 시드니 FC의 팬이었는지 이비니가 돌파할 때마다 연신 이름을 외쳐대며 격려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관중들이 토트넘을 일방적으로 응원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득점 없이 전반전이 종료될 것 같던 43분경. 안드로스 타운젠드와 함께 좌우를 바꿔가며 시드니를 흔들던 에릭 라멜라가 중앙 돌파 이후 상대 수비진을 돌아 뛰어들어가던 해리 케인에게 멋들어진 패스를 연결했다. 완벽한 기회였다. 케인은 공의 흐름을 그대로 살린 채 슛으로 연결, 시드니의 골망을 갈랐다.


해리 케인 선취 득점!


그렇게 전반전은 1대 0으로 토트넘이 앞선 채 종료됐다. 더 내려간 기온 탓에 따뜻한 차 한 잔이 또 생각나서 얼른 스낵바로 다시 향했다. 이번엔 줄이 제법 길었다. 그래도 기다리자는 생각에 포기하지 않고 버텼더니 금세 후반전이 시작돼버렸다. 스낵바 천장에 있는 TV로 경기를 보며 기다렸다. 당시 따뜻한 차가 얼마나 간절했으면 직관을 와서 TV로 경기를 볼 정도로 참고 기다렸을까.


여튼 차를 받아 자리로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장 입장 관중수가 전광판에 표시됐다. 71,549명. 엄청난 숫자였다. 하지만 이 기록은 사흘 뒤 열린 첼시 vs 시드니 FC 경기가 8만명을 넘기면서 최고기록으로 남겨지진 못했다.


후반 15분이 지나자 토트넘에서 선발 출전 선수들을 하나 둘씩 교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0분이 거의 다 돼서는 해리 케인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까지 모두 교체해버렸다. 해리 케인만 홀로 풀타임을 소화했다.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알 순 없었지만 뛰는 선수 본인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계속 남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케인은 인상적인 움직임을 많이 보여주긴 했는데, 선제골 외에 몇 번의 확실한 득점기회를 골로 연결시키지 못해 아쉬웠다. 선수 본인은 오죽했을까.


후반 들어 시드니가 꽤 날카로운 모습을 보여줬으나 토트넘은 끝까지 집중력을 놓지 않으며 1대 0으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미련없이 집으로, 밀려오는 후회


경기가 종료됐다. 추운 날씨 때문에 발걸음을 더 재촉했다. 벅찬 가슴을 안고 기나긴 경기장에서 내려오는 길에 문득 바라본 야경이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이런게 직관의 묘미 아닐까 싶었다.



경기장 앞 광장에서는 경기 전에 미처 기념품이나 용품을 구입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팝업 스토어들이 판매를 재개했다. 나도 경기 전 구매하지 못한 비니 모자를 사기 위해 갔지만 역시나 매진. 괜히 유니폼을 한 번 더 보고는 경기 전과 마찬가지로 사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미련없이 뒤돌아서서 집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몇 주 뒤.


독일 분데스리가 바이언 레버쿠젠 소속으로 좋은 활약을 이어가던 손흥민이 토트넘으로 깜짝 이적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 소식을 접하던 순간, 팝업 스토어에서 두 번이나 고개를 저었던 순간이 후회로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래, 인생 참 모르는 거구나.



글·사진 - 최대현 (축구전문 팀블로그 더풋블러 운영자)

영상 - 최대현

교정 - 오늘의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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