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보이 <믹스> 독후감
글을 쓰다 보면 자연스레 창의성에 관심이 생긴다. 소설이나 시, 예술 같은 순수 창작 분야에서만 창의성이 필요한 게 아니다. 원본이 있는 리뷰 글도 자신만의 언어로 해석하고 생각을 더하려면 결국은 창의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그래서 쓰다가 막히면 답답함에 머리를 쥐어짜게 된다. 그런다고 뭔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의 경우 순수창작이 아닌 분석글만 쓰는데도 기승전결이 있는 스토리로 만들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본업도 마케터다 보니 평소에도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많다. 최근 들어 고민을 하다 막히는 일이 많아져서 아이디어를 내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 <믹스>를 집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차별화, 믹스>는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서 '브랜드 보이'라는 필명으로 활동 중인 브랜드 컨설턴트 안성은 작가의 책이다. 주제는 '섞으면 팔린다 ‘는 한 줄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다. 이를 수십 개의 사례로 뒷받침하고 있는데, 사례 위주라 400쪽 가까운 분량에도 쉽게 읽힌다.
수많은 사례를 '다윗과 골리앗을 섞어라', '모범생과 날라리를 섞어라' 등의 재밌는 소제목으로 뽑아냈지만, '믹스의 목적' 측면에서는 결국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밸런스를 위한 믹스', '의외성을 위한 믹스', 그리고 '자기화를 위한 믹스'다.
뭐든지 극한으로 가면 '모 아니면 도'가 된다. 극성팬은 열광하지만, 가장 모수가 큰 중간층은 놓칠 위험이 있고, 반대로 안티는 극성을 부리게 된다. 명품 업계는 소수의 부유한 고객을 대상으로 하면서 의도적으로 디마케팅을 하며 주요 타깃이 아닌 이들의 ‘선망’을 꾸며낸다. 반대로 동묘 시장은 '만원에 3 벌' 같이 염가로 판매를 하며 저렴하게 옷을 사려는 사람들이나 구제옷을 찾는 특정 소비층에게 어필한다.
그래서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것은 이런 극단적인 선택지가 아닌, 합리적인 가격대와 괜찮은 품질을 갖춘 H&M이나 유니클로 같은 SPA 브랜드다. 양 극단에 속하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SPA 브랜드에서 대부분의 옷을 사고, 가끔 큰맘 먹고 명품을 구매하거나 보물찾기 하는 심정으로 동묘 시장을 들르는 유연한 생활을 한다.
이런 대중, 모수가 가장 큰 중간층을 노리는 게 가장 중요한 직종 중 하나가 연예인이다. 그래서 연예인은 보통 중도를 지키려 한다. 트로트만 부르던 가수들도 어느 순간 발라드 싱글을 내고, 노라조 같은 그룹도 때로는 <형> 같은 진지한 노래를 부른다.
이 책에서 이러한 사례로 드는 게 가수 ’싸이’다.
사실 이 문장만 보면 뭔 소리인가 싶을 수도 있다. ‘나 완전히 새됐어’라는 가사에 새 춤을 추며 당시 유행어인 ‘엽기’의 상징이었던 2001년의 싸이와, 총춤을 추며 <That That>을 부르는 2022년의 싸이는 스케일만 달라졌지 본질적으로 비슷한 색깔의 음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에 따르면 B급으로 보이는 싸이는 사실 처음부터 A급 스타일링으로 ‘밸런스를 위한 믹스’를 하고 있었다.
만약 말춤을 추는 싸이가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등장한 유재석, 노홍철 같았다면 어땠을까. 보기에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별다른 반전 매력도 없었을 것이다.
B급 문화의 기수인 싸이가 말춤을 추기 위해서는 클래식하게 입어야 한다. 그래야 의외성이 있다. 양아치스러움과 대비가 되고, 균형이 잡힌다. 즉, 믹스 덕분에 싸이는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클래식한 아이콘이 됐다. (56 p)
생각해 보면 정말 싸이는 늘 정장을 입고 무대에 오른다. 심지어 <흠뻑쇼>에서 홀딱 젖을 때도 민소매 스타일의 정장을 입고 있다. 가장 자유로운 느낌의 음악을, 가장 포멀한 정장을 입고 추니 그 매력은 배가 된다. 20년 넘게 사랑받는 S급 대중가수가 된 데에는 이 외에도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B급인 척하는 A급 스타일링, 즉 ‘밸런스를 위한 믹스’도 그 비결 중 하나일 것이다.
‘믹스’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1+1이 2가 아닌,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때다. 기존에 익숙한 것을 낯선 것과 섞으면 새로운 것이 된다. 익숙한 대상이라 눈길을 줬다가 새로움에 흡입되는 것이다. 또는 낯선 조합이 궁금해서 보다가 익숙한 대상의 새로운 면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어쨌든 익숙함+낯섦의 믹스가 만들어내는 의외성은 우리의 관심을 끈다.
나영석 피디와 봉준호 감독의 공통점이 보이는가? 모든 이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찾아낸다(70대 할아버지 배우, 국민엄마 김혜자). 그 이미지와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을 섞는다(배낭여행, 사이코). 그렇게 익숙하지만 낯선 새로움을 탄생시킨다(<꽃보다 할배>, <마더>). (352 p)
이 책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섞으면 팔린다'는 공식을 알리기 위해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것이다. 가령 <꽃보다 할배>의 성공은 단순히 70대 할아버지와 배낭여행을 섞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당시에 여행 콘텐츠 자체가 붐이었다는 점, 출연진들의 케미, 여행지 선정 등등 수많은 요인 덕분에 성공한 것이라는 걸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70대 할아버지 + 배낭여행'이 준 새로움은 분명히 의외성이 있었고 확실한 차별화가 되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날만큼 확실한 임팩트를 남긴, 성공적인 '의외성을 위한 믹스' 사례였다.
익숙한 대상을 낯설게 하는 것의 어려움은, 이런 의외성이 때로는 반감을 사기도 한다는 데 있다.
이영희 선생은 한복과 서양의 드레스를 섞었다. 한복의 저고리를 생략하고 치마만 남겨놓았다. 그 위에 은은한 회색이나 먹자주색 같은, 기존 한복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절제된 색을 입혔다.
이영희 선생이 '바람의 옷'을 만들고 욕도 많이 먹었단다. 저고리를 빼고 치마만 입혀놓은 게 무슨 한복이냐, 전통을 무시했다, 국적 없는 옷이다... (310 p)
'믹스'를 시도하는 이유는 새로움을 주기 위함이다. 보통 기업들에서 많이 시도하며, '곰표'가 MZ 세대를 공략하기 위해 여러 브랜드와 콜라보한 것이나, '루이뷔통'이 젊은 타깃의 관심을 끌기 위해 '슈프림'과 콜라보한 사례 등이 이런 리브랜딩의 일환이었다. 곰표는 기본적으로 B2B 기업이라 기존에 팬덤이 있는 브랜드가 아니고, 루이뷔통의 슈프림 콜라보는 특정 타깃을 위한 일회성 이벤트로 인식됐다. 하지만 믹스를 하는 대상의 기존 팬덤이 견고하거나, 믹스를 통해 들어가려는 시장의 팬덤이 견고한 경우에는 반발에 부딪히기 쉽다.
위 이영희 선생의 '바람의 옷'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한복의 현대화와 세계화를 위한 노력으로 실제로 프랑스에서 "가장 모던하지만 가장 한국적인 옷"이라는 찬사를 들었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국적 없는 옷"이라는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원조'를 외치는 이런 '올드팬'들이 '원조'의 발목을 잡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애초에 '올드'팬이라고 하지 '클래식 팬', '오리지널 팬'이라고 하지 않는 것도 변화를 거부하는 이들의 성격을 드러낸 말일 수 있다.
'의외성을 위한 믹스'는 때로는 편견에 도전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 이를 시도할 때는, 이런 반발을 무릅쓰고 더욱 과감하게 나아가야 한다. 새로운 시도로 더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아 올드팬들도 마음을 열 수밖에 없을 만큼 신생팬을 키우면 되는 것이다.
피카소는 "훌륭한 예술가는 베끼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한술 더 떠서 "창의성의 비밀은 그 창의성의 원천을 숨기는 방법을 아는 데 있다"라고까지 했다. 훔치고, 숨기고... 인류 역사상 가장 창조적이라고 불리는 두 거장이 공개한 창작 비법치고는 살짝 저렴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말은 사실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순수한 독창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을 창조한 신이 아니고서야 인간의 창조 행위는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섞는' 것이다. 그런데 '제대로' 섞는 것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도록 섞는 것이다. 그러면 히트한다. (11 p)
인간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낼 수 없다. 인풋 없는 아웃풋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새로움은 기존에 있는 소스를 낯설게 섞는 조합에서 나오는 것이지, 아예 제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결국 창의적인 생각을 위해 필요한 것은 두 가지다. 많은 소스와 그것을 섞는 능력. 하나 더 꼽자면 결과물에 대해 판단하는 눈까지 있겠지만, 이는 많은 소스를 접하고 다방면으로 고민하고 조합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길러진다. 양적 증가가 질적 향상으로 이어지듯, 많이 접하면서 섞는 연습을 해보며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다 보면 결국 대중에 어필할 수 있는 자기만의 스타일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카니예는 1991년부터 1999년까지 나온 모든 힙합 앨범을 재현해 봤다고 하더라고요. 이를테면 나스 앨범의 모든 비트를 자기가 다시 만들어본 거죠. 카니예는 이전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다시 만들어보면서 비트 만드는 방법을 독학한 거예요."
샘플링의 귀재 카니예 웨스트의 시작도 모방이었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비디오 가게에서 수천 편의 영화를 씹어먹은 것처럼, 그 또한 1990년대 힙합 음악을 수없이 재현해 보는 모방 훈련을 거친 것이다. (248 p)
책에서 이러한 맥락으로 소개하는 두 인물이 본인들만의 독보적인 스타일로 강력한 팬덤과 대중성을 동시에 잡은 두 창작자,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와 래퍼/프로듀서 카니예 웨스트다. 이들은 꿈을 키워가는 과정에서 각자의 분야에서 소위 말해 '덕후'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이상으로 몰입했다. 그렇게 수천 편의 영화를 보고 수천 곡의 음악을 분해하고 조립해 보며 팔릴 수 있는 자기들만의 스타일을 구축해 최고 반열에 올랐다.
이렇듯 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창작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만들어질 때까지 그 분야를 파고 여러 가지를 섞어봐야 한다. ‘자기화를 위한 믹스’가 필요한 것이다.
세 가지 믹스 모두 그 자체로 완벽하지는 않다. '밸런스를 위한 믹스'는 잘못하면 두 마리 토끼 잡으려다 둘 다 놓치는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조합이 될 수 있다. '의외성을 위한 믹스'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올드팬의 반감을 살 수 있다. '자기화를 위한 믹스'는 자칫 잘못하면 표절이 될 수 있다.
하나의 사례만 레퍼런스로 삼으면 100% 표절이다. 5개를 조금씩 가져오면 20% 씩 표절이 된다. 100개의 사례를 레퍼런스로 하되 큰 맥락에서 나만의 색깔이 분명하다면, 1% 정도 따온 건 '오마쥬'라는 멋진 말로 훔쳐올 수 있게 된다.
<믹스>에서 설명하는 창의성의 원리는 단순하다. 많이 보고, 다양하게 섞어보고, 세상의 피드백을 받아보라는 것.