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 <누구나 카피라이터> 독후감
직접 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눈으로 보고 머릿속으로 계획할 때까지는 쉽지만, 막상 해보면 어려운 것들. 나한테는 글쓰기가 그렇다.
브런치와 블로그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글을 잘 쓰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혼자 일기를 쓰다 흡족한 문장이 나올 때도 있고, 업무 메일도 깔끔하게 잘 쓴다는 피드백을 종종 들어왔으니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읽어줬으면 하는 글을 쓰는데 반응이 없으니 점점 자신감이 떨어졌다. 나와는 달리 집중해서 읽을 수밖에 없는 필력 좋은 작가들의 글을 보면 포기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분명 혼자 쓸 때는 잘 쓰는 것 같았는데, 막상 세상에 내어보니 부족함을 절감하게 됐다.
부족한 내 글과 잘 쓰는 작가들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잘 쓰는 법'에 대한 책을 찾아봤다. 그렇게 집어든 카피라이터 정철의 <누구나 카피라이터>는 저자의 창작 과정을 생중계한다는 컨셉을 담은 책이다. 누구보다도 임팩트 있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의 뇌를 들여다볼 수 있다니. 나한테 딱 필요한 책이었다.
이 책은 저자의 실제 카피라이팅 사례를 중심으로 풀어가며 크게 세 가지 주제에 대해 다룬다.
1) 카피라이터에게 필요한 마인드
2) 좋은 카피라이팅을 위한 꿀팁
3) 프리랜서로 살아남는 법
각각에 대해 책의 문구 중심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주제는 다시 네 개의 꼭지로 나눌 수 있다. 의미 또는 재미, 무엇보다 중요한 구체성, 될 때까지 고민하는 치열함, 그리고 부담 없이 베끼는 것.
#의미 또는 재미
의미 또는 재미,
둘 중 하나는 붙들어야 글입니다. (46 p)
이 말은 사실 이 책에서 처음 본 게 아니다. 예전에 <배민다움> 책에서도 인상 깊게 보았고, 배달의 민족에서 배민신춘문예를 진행할 때마다 우수작 가이드로 제시한 문구이기도 했다. "풋! 하고 웃기거나, 아~하고 공감되는 시".
짧든 길든 하나의 글을 보통 스토리를 담는다. 그리고 스토리텔링은 조금이라도 웃기거나 공감이 가야 한다. 이에 실패한 긴 글은 금방 이탈이 발생하고, 짧은 글은 눈길을 사로잡지 못한다.
하지만 제일 어렵다. 그래도 브랜딩으로 유명한 배민에서도 강조하고 유명 카피라이터도 강조하는 내용이니, 계속해서 고민하는 수밖에.
#구체성, 또 구체성.
재미가 있거나 공감이 가려면 어떡해야 할까? 저자는 이에 대한 기본 원칙으로 '구체성'을 강조한다. 책 후반부에서는 "지겨워서 머리에 딱지 앉을 때까지 강조하고 싶"다면서 "구체성. 구체성. 구체성."(318 p)을 세 번 외치기까지 한다.
대표적인 예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 3개를 소개한다.
4밀리미터 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양동이 세 개에 가득 담길 만큼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머리는 길지만 천박한 여자애를 이백오십 명은 알아. (102 p)
나는 세 번째 문장을 보고 단번에 <노르웨이의 숲>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아봤다. 등장인물 이름이 나오지도 않고, 구체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것도 아니다. 명대사라고 할 수도 없는 이 일반적인 문장이 책을 떠올리게 한 것은, 처음 보았을 때 '이백오십 명'이라는 구체성이 신선하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자신이 직접 고민해 본 카피로 구체성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놋그릇에 다음과 같은 카피가 붙었다고 하자.
전통의 혼, 조상의 소중한 문화유산
무난해 보인다. 정통 유기그릇이니 격조 있어 보이고, 역사를 담은 느낌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라 무난하게 보이는 것일 수 있다.
이에 대해 저자가 제시한 카피는 다음과 같다.
오늘은 황희 정승과 겸상입니다 (104 p)
짧지만 웃기다. 그리고 구체성이 있다. 위의 문장을 방금 보고, 직전에 있던 카피는 벌써 까먹었을 것이다. 전통, 혼, 조상, 문화 같은 정석적인 단어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의미를 드러내고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게 구체성의 힘이다.
저자는 이런 '구체성'을 연습해 볼 수 있게 실제 학생들에게 내는 몇 가지 문제를 던져준다. 나중에 연습해 보면 좋겠다.
낙서금지를 다르게 표현한다면? (ex. 마동석이 사는 곳입니다)
주차금지를 다르게 표현한다면?
출입금지를 다르게 표현한다면?
커피에 관한 모든 걸 알려주는 책 제목은?
#천 번 하고 한번 더 고민 중~
그렇다면 이런 구체성은 어디서 나올까? '단순노동'이라고 부를 만큼 반복된 고민 속에서 나온다. '양'으로 '질'을 만들어내야 한다.
문장력은 어휘력. 어휘력은 치열함입니다.
(42 p)
저자는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고민해 볼 것을 조언한다. 내가 보기에도 좋고 클라이언트도 만족하고 대중도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하나의 카피의 단어와 조사를 뗐다 붙였다 바꿨다 하면서 고민해 보라고 한다. 이런 단순노동의 결과로 좋은 것이 나오고, 그런 문장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좋다.
또 하나 신경 써야 할 건 '관성탈피'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문장은 눈에 밟히지 않고 귀에 걸리지 않는다. 도시 슬로건 공모전을 했을 때 수백 개씩 들어올 것 같은 뻔한 문구는 무조건 피해야 한다. 익숙한 표현이기에 괜찮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정답으로 보이는 글은 새롭기도, 남다르기도, 뾰족하기도 어렵다. 이런 실수를 피하기 위해서는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한다.
역시 고민은 '천 번 하고 한 번 더' 해야 하는 법이다.
#부담 없이 베끼고 받아들일 것
고민을 해도 해도 막힐 때는 어떡해야 할까? 저자는 모든 아이디어가 내 머리에서 나와야 한다는 부담을 버리라고 조언한다.
이 마스크, 당신 먼저.
나가 모이면 우리가 되는 게 아니라
나를 버려야 우리가 된다.
바디카피는 <내 머리 사용법>이라는 내 책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양보라는 주제에 딱 맞는 글인 것 같아 내가 나에게서 훔쳐온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 모든 것이 창작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뭐든 갖다 써라. 뭐든 패러디하라. 먼저 찾는 놈이 임자다. 먼저 쓰는 놈이 임자다. (61 p)
본인의 저작물에서 나온 문구를 쓰는 것을 '베낀다'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도 유명한 피카소의 다음과 같은 명언도 있지 않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도 있는 만큼, 때로는 이미 알려진 것을 조금 비틀어서 쓰는 기술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리고 그 편이 메시지 전달을 함에 있어 효율적이다. 그래서 그렇게 마케터들이 유행하는 드라마가 있으면 밈을 활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아이디어는 꼭 내가 내야 한다는 생각.
이 생각은 버리는 게 좋습니다.
내게 아이디어를 찔러줄 사람은 널렸습니다.
(273 p)
적극적으로 훔치는 것 외에 또 하나 경계해야 할 것은 눈과 귀를 닫는 것이다. 내 머리에서 출발해 내 손끝으로 쓰여야만 내 것이 아니다. 인풋은 어디서든 들어올 수 있다. 내 머리에 있는 모든 것들도 이미 어딘가에서의 인풋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순수한 아이디어에 대한 집착은 새로운 아이디어 자체를 가로막을 뿐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더 적극적으로 찾고 훔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책의 주요 화두가 이 내용인 만큼, 이에 대해서는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다 담을 수는 없으니 몇 가지만 기록한다. 닮은 꼴 활용, 아는 단어 다시 보기, 그리고 말투도 목적이 담겨야 한다는 것.
#닮은 꼴 활용
코로나 / 코리아
카피라이터는 압니다. 비슷하게 생긴 단어를 잘 조합하면 리듬 좋고 맛 좋은 카피를 건질 수 있다는 것을. (51 p)
이런 식이다. 사람은 라임(rhyme)에 반응한다. 그래서 서양권은 모든 시와 노랫말이 라임을 담고 있고, 우리나라도 '각운'이라는 개념이 예로부터 있던 것일 테다. 라임은 기억하기도 쉽고, 의미나 재미를 담기도 편하다. 다시 말해, 효율적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다음의 단어들을 족보처럼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어딘가에서 써먹을 수 있도록 하자. 많이 보고 적극적으로 훔치라고 했으니까...
가지다 / 가리다
경력 / 역경
'아마'추어
긍정 / 행동 / 방향 / 성공 / 정상 속 ‘ㅇㅇ‘
'나이''키'
용기=씩씩한 기운 / 그릇 (164 p)
#아는 단어 다시 보기
위의 '닮은 꼴 활용'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여기서는 두 개의 비슷한 단어가 아니라 하나의 단어가 가진 여러 의미를 활용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카피라이팅을 할 때 한 대상의 다른 용도나 중의법을 활용하는 것이다.
마스크는 두 가지 기능을 합니다
하나는 바이러스 차단. 또 하나는 쉿. 입에게 조금만 참아달라고 부탁합시다. 비난 쉿. 조롱 쉿. 차별 쉿. 혐오 쉿.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아픈 말이 바이러스보다 더 위험한 바이러스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배운 아름다운 말들을 아낌없이 사용할 때입니다. 격려. 배려. 위로. 응원. 포옹. 칭찬. 믿음. 긍정. 희망.
저자가 코로나 / 코리아 공익 캠페인을 진행할 때 활용한 카피다. 코로나 초반, 확진자가 나오면 확진이 된 대상을 비난하는 여론과 신상 털기가 일상화된 시기에 조금만 자중하자는 메시지를 담은 부탁이었다.
여기서 당시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인 '마스크'를 주인공으로 삼아, 가장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질병 예방'이 아닌 '입을 막는 것' 자체에 주목해 메시지를 담았다. 사람들이 잊고 있던 기능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눈길을 끌고 호기심을 자아낸다.
하나의 단어를 놓고 다른 의미를 활용해서 임팩트를 주는 걸 제일 잘하는 건 래퍼들이다. 이 포인트는 래퍼들의 펀치라인을 연구해 봐도 좋겠다. 듣거나 봤을 때 'Woah~'나 'Damn~' 소리가 절로 나면 잘 쓴 카피일 테니.
"99점이 100점이 되기 위해 일을 더해"
- 올티 / OLL' Ready
#말투에도 역할이 있다
반말투를 썼습니다. 강해 보이려고. 문장을 짧게 짧게 끊어 갔습니다. 자신 있어 보이려고. 헤드라인 열 개는 톤은 물론 글자 수까지 맞췄습니다. 어지럽거나 무질서해 보이지 않으려고. 잘 정돈된, 잘 준비된 느낌을 주려고. (276 p)
나는 내가 글을 쓰기 가장 편한 투라 반말투를 쓴다. 정말 솔직하게는, 존댓말로 된 글이 오그라들어서 피하는 것도 있다. 반말투가 제일 담백하게 느껴지고, 조금이라도 짧게 쓸 수 있어 선호한다.
하지만 카피라는 건 명확한 타깃이 있는, 팔려야 하는 글이다. 당연히 카피라이터가 편한 방식으로 써서는 안 된다. 개인적으로 오그라든다고 피해서도 안된다. 카피의 말투에도 이런 고민이 담겨야 한다. 어떻게 읽힐지에 대한 목적과 전략이 담긴 말투가 쓰여야 한다. 강해 보이는 역할이면 반말로, 자신 있어 보여야 하면 짧고 간결하게.
이를 위해서는 가끔은 어깨에서 힘을 빼야 할 때도 있다. 전통, 혼, 정의, 국민, 미래 같은 거대한 단어들에 짓눌리면 의미도 재미도 찾기 힘들어진다. 카피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글은 초등학교 5학년도 이해할 수 있게 쓰여야 한다.
결론적으로, 청자가 있는 글에는 그에 맞는 화자가 필요한 법이다.
대놓고 강조하지는 않지만, 중간중간 자신과 같은 프리랜서나 1인 기업가들을 위한 조언도 담겨 있다. 예를 들어, '일을 맡기는 사람에게 믿음과 기대를 주는 것이 일의 시작(153 p)'이라는 조언과 저자가 PT를 어떻게 준비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있다.
저자가 PT를 준비하는 내용은 '아흔다섯 장짜리 PPT'라는 소제목 아래, 이미지 없이도 장표가 그려지듯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 이를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니 나중에 서점에 가서 이 책을 보게 되면 130쪽부터 153쪽까지만이라도 훑어보기를 권한다. 그러면 아마 나가면서 이 책을 구매하게 될 것이다.
#겸손보다는 자신감
김해로 갔습니다. 내 광고주가 될 수도 있는 그들은 내 책을 읽었다고 했습니다. 책에 적힌 것 같은 새로운 발상을 받아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때, 이론과 실제가 같을 수 있나요,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위축도 안 되고 겸손도 안 됩니다.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씩 웃어줘야 합니다. 자신감입니다. 일을 맡기는 사람에게 믿음과 기대를 주는 것이 일의 시작입니다. (131 p)
동방예의지국에서 칭찬에 대응하는 방법은 두 가지 중 하나다. 손사래를 치며 겸손을 떨거나 상대에게 칭찬 반격을 날려 칭찬을 무효화시키거나. 칭찬을 받아들인다는 옵션은 웬만큼 숙달되지 않은 이상 영 어색하다.
하지만 업무 환경에서는 중요하다. 특히나 옆에서 나를 추켜세워줄 지원 세력이 없는 1인 기업이나 프리랜서라면 남들이 깎아내리려고 해도 스스로 PR을 해야 한다. 겸손을 떨 여유 따위는 없고, 칭찬에 대해서는 자신감으로 보답해야 한다. '믿음과 기대를 주는 것이 일의 시작'이다.
이렇게 간단한 사례로 저자는 책을 읽을 많은 크리에이터나 프리랜서들에게도 유용한 팁을 준다. 짧은 글로 메시지를 담아내는 내공이 역시 굉장하다.
이 책을 서점에서 봤다면, 뒤표지 문구가 책을 집어든 이유의 8할은 차지했을 것이다.
책의 제목 <누구나 카피라이터>는 여기서 나온다. 작가나 카피라이터, 기자만 글을 잘 써야 하는 게 아니다. 마케터는 당연하고, 심리학자, 크리에이터, 일러스트레이터까지도 글을 잘 써야 한다. 글이라는 건 결국 남들과 소통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글을 쓰다가 막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보면 좋다. 이 책의 마지막 카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